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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돌선우
[ 冒頓單于(모돈선우) ]- 흉노제국의 건설자(재위 BC 209~BC 174). 동몽골의 동호, 북서몽골의 월지를 격파하고, 북방의 정령, 예니세이강 상류지역의 견곤 등을 정복하여 아시아 사상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웠다. 한과 화친조약을 맺었다.
- 출생-사망
? ~ BC 174
- 국적/왕조
흉노국
- 재위기간
BC 209년~BC 174년
- 활동분야
정치
아버지인 두만(頭曼)을 죽이고 선우의 자리에 올라 동몽골의 동호(東胡), 북서몽골에서 타림 분지(盆地)에 세력을 잡고 있던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江) 상류지역의 견곤(堅昆: 키르기스) 등을 정복하여 아시아 사상 최초의 유목국가(遊牧國家)를 세웠다. 한(漢)나라의 고조(高祖)를 평성(平城: 山西省 大同)에서 포위했으나, 아내의 말에 따라 포위를 풀게 하고 한과 화친조약을 맺었다(BC 198). 두번째로 월지와 싸워 월지의 본거지를 이리강(江) 방면으로 이동시키고 그 지배하에 있었던 오손(烏孫)과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를 복속시켰다(BC 177 또는 BC 176).
BC 2세기, 몽골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흉노족은 전국시대의 중국과 대립하고, 서쪽 대월지
와도 대립중이었다. 그들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 막강한 진나라 군대에 밀려 북쪽으로 패퇴하기도 했지만 진나라가 쇠퇴하자 다시금 영토를 회복한다.
당시 이 흉노족의 1대 선우(왕)는 두만선우로 그에게는 묵돌이라는 태자와 새 부인에게서 난
작은 아들이 있었다. 일찍부터 후계자로 낙점되어 있던 묵돌 대신 작은 아들을 후계자로 세
우고 싶었던 두만 선우는 마침 강성해지고 있던 대월지에 묵돌을 인질로 보낸다. 그는 내심
후계자인 묵돌을 이용해 대월지의 경계심을 풀게한 뒤, 대월지를 기습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기습이 성공하면 대월지를 얻을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분노한 대월지가 묵돌을 죽여줄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왕위를 작은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묵돌은 아버지이자 선우의 명인지라 어쩔 수 없이 대월지에 볼모로 가게된다. 얼마 후 두만
은 계획대로 대월지를 쳐들어가고, 묵돌은 혼란을 틈타 말을 훔쳐 타고 고국으로 도주한다.
두만은 계획이 어긋나자 당황했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적진에서 용감무쌍하게 탈출해 온
묵돌을 장군에 임명한다.
장군이 된 묵돌은 휘하 군사들에게 이렇게 지시한다. "내가 명적을 쏘면 모든 병사는 내가
활을 쏜 그곳에 다같이 활을 쏘아라. 만약 활을 쏘지 않는 병사는 목을 벨 것이다" . 한번은
묵돌이 사냥을 나가 명적을 쏘는 데 따라 활을 쏘지 않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는 가차없이
그들을 죽여버렸다. 얼마 후 다시 자신이 타던 말을 향해 명적을 쏘았다. 처음보다는 많았
지만 여전히 장군의 말을 향해 활을 쏘지못하고 주저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그들을 단칼에 죽여버렸다. 다시 얼마 후 이번에는 자신의 부인을 향해 명적을 날렸다.
놀란 병사들은 활을 쏘지 않았고, 묵돌은 그들 역시 죽여버렸다. 그렇게 부하들의 맹목적
충성심을 높여가던 묵돌이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끼는 말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의 병사들
은 이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왕의 말을 향해 활을 날렸다.
자신에 대한 병사들의 충성심이 극대화되었음을 파악한 묵돌은 아버지 두만 선우와 함께
어느날 사냥에 나섰다. 묵돌이 아버지를 향해 명적을 날리자 주위에 있던 모든 병사들이
다 함께 활을 쏘았고, 그렇게 두만 선우는 고슴도치가 되어 즉사했다.
애초 자신을 대월지에 인질로 보내고 전쟁을 일으킨 두만 선우의 의중을 간파하고 있었
던 묵돌은 아버지를 제거하고 선우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다. 단, 자신과 오랜 시간 동고
동락하지 않았던 병사들이 결정적인 순간 자신을 따를것인지가 의문이었던 묵돌 선우는
그렇게 그들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말,
부인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상대로 단계를 높여가며 병사들의 충성심을 시험한 셈이다.
자신의 부인을 화살받이로 쓰고, 아버지에게 거침없이 활을 쏜 묵돌은 패륜아의 정석을
보여준 셈이다.
