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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나라 자산
    참고 자료 2013. 3. 11. 14:04

    자산의 개혁 성공

    1. 형정 - 법률 개정후 공개
    2. 출신성분 - 귀족출신으로 설득을 하여 귀족층의 반발을 막아냄
    3. 약소국으로서 실리외교
    4. 내분 갈등 해결


    자산

    큰 나라를 섬기고,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다

    [ 子産 ]

    자산은 성이 국(國 또는 공손), 이름은 교(僑)이며 자산은 그의 자다. 정(鄭)나라 목공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흔히 정자산이라 부른다. 기원전 547년 재상에 임명되어 기원전 522년 세상을 뜨기까지 20년 넘게 국내 정치를 혁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대외적으로 실용적인 외교활동을 벌여 열강들이 감히 정나라에 칼을 겨누지 못하게 했다. 공자는 자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는 고대 어짊과 사랑의 풍모를 지닌 화신이었다!"라며 애통해했다.

    당시 정나라는 소국인데다 진(晉)과 초(楚)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 두 나라의 신경을 모두 건드릴 수 없었다. 초가 오면 초와 동맹하고 진이 오면 진과 동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쪽 모두를 눈치봐야 하는 힘겨운 외교정책에다 내부 투쟁까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자산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재상이 되어 국내의 정치질서를 회복했을 뿐 아니라 일련의 교묘한 외교활동을 통해 약한 정나라를 열강 사이에서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지위도 존중받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공자가 자산을 그토록 높게 평가한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정 자산

    춘추시대 개혁정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정자산은 법치가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었다.

    강경과 온건을 함께 구사하고, 정치를 깨끗하게 하다

    정치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자산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정치는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하나는 너그러움이고, 하나는 엄격함이다. 덕망이 높고 큰 사람만이 관대한 정치로 백성들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물과 불을 가지고 비유하면 적절할 것이다. 불이 활활 타오르면 백성들은 겁을 먹는다. 따라서 불에 타 죽는 사람은 아주 적다. 물은 성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백성들이 겁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물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관대한 통치술이란 물과 같아 효과를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엄격한 정치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이다.

    공자도 이런 정치관을 칭찬했는데, 자산의 말을 듣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리가 있다. 지나치게 관대하면 백성들이 게을러져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격한 법으로 다스리면 상처를 내기 쉬워 다시 관대함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강경과 온건을 함께 구사하여 서로 보완하도록 해야만 정책이 통하고 인화를 이룰 수 있다.

    자산이 병이 든 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자 자태숙(子太叔)이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그는 차마 엄한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관대한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정나라에 도적이 갈수록 늘고 사회 치안이 혼란에 빠졌다. 자태숙은 "그 분(자산)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골치는 없었을 것을"이라며 후회했다. 그리하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강도들을 무력으로 잡아들이고 죽였더니 사회 치안이 비로소 나아졌다.

    자산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통치집단 내부의 암흑, 정치문란, 민중들의 무법, 불법비리 등 범국가적인 혼란에 맞서 먼저 국가질서를 정돈하는 일부터 손을 댔다. 법규와 제도를 건전하게 다듬고 통치기구의 등급을 제대로 갖추었으며, 각종 법률조항을 형정(刑鼎)에다 새겨 전국에 반포했다(이는 아마 중국 최초의 성문법이 될 것이다). 각종 엄격한 제도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곧 혼란 속에 빠져 허우적대던 정나라에서 이런 조치는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백성들은 원망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냈고, 심지어는 노래까지 만들어 자산을 저주했다. 그러나 자산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시정개혁을 굳세게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3∼5년 사이에 정나라의 정치는 큰 효과를 보게 되었고, 백성들은 다시 노래를 지어 자산을 칭송했다.

    자산은 이렇게 엄격한 정책을 밀고 나가는 동시에 민심과 정치적 관용도 중시했다. 정나라에는 '향교(鄕校)'라 부르는 교육기구가 있었다. 이 기구는 원래 통치계급 중 하층 대부(大夫)나 사(士) 등 지방귀족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치한 것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활동의 장소로 변질되어 당파를 짓고 폭동을 일으키는 일까지 발생했다. 자산의 아버지 자국(子國)은 이 폭동의 와중에서 피살되었다.

