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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
[ 商鞅 ]-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나라의 정치가. 진 효공에게 채용되어 부국강병의 계책을 세워 여러 방면에 걸친 대 개혁을 단행해 후일 진제국 성립의 기반을 세웠다. 10년간 진나라의 재상을 지내며 엄격한 법치주의 정치를 폈다.
- 출생-사망
? ~ BC 338
- 별칭
위앙, 공손 앙
- 국적
중국 전국시대 진
- 활동분야
정치
- 주요저서
《상군서(商君書)》
위앙(衛鞅) 또는 공손 앙(公孫鞅)이라고도 한다. 위(衛)나라 공족(公族) 의 서출 출신으로 일찍부터 형명학(刑名學)을 좋아하여 조예가 깊었다. 자신의 조국인 위(衛)나라에서는 뜻을 펼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위(魏)나라로 건너갔다. 위(魏)나라 공숙좌(公叔座) 아래에서 사관(仕官)으로 봉직하였으며 공숙좌는 상앙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험한 인물로 판단했는데 자신이 죽으면 상앙을 재상으로 등용하거나 아니면 국외로 나가지 못하게 그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하지만 위왕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공숙좌가 죽자 상앙은 위(魏)나라를 떠나 진(秦)나라로 가서 효공(孝公)에게 채용되었다. 기원전 359년 상앙은 진(秦)나라 변법의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부국강병의 계책을 세워 보수파(保守派:儒家)와 투쟁하면서 형법(刑法)·가족법·토지법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후일 진제국(秦帝國) 성립의 기반을 세웠다. 진(秦)나라가 부강해지자 이웃한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상(商:陜西省 商縣)을 봉토로 받으면서 상앙이라 불렀다.
20년간 진나라의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엄격한 법치주의 정치를 펼쳐 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켰으나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샀다. 기원전 338년 효공이 죽고 아들인 혜문왕(惠文王)이 즉위하자 상앙은 정치적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혜문왕이 왕이 되기전 법을 어겨 상앙에게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복을 당하게 되었다. 반대파들에게서 반역죄로 몰려 체포되었으며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사지가 찢어지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저서로는 《상군서(商君書)》를 남겼으며 통일국가 형성기에 관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상군서(商君書)》는 각 편마다 성립 연대가 달라 전국시대 말기 여러 법가(法家)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다.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상앙
남문에다 믿음을 세우니 법령이 시행되다
[ 商鞅 ]상앙은 위(韋)나라의 귀족 출신으로 위앙(韋鞅) 또는 공손앙(公孫鞅)이라고 불렸다. 젊은 시절에는 위(魏)의 재상 공손좌(公孫痤) 문하에서 식객 노릇을 하면서 중서자(中庶子)로 뽑히기도 했다. 공손좌는 그가 인재임을 알아보고 그를 위 혜왕(惠王)에게 추천할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병이 나 자리에 눕게 되었다. 혜왕이 병문안을 왔고 이 틈을 타서 공손좌는 상앙의 재상 임용을 추천했다. 그러나 혜왕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에 공손좌는 "대왕께서 그를 기용하지 않으시려면 그가 다른 나라로 못 가도록 죽여버리십시오"라고 말했다. 혜왕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혜왕이 떠나자 공손좌는 상앙을 불러 "좀 전에 내가 너를 혜왕에게 재상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왕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또 너를 꼭 죽여야 한다고 했더니 그 말에는 동의했다. 그러니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다"라고 일러주었다.'변법(變法)'이라는 개혁을 상징하는 역사적 용어를 후대에 남긴 상앙은 중국사를 통털어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인물이다.
잡으려면 놓아주어라, 효공을 만나다
공손좌가 죽은 뒤에도 혜왕은 그가 한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위나라의 서쪽에 있는 진(秦)에서는 21세의 젊은 효공이 막 즉위했다. 그는 헌공(憲公)의 유업을 계승하리라 결심하고 야심만만하게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효공은 우선 인재들을 불러모으는 이른바 '초현령(招賢令)'을 내려, 진나라를 강대하게 만들 수 있는 남다른 계책을 내놓는 사람에게는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을 내렸다.
