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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나라의 영웅 무령왕武靈王
저자 : 조면희
출전 : <전국시대 이야기> 상
전국시대 이야기
(一)조나라의 중흥
무령왕은 진晋나라를 쪼개어 삼진三晋으로 만들고 지백의 두개골을 오줌통으로 만들었던 조양자趙襄子 다음으로 6 대째 제후諸侯로 들어앉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 동안 조나라의 셰世系를 따져보면 좀 차이는 있겠으나 우선 조양자는 서자로서 아버지 조간자趙簡子의 대를 이었으나 자신에게 밀려난 맏형의 아들까지 먼저 죽었으므로 맏형의 장손長孫에게 후작의 위를 전하여주었는데 이 사람이 헌후獻侯였다. 그리하여 헌후는 열후烈侯에게, 열후는 경후敬侯에게, 경후는 성후成侯에게, 성후는 숙후肅侯까지 각각 자식에게 전하여 내려 왔던 것이다.
이렇게 내려오는 동안 위문후魏文侯의 득세로 조나라의 요새라고 볼 수 있는 중산中山을 빼앗기고 그 밖에도 진秦나라나 제齊나라 등의 침공으로 국경지방을 계속 삭감당하여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후의 아들인 무령왕이 즉위한 것은 바로 주현왕周顯王43년(BC 326년)이었으나 무령왕 역시 나이 어리므로 세신世臣들의 자문을 받아 겨우 나라를 다스려 감으로써 많은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와중에 무령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니 나라의 정사는 삼로(三老)로 불리는 세 사람의 노신의 보필에 의하여 유지되어 가고 있었다.
무령왕은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키가 8척 8치인데다가 이마는 넓고 얼굴이 검었으며 기운은 사람을 압도할 만하고 사해四海를 제압할 만한 포부를 가졌었다. 즉위한 지 5년 되던 해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부인을 얻어 곧바로 맏아들 장章을 낳아 태자로 세웠다. 그런데 그 후 11년이 지난 무령왕 16년에 그는 어느 날 밤에 어떤 미인이 거문고를 타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 조회가 끝난 뒤에 무령왕은 농담 삼아 자신이 어제 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자 누군가가 대부 호광胡廣의 딸이 거문고를 잘 탄다고 하였다. 그는 바로 호광을 불러 그의 딸을 한번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를 대릉大陵의 누각에 불러 보고 거문고를 타게 하였더니 꿈속에서 본 여자와 흡사하였다. 그는 그 여자를 바로 자기의 후궁으로 삼고 이름을 오와吳蛙라고 불렀다.
오와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부인 한후韓后가 병들어 죽으니 오와를 부인으로 삼고 또 그 동안 맏아들 장이 가지고 있던 태자의 직책을 빼앗아 오와가 난 아들 하何에게 주었다.
한편 그는 그동안 사방으로 빼앗겼던 조나라의 땅을 복구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전쟁에 나가서 말달리고 활쏘기에 편리한 오랑캐 복장인 호복胡服을 입고 그의 군사들도 모두 호복을 입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남쪽으로 상산常山과 서쪽으로 진秦나라와의 경계인 운중雲中과 북쪽으로는 오랑캐 땅인 안문雁門까지 수백 리나 되는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어서 본국으로 돌아온 무령왕은 그 악명 높은 진秦나라를 한번 정복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군신을 모아놓고 이렇게 포고하였다. 나는 지금부터 왕의 작위를 태자인 하何에게 주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국토확장에만 전력을 쓰겠다.
이리하여 후작의 지위를 이어받은 태자하는 혜왕惠王 또는 혜문왕惠文王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고 무령왕은 주부主父라는 직책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상왕上王의 뜻과 같은 것이다.
그는 숙후의 아우이고 자신의 삼촌인 조성趙成을 설득시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하는 데는 호복胡服으로 복장을 입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여 백관들의 반대를 무마하게 하고 세신世臣인 비의肥義로 혜왕을 보좌하게 하고 맏아들 장章은 안양安陽이라는 땅에 봉작을 주어 안양군安陽君으로 봉하였다. 이때가 주난왕周赧王 16년(BC 299년) 일이었다.
다음해 조주부趙主父는 진秦나라의 지형과 진왕의 사람됨을 직접 한 번 보기 위하여 조趙나라 사자使者로 가장하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주부는 나라 사이에 교환하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당시 진왕인 진소양왕秦昭襄王에게 바치자, 진왕이 물었다.
