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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수행법강의/남회근] 제 28강 행원(行願)만이 있을 뿐
    좋은 글 2015. 4. 6. 17:48

    출처 : http://blog.naver.com/white1642/220311423013







    [불교수행법강의/남회근] 제 28강 행원(行願)만이 있을 뿐



    행원이 없으면 견지(見地)가 철저해질 수 없으며,
    진정한 행원이 없으면 수증(修證) 공부는 진보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장 소홀히 하는 것이 바로 행원 방면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이 노력해도 제대로 길에 오르지 못한 듯 느끼는 겁니다.

    이제 견지, 수증, 행원을 하나로 묶어 말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심리적인 현상 하나를 예로 들어 볼까 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왜 불법을 배우고 도를 배우려고 할까요?
    불법을 배워 도를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다른 종교적 신앙도 있고,
    다른 종교적 신앙을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어떤 것을 찾아 의지하려 합니다.
    기본적으로 무의식 속에 모두 구하는 것이 있어,
    장사를 하듯 최소의 대가를 지불하고 최대의 성과를 구하고자 합니다.

    마치 보살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과 같습니다.
    몇 푼 주고 바나나, 전병, 향을 사서 절에 가서 차려놓고 향을 피우며 절을 해댑니다.
    ​그러고는 남편을 잘 되게 하고, 승진하고 돈 벌게 해 달라고 온갖 것을 다 빕니다.
    이렇게 한참을 요구하고 나서는 다시 향을 피우고, 마지막에는 바나나를 다시 싸서 나와 야금야금 먹습니다.

    이런 기도 심리가 얼마나 조잡합니까?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한 번 꿇어앉아 기도하고 나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는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게 무슨 심리일까요? 우리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같은 수행인들은 마음속으로 나에게 절대 이런 심리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볼 때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비록 이런 심리가 없다 해도, 타좌(* 좌선이라고도 함)를 하면서 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바나나를 놓고 비는 것은 아니지만 다리를 꼬고 앉아 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타좌를 하면서 모두 명심견성(明心見性)이나 성불, 성도를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공부요, 경계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가 있고 공부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어떻게든 찾아가 구하려합니다.
    그러나 도나 공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견지가 뚜렷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견지가 뚜렷하지 못할까요?
    엄격히 따져보면 행원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학은 기본적으로 육도윤회와 삼세인과상에 건립된 겁니다.
    그렇지만 제 수십 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불법을 배우고 도를 배우는 사람 중에
    진정으로 육도윤회를 믿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습니다.
    삼세인과를 믿는 사람은 이보다 더 적었고, 그것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미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적어도 이론상으로도 뚜렷이 아는 사람이 없었고,
    실제로 증득한 사람은 더욱 없었습니다.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육도윤회와 삼세인과를 믿지 않으니, 선이나 밀종, 정토종에 대한 배움이 아무리 훌륭해도
    근본적으로 기초가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모래 바닥 위에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심행(心行)은 모두 이런 쪽으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정좌를 배우면서도 앉기만 하면 온통 공(空)만 생각하며,
    그런 뒤 학리(學理)에 대해 공이니, 유(有)니, 반야니 하며 고담준론을 행합니다.
    불법의 이치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이처럼 말마다 옳지만, 마음 씀씀이(心行)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습니다.
    ​왜 공을 얻고자 할까요?
    공의 뒤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령, 진정으로 공을 얻었다면 그건 어떤 것일까요?
    이런 것들은 교리상에서 모두 다 말해지고 있지만 우리가 연구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어떤 사람은 공부도 훌륭하고 기맥도 잘 통하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경팔맥이 통했다거나 삼맥칠륜이 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통하고 나면 뭐합니까? 기맥이 통하면 죽지 않는다구요? 기맥이 통한 사람 중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맥이 통한 사람은 편하게 죽는다고요? 기맥이 통하지 않고서도 편안히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기맥을 통한다는 것이 결국은 무얼 위한 것일까요?
    이런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그냥 다른 사람을 따라 아무 생각도 없이 기맥이 통했다고 하는 겁니다.

    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통하면 뭐합니까? 먼저 알면 뭐합니까?
    자칭 신통하다는 사람이 고혈압이나 당뇨병으로 죽습니다.

    ​자세히 생각해본 적이 과연 있습니까?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모두 고담준론만 행하지 실제적인 면이 부족합니다.

    진정한 수행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길, 즉 행원으로 통합니다.

    무엇이 행원일까요? 바로 자신의 심리적 행위를 바르게 닦아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상(思想)은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아직 표출되지 않은 행위입니다.
    일체의 행동은 사상이 발휘된 것입니다.
    우리가 공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추구하는 것으로,
    사상을 발생시킬 수 있는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행위상에서나 사상상에서 진정으로 공에 이르기는 불가능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의 사상이 완전히 공이 되어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다면, 이런 수도를 왜 해야 할까요?
    공의 이치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앉기만 하면 기를 쓰고 공을 구하려 하지만, 기본적으로 거기엔 큰 착오가 있습니다.
    공성의 이치에 대해 근본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물에는 오고 감도 없으며,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으며, 과거도 미래도 없이,
    그저 눈앞에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不眞空論」을 말합니다. 공이면서 공이 아닙니다.
    이들은 공과 행위를 하나의 이치로 배합시키는 것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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