    대부 연명(然明)은 자산도 아버지처럼 해를 당할까 걱정이 되어 자산에게 향교를 없애자고 건의했다. 자산은 그 건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왜 향교를 없애려 하는가? 조만간 그곳에 모여 권력을 쥔 사람들의 장단점을 논의할 텐데. 그들이 칭찬하는 점은 계속 유지하고 비판하는 점은 고치면 될 터이니, 그곳이 바로 우리의 스승이 될 것이다.

    충성스럽게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백성의 원성도 줄어들 것이다. 위엄과 사나움만 가지고는 원망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비난을 받으면 그것을 하루 빨리 제지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넘치는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 홍수로 인한 피해는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여 어찌해볼 수가 없다. 제방을 터서 물길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느니만 못 하다. 향교를 남겨두는 것은 사람들의 논의를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로써 연명은 자산이 큰 일을 해낼 것이라 믿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공자는 "자산더러 어질지 못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자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순을 이용하여 귀족을 제압하다

    정나라는 오랫동안 대국 세력에 의해 통제당해왔기 때문에 통치계층 내부의 귀족세력도 이해관계에 따라 상호간 모순된 입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권력쟁탈을 위해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도 그칠 날이 없었다. 자산은 재상이 된 뒤 국내의 이런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고압적인 수단으로 나간다면 각종 세력이 연합하여 반발할 것이 뻔했다. 그는 잠시 모순을 이용하여 양측 모두 상처를 입힌 다음 다시 하나하나 징벌하는 책략을 구사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사(駟)씨 집안의 자석[子晳, 공손흑(公孫黑)]은 일찍이 양(良)씨 집안의 우두머리 백유(伯有)를 죽인 적이 있었다.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사씨의 세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자산은 잠시 죄를 추궁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서오범(徐吾犯)에게는 아리따운 여동생이 있었고, 자남[子南, 공손초(公孫楚)]은 이미 그녀를 아내로 삼고자 했는데 사촌형 자석은 이를 모른 척하고 서오범의 여동생에게 흑심을 품었다. 서오범이 이 사실을 자산에게 고발했다. 자산은 이는 국가의 정치를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뒤 서오범의 여동생은 결국 자남에게 시집을 갔다. 이 사실을 안 자석은 크게 화를 내며 갑옷을 입고 자남을 찾아가 그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고자 했다. 자남은 자석의 음모를 알고는 창으로 자석을 찔러 상처를 입혔다. 돌아온 자석은 이를 깨물며 "내가 좋은 뜻에서 찾아갔는데 뜻밖에 그가 내게 상처를 입혔다"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대부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상의했다. 자산은 자석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이가 젊은 자남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면서 자남이 다섯 가지 법규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국군이 엄연히 조정에 계시는데 무력을 사용한 것은 위엄을 무시하는 것이고, 법을 위반한 것은 정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며, 자석은 상대부이고 자남은 하대부인데 복종하지 않은 것은 귀인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고, 젊은 사람이 공경하지 않는 것은 장자를 받들지 않는 것이며, 무기를 사촌형에게 사용한 것은 친속을 봉양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는 자남을 오(吳)나라로 내쫓았다. 그뒤 자석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자산은 자석의 죄상을 밝히며 자석을 자살하게 했다. 그 다음 자석의 죄상을 적은 나무를 시체 위에 걸어놓고 거리를 돌며 조리를 돌리게 했다.

    비굴하지 않고 신경을 긁지도 않고 대국을 설득하다

    정나라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외교의 성패가 매우 중요했다. 자산은 집정 기간 동안 제후들과 여섯 차례 이상 동맹을 가졌는데, 민첩한 외교수단으로 정나라의 굴욕적인 모습을 바꾸어 명예와 지위를 유지했다.

    기원전 542년 자산은 간공(簡公)을 수행하여 진(晉)을 예방했다. 진의 국군은 일부러 노(魯) 양공(襄公)의 장례를 핑계대면서 접견을 질질 끌었다. 마냥 이렇게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산은 계책 하나를 생각해냈다. 그는 수행원들에게 빈관의 담을 다 허물고 수레와 마차를 모두 뜰 안으로 몰고 오게 했다. 외국 손님의 접대를 책임진 예빈관(禮賓館) 사문백이 항의했다.