“귀국의 구왕舊王은 건강이 어떠하오?”
“건강이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왜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소?”
“신왕新王께 일찍 전위傳位하여 나라 다스리는 일을 배우도록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전위를 하였으나 큰일은 모두 직접 주장하여 처리하고 있습니다.”
소양왕이 잠시 있다가 이렇게 질문을 하였다.
“귀국에서도 우리 진나라를 두려워하오?”
주부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군寡君은 진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호복胡服을 입고 말 타고 달리는 일을 익히어 지금은 말달리고 활 쏘는 군사가 지난날보다 10 배도 더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맹주盟主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소양왕이 대답하는 사자의 인품에 감탄하여 그를 융숭하게 대접한 뒤에 그를 객관으로 내어 보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자다가 깨어나자 갑자기 낮에 보았던 조나라 사자의 특이한 인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어딘가 풍겨 나오는 비범한 느낌과 아울러 거침없이 구사하는 능숙한 말 솜씨를 볼 때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 같아 아침 조회가 끝난 뒤에 사람을 시켜 조나라 사자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객관에서는 조나라 사자가 어제 밤에 감기가 들어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대로 바로 대궐에 들어가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나라 사자는 그날이 저물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진왕은 사람을 시켜 다시 조나라 사자를 들어오라고 해보고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거든 강제로 데려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심부름하는 관원이 객관에 나갔을 때는 이미 조나라 사신은 없고 어제 대화하던 종자從者만 남아 있었다. 관원은 그 종자를 잡아 진왕 앞에 대령하였다. 진왕이 추궁하였다.
“어제 왔던 조나라 사자는 어디로 갔느냐?”
“어제 밤에 본국으로 떠났습니다.”
“일국에 사자로 와서 갑자기 그렇게 도망갔다니 말이 되느냐?”
“우리 주군께서 대왕과 만나본 뒤에 아무래도 대왕께서 그냥 있으실 것 같지 않다고 하면서 밤에 단신으로 떠났습니다.”
“그래, 너희 사자는 누구이기에 네가 주군이라고 하느냐?”
“과군寡君의 아버지인 주부主父입니다.”
진왕이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장군 백기白起에게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으로 달려가 관문을 막고 조주부의 길을 막은 뒤에 잡아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함곡관에 도착하였을 때는 조주부는 이미 함곡관을 넘어갔고 국경 너머에는 조나라의 병사들이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백기의 군사가 그냥 돌아가자 진소양왕은 조나라의 종자들도 그냥 살려서 돌려보내주었다.
(二)굶어죽은 조주부趙主父.
조주부는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온 이후 그의 명성은 천하에 드날리고, 조나라의 영토는 개국 이래 가장 넓어졌으며 조나라의 위세는 삼진三晋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었다. 조주부가 국토 순례巡禮를 끝내고 수도인 한단邯鄲으로 돌아오자 온 나라 백성들은 만세를 불러 그를 환호하였고 그는 백관의 칭송을 받는 자리에 어린 왕인 아들 하何의 곁에 앉아 단하에 도열해 서 있는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신하들 가운데는 과거에 태자이었지마는 지금은 안양군安陽君이 된 맏아들 장章이 어린 동생인 왕을 향하여 국궁하고 서 있는 것을 보자 마음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조회가 끝난 뒤에 주부가 이번에도 삼촌인 공자성公子成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아저씨! 저 안양군 장이 동생인 하의 앞에서 부복하고 있는 것이 불쌍해 보입니다.”
“이미 과거에 그렇게 질서를 만들어주지 않았소? 지금 와서 후회하여 보아야 뒷날 시끄러운 계제階梯만 만들 뿐이오.”
주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나 큰 아들 장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늘 가지고 있었다.
이 야기가 있은 뒤에 공자성은 조숙후 때부터 세신世臣이고 주부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을 때도 보좌하였던 비의肥義에게 이 야기를 은밀히 하였다. 비의가 말하였다.
“안양군 장은 일찍이 태자의 직위를 빼앗겼으니 마음속에 불평을 가진 것은 당연하겠으나 안양군을 보좌하는 전불례田不禮가 더 걱정이오. 이 자가 안양군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나갔으면 좋겠지마는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안양군의 비위를 맞추어 큰일을 낼 자이오. 내 한 몸만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야인으로 살고 싶지만 삼대를 몸 받혀 섬기던 주군이 위태하다고 물러나면 이 나라는 누가 지키겠소이까?”