이런 소식을 들은 상앙은 즉각 진으로 달려가 효공의 측근인 경감(景監)의 주선으로 효공을 만났다. 첫 만남에서 상앙은 요·순의 큰 도에 대해 청상유수처럼 늘어놓았으나 효공은 듣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상앙이 물러간 후 효공은 만남을 주선한 경감을 크게 호통쳤다. 하지만 상앙은 다시 경감에게 효공과의 만남을 부탁했다. 닷새 뒤 상앙은 또 요·순·주 문왕·주 무왕의 도를 막힘 없이 줄줄 이야기했으나 효공은 이번에도 잠이 들 뻔했다. 효공은 경감을 호통쳤지만 경감은 효공에게 다시 한번 상앙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
세 번째로 만난 자리에서 상앙은 천하의 패자가 되는 모략을 이야기했고, 효공은 그제서야 흥미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기용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상앙이 물러간 뒤 효공은 지난번처럼 경감을 호통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당신이 추천한 그 사람이 참 괜찮소이다. 더불어 이야기할 만하오"라고 말했다. 상앙도 "이번에는 천하의 패자가 되는 모략을 말씀드렸더니 대왕이 아주 흥미를 보이셨습니다. 내 이미 왕의 의도를 알았으니 다시 한번 더 뵐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렇게 네 번째 면담이 마련되었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며칠을 토론으로 지내고도 피곤한 줄 몰랐다. 경감은 몹시 의아했다.
『사기』에는 이 대목을 상앙이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상앙이 효공의 눈에 들기 위해 처음에는 고의로 제왕의 도를 이야기했고 이것이 상앙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상앙은 본래 '형명(刑名)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던 인물이었는데, 처음 효공을 만나서 왕도를 이야기한 것은 사실 효공의 맥박을 한번 짚어보고 그에 맞추어 그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렇게 해서 효공의 신임을 얻었고, 자신의 정치생애를 열어나갔다.상은 믿음 있게 벌은 반드시, 변법을 추진하다
상앙은 효공에 의해 좌서장이란 요직에 발탁되어 일련의 변법을 시행해갔다. 변법의 내용에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방면이 포함되며, 목적은 중앙집권 제도를 확립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는 데 있었다. 주요하게는 농본(農本)과 법치(法治)라는 두 개의 큰 주제였다.
어떤 사회개혁이 되었건 개혁은 예외 없이 일부의 개인적 이익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또 개혁에 저항하는 힘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백성의 신임을 어떻게 얻느냐가 상앙이 가장 고심한 문제였다. 그는 관리에게 수도 남문에다 세 길쯤 되는 나무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다 "누구든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금 10냥을 상으로 준다"는 방을 써서 붙이도록 했다. 사람들이 서로 숙덕거리며 달려와 기둥에 붙은 방을 보았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앙은 다시 상금을 금 50냥으로 올린다는 방을 붙이도록 했다. 어떤 사람 하나가 반신반의하면서 나무 기둥을 북문으로 옮겼더니 상앙은 그 자리에서 50냥의 금을 상금으로 주었다. 이 사건 이후 새로운 법 조항들이 백성들에게 공고되었다.
신법이 반포되자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특권계급과 그들의 대변자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신법을 욕하고 나섰다. 신법은 바야흐로 심각한 시험대에 올랐다. 공교롭게 이때 태자 사(駟)가 사형선고를 받은 왕족을 숨겨주는 사건이 터졌다. 신법에 따르면 범죄자를 숨기면 마찬가지 죄를 받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태자의 행위는 사형 죄에 해당했다. 상앙은 신법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는 까닭은 고위층 사람이 법을 어겨도 벌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법에 따라 태자 사를 다스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당시 규정에 따르면 태자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앙은 하는 수 없이 타협하여 태자를 보좌하는 장공자 건(虔)을 '코를 베는 비형(鼻刑)'에 처하고 태자의 사부 공손고를 '얼굴을 칼로 그어 묵을 바르는 묵형(墨刑)'에 처했다. 이 일은 전국을 놀라게 했다(『사기』 「상군열전」). 신법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전국책』은 당시 개혁정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상군이 진을 다스리니 법령이 공평무사하게 잘 시행되었다. 벌은 강한 자라고 피하지 않았으며 가깝다고 상을 함부로 주지 않았다. 법이 태자에게까지 적용되어 그 사부를 묵형에 처했다. 몇 년 뒤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았고, 군대는 강해지고 제후들은 두려워했다.
