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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 선구
    좋은 글 2015. 10. 12. 15:51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해제)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 선구

    [ , Vorlaufen , Anticipation ]

    죽음에 직면해서 회피하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이다.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가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특징짓는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가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필연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적 현존재는 실존적 변양을 통해 본래적 현존재로서 실존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일상적 현존재의 실존적 변양이 가능한 까닭은, 비본래성이 이미 그 근저에 본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의 근저에는 이미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가 은폐되고 왜곡된 채 도사리고 있다. 다만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즉 그 '으스스 함' 앞에서, 일상적 현존재는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현존재가 죽음의 실현을 배려하면서 추구한다는 것은 아니다. 죽음 이후에 현존재는 이미 현존재가 아니거늘, 죽음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존재'는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를 의미한다. 즉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현존재가, 마음속으로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기투함으로써,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을 비로소 자기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 견디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본래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에로의 '선구'이다. 죽음에로의 선구란,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극단적 존재 가능을 이해할 가능성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일상적 현존재는, 죽음에로의 선구를 통해, 세인-자기로부터 벗어날뿐더러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 존재를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 앞에 직면할 단서를 마련한다. 따라서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에로의 선구가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죽음에로의 선구는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개시하는가?

    1)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가능성이다. 가장 독자적 가능성이기에 현존재는 선구적으로 세인과 절연()할 수 있다.
    2) 가장 독자적 가능성은 몰교섭적이다. 몰교섭적 가능성에로 선구함으로써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를 자신의 편에서 스스로 인수하게 된다.
    3)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가능성은,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선구는,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와는 달리, 뛰어 넘을 수 없는 죽음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열어 놓는다. 이로써 선구는 그 가능성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을 함께 개시함으로써 현존재의 전체성을 실존적으로 선취할 가능성을 확보한다.
    4)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은 확실한 가능성이다. 현존재가 죽음의 확실한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개시하는 방식은 오직, 현존재가 이 가능성을 향해 선구하면서, 이 가능성을 자기의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 자기 자신에게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확실성을 고수하기 위해선 현존재의 한 특정한 태도가 요구될 뿐더러, 현존재의 실존의 완전한 본래성이 요구된다.
    5)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며, 뛰어넘을 수 없고, 확실한 가능성은 확실성의 점에서는 무규정적이다. 무규정적이지만 확실한 죽음에로 선구함에 있어, 현존재는 자기의 '현' 자체에서 발원하는 부단한 위협에 대해 자기를 열어놓는다. 이처럼 현존재 자신에 대한 부단하고 단적인 위협을 개방적으로 지탱 할 수 있는 정상성()이 불안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선구는 현존재를 단적으로 단독화할 뿐더러, 현존재에게 그 자신의 존재 가능의 전체성을 확신시킨다.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는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에로의 선구이다. 죽음에로 선구함으로써 현존재는 세인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죽음을 향해 자유로워진다. 이로써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가능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존재론적-실존론적 가능성에 불과하다.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존재론적 가능성에 상응하는 존재자적 가능성이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입증되어야 한다. 즉 현존재는 본래적인 실존적 가능성의 증거를 자기의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부터 제시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바로 우리가 다음에서 논의할 양심이다.

    [읽기자료]
    현존재는 개시성에 의해, 즉 정상적[] 이해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는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가능성 앞에서 회피할 수도 없고, 이렇게 도피하면서 그 가능성을 은폐할 수도 없으며, 세인의 상식에 맞추어 해석을 바꿀 수도 없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의 실존론적 기투는, 그런 [본래적] 존재의 계기들, 즉 '본래적 존재'를 상술한 가능성에 대해 도피하지 않고 은폐하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죽음의 이해'로서 구성하는 계기들을 밝혀내야 한다.(260, 371)

    우선 중요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를 어떤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 더욱이 현존재 자신의 두드러진 한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로서 특징짓는 일이다. 어떤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 즉 어떤 가능한 것에 이르는 존재란, 그것의 실현의 배려이므로, 그 가능한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261, 371)

    문제가 되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는 분명히 죽음의 실현을 배려하면서 '추구한다'는 성격을 가질 수는 없다. 첫째, 죽음은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가능한 용재자[]나 전재자[]가 아니라 현존재의 한 존재 가능성이다. 둘째, 그러나 이 '가능한 것의 실현'을 배려한다는 것은 '종명[]의 초래'를 의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존재'를 위한 지반을 스스로 제거하는 꼴이 될 것이다.(261, 372)

    반대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 있어서는 그 존재가 앞에서 성격 지은 바 있는 [가장 독자적, 몰교섭적…] 가능성을 바로 그것으로서 이해하면서 개시해야 한다면, 그 가능성은 약화되지 않고 가능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가능성으로서 형성되어야 하고, 가능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끝까지 가능성으로서 견뎌내야 한다.(261, 372-373)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는, 죽음이 이 존재에 있어서 또 이 존재에게 가능성으로서 노정되도록, 그렇게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해야 한다. 가능성에 이르는 그런 존재를 우리는 술어상 가능성 속으로 선구한다고 표현한다.(262, 373)