그는 한참 있다가 비장한 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아직 싹도 돋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일찍이 제거할 방법도 없으니 앞으로 만일 우리 주군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거든 나에게 먼저 알려주시오.”
공자성이 고개를 꺼덕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조주부는 아들 혜문왕惠文王을 비롯하여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사구沙邱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간 일이 있었다. 이곳은 옛날 상商왕조의 마지막 폭군 주紂가 요부妖婦인 달기妲己와 놀기 위하여 이궁離宮을 짓고 여러 곳에 누대를 만들어 놓은 호화로운 곳이다. 이 때 맏아들 안양군 장도 함께 동행하였는데 이들은 각기 거리가 떨어져 있는 별궁 안에서 유숙하고 있었다.
안양군의 모사謀士 전불례가 안양군에게 말하였다.
“전에 주부께서 주군으로부터 태자의 빼앗은 사실을 후회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기회를 보아 현재의 왕을 제거시키면 주부라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안양군이 사태의 끔찍함을 실감하였으나 전에 아버지가 연민의 정을 간직한 눈빛을 보낸 것을 생각하며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불례는 혜문왕과 주부가 거처하는 사이의 길목에 병사들을 숨기고 사람을 시켜 혜문왕에게 가서 주부가 모셔오라고 한다고 전하였다. 그러자 이 소식을 공자성이 비의에게 전하자 비의는 황급히 혜문왕의 복장을 하고 혜문왕이 타는 수례에 올라탄 채 주부의 별궁으로 갔다. 그가 중도에 이르자 갑자기 복병이 일어나 비의를 찔러죽이니 살아남은 군사들이 도망을 가고 공자성은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전불례 일당과 전투가 벌어졌다. 말할 것도 없이 공자성이 이끄는 왕실의 정규군이 반란군을 섬멸시키자 전불례는 안양군 장을 데리고 조주부가 거처하는 별궁으로 도망갔다. 공자성은 별궁까지 쳐들어가서 조주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양군과 전불례를 잡아 죽인 뒤에 별궁 밖에 나와 군사들로 별궁을 에워싸고 별궁 안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궁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나오도록 하라."
이 소리를 들은 궁안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투어 나왔으나 주부는 나오지 않았다. 공자성은 별궁의 각문을 판때기로 덧대어 못을 쳤다. 물 한 방울도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조주부는 혼자서 갇힌 뒤에 궁안에 저장된 음식물을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다가 나중에는 뜰 앞에 서 있는 나무위에 새의 알까지 꺼내어 먹었지마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게 되었고 궁궐을 둘러쌌던 병사들은 3개월이 지난 뒤에 들어가니 주부는 죽어서 이미 부패해 있었다.
이때가 주난왕周赧王 20년(BC 295년) 5월이었다.
출처 : http://blog.daum.net/whausgml/16902852
조무령왕의 개혁정책
1. 80세이상 노인 매년 잔치 - 여론형성
2. 환과고독(鰥寡孤獨) 대상 복지 정책
3. 호복기사(胡服騎射)
4. 개혁의 당위성을 끊임없이 설득
중국역대인명사전
조무령왕
[ 趙武靈王 ]- 출생 - 사망
미상 ~ BC 295
전국 시대 조나라의 국군(國君). 이름은 옹(雍)이고, 숙후(肅侯)의 아들이다. 19년 호복(胡服)을 입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시행해 유목 부족을 방어했다. 나중에 중산(中山)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격파하는 등 국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군사개혁을 시도했고, 변방을 개척해 나갔다. 27년 둘째 아들 하(何, 趙惠文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주보(主父)라 불렀다. 따로 맏아들 장(章)을 대안양군(代安陽君)에 봉했다. 이에 장이 불만을 품었다. 혜문왕 4년 장이 병사를 일으켜 왕위를 다투다 실패하고 달아나 주보가 사는 사구궁(沙丘宮)에 머물렀는데, 이태(李兌)가 궁설을 석 달 동안 포위했다. 장이 먼저 죽은 뒤 그도 굶어죽고 말았다.
- 출처
중국역대인명사전, 임종욱 편저ㅣ김해명 감수, 2010.1.20, 이회문화사
- 출생 -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