전국시대 각국은 앞다투어 변법개혁을 시행했다. 지도는 그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공자 앙을 편지로 이간하여 위를 대파하다
상앙의 변법으로 진은 크게 부강해졌다. 내부 정치는 맑아졌고, 생활은 안정되었다. 주 현왕(顯王)도 제사용 고기를 효공에게 내려 특별히 존중의 뜻을 나타냈다. 제후들이 찾아와 축하의 인사말을 올렸다. 이로써 패업을 향한 효공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이에 상앙은 위나라가 제나라에 다시 패한 틈을 타서 위를 공격하여 진의 패업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위나라는 공자 앙(卬)을 장수로 삼아 진을 막게 했고, 진은 상앙을 장군으로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출전하게 했다. 상앙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규율은 경계에 있다"고 생각하여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하나의 계책을 생각해냈다. 사실 공자 앙은 한때 상앙의 절친한 친구였다. 상앙은 직접 한 통의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권유했다.
"당시 제가 위나라에 있을 때는 그대와 좋은 친구였는데 지금은 두 나라의 장수로 나누어졌습니다. 하지만 어찌 서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연회를 열어 함께 대화하면서 평화조약을 맺고 기쁘게 술을 마신 다음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진과 위가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합시다."
공자 앙은 좋은 이야기라 생각하여 화의를 위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앙 진영으로 왔다. 진작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은 상앙은 앙이 접근하자 기습하여 앙을 사로잡았다. 장수를 잃은 위나라 군대는 크게 흔들렸고 결국 대패했다. 상앙은 앙을 잡아 진으로 돌아왔다.
상앙은 "군사는 속임수를 꺼리지 않는다"는 『손자병법』의 기본 모략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진의 대승은 상앙의 모략사상의 승리이기도 했다. 위나라는 이 패배로 원기를 크게 상실했고, 위 혜왕은 하는 수 없이 하서의 땅을 떼어주며 진에 화의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압박을 받아 대량(大梁)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혜왕은 "그 옛날 공손좌의 말을 듣고 상앙을 죽였더라면 지금 이런 비통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이라며 후회했다.
기원전 338년 진 효공이 45세의 한창 나이에 병으로 죽고 효혜왕(孝惠王)이 즉위했다. 조량(趙良)이란 자가 상앙에게 물러나라고 충고했으나 상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효혜왕이 누구인가. 태자 시절 법을 어겼다고 상앙에게 처벌 받았던 그 사람이었다. 효혜왕은 사람을 보내 상앙을 체포하게 했고, 정나라 민지라는 곳에서 도망치던 상앙을 잡아 죽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효혜왕은 상앙의 시체를 수레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상앙의 가족 친지들도 모조리 죽였다.
상앙은 죽었지만 그가 시행했거나 제시한 일련의 정책들은 진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백 년 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으니, 상앙이 통일의 기초를 놓았던 셈이 된 것이다.인물소개 상앙
기원전 4세기는 전국시대 후기로 전쟁의 세기였다. 국제형세는 완전히 바뀌어 각 봉국들이 잇달아 독립왕국을 선포하고 나섰고 이에 따라 봉국의 국군들도 너나할 것 없이 국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종전에 그들을 관할하던 주 왕조의 국왕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적이 진(秦)나라에서 발생했다. 가장 뒤떨어졌고 주목받지 못했던 가장자리의 작은 나라가 법가의 거목 공손앙의 주도하에 변법개혁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각국은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변법을 받아들여 나라의 힘을 키우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외교정책에 목을 매달았고, 일부 국가들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제압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나라와 화해하여 목전의 위기를 피해가자는 나라들도 물론 있었다. 국가간의 외교전이 격렬해져갔다.
전국시대 후기를 개혁의 시대로 몰아넣은 공손앙, 즉 상앙은 개혁의 대명사다. 진정한 개혁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준 인물로 중국사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의 개혁정치는 진보와 보수, 개혁과 수구의 극명한 대립상과 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일대 사건이었다.
상앙이 실천에 옮긴 변법의 의미는 단순한 법령의 개변이나 상층부의 개혁이 아닌, 철저한 개변이자 군사상의 개변이었으며, 정치개혁이자 정부조직과 사회구조·풍속의 개혁이었고, 심지어는 도덕 가치관과 인생관에 대한 일대 개혁이었음을 알게 한다. '변법'은 인류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가장 놀랍고도 심금을 울리는 마술이었다. 그것은 난쟁이를 거인으로 바꾸었고, 몰락해가던 민족을 생기발랄한 민족으로 변화시켰으며, 약소한 국가를 강대한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19년이란 시간을 들인 끝에 진나라는 위나라의 뒤를 이어 초강대국의 하나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 실력은 같이 개혁을 실행한 위나라 등에 비해 백 배는 더 컸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변법이었다. 그리고 상앙은 진정한 개혁의 의미를 가르쳐준 정치모략가였다.- 출처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차이위치우 외 지음 | 김영수 편역, 2005.10.20,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