어쨋든 이렇게 자신의 아내와 아버지를 살해하고 흉노족의 2대 선우에 오른 묵돌이 힘
을 키워가는 동안 중국 중원에는 한나라가 들어서고 두 나라는 정면 대결로 치닫는다.
기원전 200년 10월, 항우를 물리치고 스스로 황제가 된 한고조 유방은 32만의 대군을
이끌고 흉노족 토벌에 나선다. 자신의 숙적 항우를 물리친 유방에게 흉노는 한줌꺼리도
않되 보였던 셈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묵돌의 계략에 빠진 유방의
군대는 산세가 험한 백등산에 갇혀 포위되고 만다. 식량도 없이 7일 밤낮을 죽을둥 살
둥 버틴 유방은 흉노족의 용맹함에 치를 떨려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난다.
무력으로 묵돌 선우의 흉노족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유방은 황족의 공주를 묵돌
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화친을 맺는다. 유방은 그때부터 흉노
족의 침입에 시달리다 속병을 얻어 5년 후인 서기 195년 숨을 거둔다. 우리가 알고있
던 세기의 영웅 유방은 그렇게 흉노족에게 무참히 깨지고, 삥을 뜯기고 주기적으로
얻어맞다가 속병을 얻어 죽은 것이다.
한때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뻔 했던 묵돌 선우는 그렇게 두번의 전쟁을 통해
거듭났다. 자신의 처와 아버지를 화살받이로 만들고도, 그가 영웅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변변한 문화조차 없는 이민족에 불과했던 흉노족을 역사속에
당당히 자리매김 시켰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을 무렵 북방 유목 민족인 흉노족의 왕 두만은 몽골고원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 연합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아들이 바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조차도 굴복한 영웅 묵돌로서 스스로 선우(선우란 흉노의 군주 칭호로서 ‘가한’ 이전에 사용되었다)라고 칭했다.
묵돌선우는 남만주의 동호, 북방의 정령, 서방의 월지, 예니세이강 상류의 키르기스 등 주변국을 모두 정복하고, 중국의 산시성 북쪽을 침략했다. 한나라 고조가 친히 북진하여 요격했으나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했다. 한나라는 한황실의 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견직물, 쌀, 술 등을 바치기로 하고 흉노와 겨우 화의할 수 있었다.
그 후 한나라는 흉노에 대하여 한번도 공세적 입장을 취하지 못할 정도로 고전했다. 비록 중국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지만, 흉노의 묵돌선우는 아시아 고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묵돌선우가 있었기에 훗날 유목 민족 가운데 몽골족의 징기스칸과 고구려의 광개토왕, 훈족의 아틸라 같은 영웅이 탄생했는지 모른다.
묵돌이 선우 자리에 올랐을 때 동방에서는 동호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묵돌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선우가 되었다고 하자 동호의 왕이 사자를 보내 천리마(하루에 천리를 뛴다고 하는 준마)를 요구해왔다. 묵돌이 측근들과 상의하자, 모두 흉노의 보물인 천리마를 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묵돌은 아낌없이 천리마를 내주었다. “한 마리 말을 아낌으로써 이웃 나라와 우의를 저버릴 수 없다.”
동호는 묵돌선우를 얕보고 이번에는 애첩을 하나 양도하라고 요구해왔다. 묵돌이 측근에게 의논하니 모두 성을 내며 반대했다. “왕비를 요구하다니 무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부디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묵돌은 “계집 하나를 아낌으로써 이웃과 우의를 저버릴 수 없다”라고 하며, 애첩 하나를 동호에 보냈다.
동호는 더욱 교만해지더니 이윽고 흉노 사이에 있는 국경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천여 리에 걸쳐 인가(人家) 하나 없는 불모지가 있었다. 동호왕은 그 땅을 요구해왔다.
묵돌선우가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쓸모없는 땅이니 주어버리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묵돌은 격노했다.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다. 동호에게 줄 수는 없다.”
묵돌선우는 땅을 주어도 좋다고 말하는 자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전군을 소집한 후 스스로 말에 올라 말했다. “나라의 근본을 요구하는 동호를 토벌하러 출전한다. 늦는 자는 베겠다.”
동호는 처음부터 묵돌을 업신여기고 있었으므로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묵돌은 삽시에 동호를 격파하고 왕을 죽였으며, 주민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잇달아 서쪽으로 진격하여 월지국을 패주시켰다. 또한 남쪽으로 오르도스의 누번왕과 백양왕 등의 영지를 병합했으며, 일찍이 중국 진시황 시절 몽염 장군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모두 회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