    "최근 우리나라에 도적이 날뛰고 있어 빈객들이 피해를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 높은 담을 쌓았는데 귀하께서는 그 담을 왜 허물었단 말입니까?"

    자산은 전혀 동요 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귀국의 초청을 받고 후한 예물을 갖추어 귀국의 국군을 뵈러 왔는데, 당신들은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하고 또 만날 날짜도 확정되지 않았으니 우리가 갖고 온 예물들이 밖에서 비바람을 맞아 모두 썩고 있습니다. 귀국의 문공 때에는 각국의 빈객들을 잘 대접하고 빈관도 호화롭고 편안하여 빈객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군은 호화롭고 장엄한 이궁에서 살면서 빈관은 누추한 골목의 극장 같고 좁기는 수레와 마차도 다닐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도적을 예방한다고 해놓고서 경비 하나 없습니다. 이 예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담을 허문 것입니다. 귀국의 국군이 노의 국군을 위해 복상하시겠다니 우리 국군도 그렇게 해야겠지요. 귀국이 예물을 받아가면 우리는 바로 담을 고쳐놓고 귀국하겠소. 그러니 귀하께서 우리 뜻을 전해주시오.

    진나라의 재상이 보고를 받고는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문백을 통해 자산에게 사과했고, 국군도 서둘러 간공을 만나 융숭하게 접대한 뒤 환송까지 했다. 빈관을 다시 지었음은 물론이다.

    기원전 529년 진(晉)은 평구(平丘)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자산은 정나라를 대표하여 회맹에 참석했다. 각국 대표들은 순서대로 맹서했고 모두 이의가 없었으나 자산은 회비 분담을 줄이는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로부터 납부 조항은 작위 등급에 따라 규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나라는 등급이 백남(伯男)에 해당하는데도 공후 등급의 의무를 부담해왔으니 부담이 너무 큽니다. 우리같이 작은 나라로서는 부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헌금액을 줄여주시기 바랍니다. 회맹을 거행하는 목적이 소국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진대 부담이 너무 크면 소국들은 자멸하고 말 것이고, 이는 회맹의 큰뜻에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존망은 오로지 오늘에 달려 있으니 신중하게 고려해주십시오.

    이 제안을 진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하지만 자산도 양보하지 않았다. 정오에 시작된 회맹은 저녁까지 계속되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간이 이 제안을 논의하는 데 할애되었다. 이렇게 해서 맹주 진나라의 체면은 갈수록 구겨졌고, 전체 국면을 고려하여 진의 국군은 자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물소개 자산

    춘추시대 개혁정치의 물꼬를 튼 정나라 자산은 공자에게서 "고인의 유풍을 이어 백성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걸출한 정치가였다. 그가 재상이 되어 개혁정치를 추진한 결과 1년 만에 더벅머리 아이들이 버릇없이 까부는 일이 없어졌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며, 어린아이들이 밭갈이 등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게 되었다. 2년째가 되자 시장에서 물건값을 속이는 일이 없어졌고, 3년째가 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았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다. 4년이 지나자 밭갈던 농기구를 그대로 놓아둔 채 집에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5년이 지나자 군대를 동원할 일이 없어졌고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해서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들 예를 갖췄다.

    이것이 자산이 이루어낸 정치의 모습이었다. 그는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동시에 적절히 구사하며 정치를 이끌었고, 사람들은 공평무사한 법 적용과 관용에 누구나 수긍하게 되었다. 그의 개혁조치로 사람들은 점차 그것에 적응하며 편리함을 알게 되었고, 결국 서로를 속일 기회도 이유도 없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자산의 '속일 수 없는' 정치의 비결이었다.

    훗날 궁정의 쿠데타가 일어나 그를 죽이려 하자 누군가 나서 자산은 어진 사람으로 자산 없는 정나라는 존재가치가 없다면서 말릴 정도였다.

    정치모략가로서 그는 숨막히는 권력의 함수관계 속에서 '현명함'과 '지혜' 그리고 '개혁'으로 슬기롭게 정치를 이끈 정치관료의 모범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개혁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여 시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펼쳐보였다.

    출처 :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차이위치우 외 지음 | 김영수 편역, 2005.10.20,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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