    죽음에 이르는 존재는, 그의 존재양식이 선구 자체인 그 존재자의 존재 가능에로의 선구[앞지름]이다. 이 존재 가능을 선구적으로 노정할 때,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극단적 가능성의 점에서 자신을 자기에게 개시한다. 그러나 가장 독자적인 존재 가능을 향해서 자기를 기투한다[던진다]는 것은, 그렇게 노정된 존재자의 존재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즉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구란,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극단적인 존재 가능을 이해할 가능성으로서, 다시 말하면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으로서 입증된다.(262-263, 374)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는,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 즉 거기에서 현존재의 존재가 단적으로 문제되는 그 존재 가능을 현존재에게 개시한다.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서 현존재에게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두드러진 가능성에 있어서는 세인과 절연()할 수 있다는 것, 즉 선구적으로 그 때마다 이미 세인과 절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할 수 있음의 이해가 비로소, '세인-자기'가 일상성 속에 현사실적으로 상실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263, 375)

    가장 독자적 가능성은 몰교섭적인 것이다. (…) 죽음은 자기의 현존재에 무차별적으로 속해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현존재가 단독적 현 존재이기를 요구한다. 선구 속에서 이해된 죽음의 몰교섭성은, 현존재를 현존재 자신으로 단독화한다.(263, 375)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가능성은,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가 현존재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실존의 가장 극단적 가능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것이 현존재에게 절박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구는,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처럼 이 '뛰어넘을 수 없음'을 회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향해 자기를 열어 놓는다. (…)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을 향한 선구는, 그 가능성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함께 개시하기 때문에, 그 선구 속에는, 전체적 현존재를 실존적으로 선취()할 가능성, 다시 말하면 전체적 존재 가능으로서 실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264, 376-377)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은 확실한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의 존재를 확신하는 방식은, 그 가능성에 상응하는 진리(개시성)로부터 규정된다. 그러나 현존재가 죽음의 확실한 가능성을 가 능성으로서 개시하는 방식은 오직, 현존재가 이 가능성을 향해 선구하면 서, 이 가능성을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가능 하도록 하는 것이다.(264, 377)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며, 뛰어넘을 수 없고, 확실한 가능성은 확실성의 점에서는 무규정적이다. (…) 무규정적이지만 확실한 죽음에로 선구함에 있어, 현존재는, 자기의 '현' 자체에서 발원()하는 부단한 위협에 대해 자기를 열어놓고 있다. 종말에 이르는 존재는 이 위협 가운데에서 자기를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 위협을 막아낼 수는 없고, 도리어 [죽음의] 확실성의 무규정성을 형성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부단한 위협의 진정한 개시는 실존론적으로는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이해는 정상적[]이다. 기분은, 현존재를 그가 지금 여기 있다는 피투성 앞에 직면시킨다.

    그러나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단독화된 존재로부터 솟아오르는, 현존재 자신에 대한 부단하고 단적인 위협을 개방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정상성[]은 불안이다. 현존재가 불안 가운데 정상적으로 있는 것은, 자기 실존의 가능적 불가능성이라는 무()에 직면해 있을 때이다. 불안은 그렇게 규정된 존재자의 존재 가능 때문에 불안해하고, 또 그렇게 해서 가장 극단적 가능성[죽음]을 개시한다. 선구는 현존재를 단적으로 단독화하고, [현존재] 자신의 이 단독화 속에서, 현존재에게 그 자신의 존재 가능의 전체성을 확신시킨다. 그러므로 자신의 근거로부터 나오는 현존재의 이 자기 이해에는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이 속해 있는 것이다.(265-266, 378-379)

    실존론적으로 기투된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선구는, 현존재에게 [그가] '세인-자기' 속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현존재를 [세인-자기로부터 끌어내어] 배려적 고려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그 자신으로 있을 가능성 앞에 직면시킨다. 그 [현존재] 자신이란, 세인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된 정열적이고, 현사실적이고,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죽음을 향한 자유 가운데 있는 자신이다.(266, 379)

    실존론적으로 기투하면서 선구를 한정함으로써, 실존적이고 본래적인 죽음에 이르는 존재의 존재론적 가능성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이와 함께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가능성이 떠오른다 —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 가능성으로서 일 뿐이다. 물론 선구의 실존론적 기투는 이전에 획득한 현존재의 구조에 의존하고 있어서, 현존재로 하여금 말하자면 그 자신 자기를 이 가능성을 향해 기투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현존재에게 어떤 내용 있는 실존 이상()을 내걸고 외부로부터 들이민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실존론적으로 가능한 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는, 실존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의 무리한 공상적 강요에 불과하다.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존재론적 가능성은, [설사 이론적으로는 제시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상응하는 존재[자]적 존재 가능이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입증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존재는 그 때마다 현사실적으로 그런 '죽음에 이르는 존재' 속에 자기를 내던지고 있는가? 현존재는 또한 선구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본래적 존재 가능을, 오직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의 근거로부터 요구하고 있는가?(266, 379-380)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것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 현존재는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실존의 가능한 본래성에 관한 증거를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부터 제시하고 있는가, 더욱이 그때 현존재는 이 본래성을 실존적으로 가능한 것으로서 표명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할 만큼 그렇게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가?(267, 380)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 선구 [先驅, Vorlaufen, Anticipation]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해제),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93147&cid=41908&categoryId=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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