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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수행법강의/남회근] 情의 자비와 智의 자비
    좋은 글 2015. 4. 6. 17:43

    출처 : http://blog.naver.com/white1642/220311557148



    [불교수행법강의/남회근]


    情의 자비와 智의 자비-"자비란 곧 무아"




    <삼천의 선행, 수천의 공덕>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단지 이론만을 말할 뿐 생명의 근원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일만 겁이 지나도 성인의 경계를 증득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말하든, 하나의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선인이 되고자 한다면 무수한 공덕과 선행을 닦아야 한다는 겁니다.
    ......
    왜 과위를 증득하지 못할까요?
    자기 심리의 결사(結使)를 풀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88결사의 결(結)은 뿌리가 깊고 줄기도 단단합니다.




    < 마음의 결사를 풀어내다>


    결코 자신을 돌이켜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합니다.
    이 심행(心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왜 과위를 증득해야 하는가? 왜 定을 얻을 수 없는가?
    바로 이 심행, 탐진치만의貪瞋痴慢疑는 조금도 전환되지 못하니, 정말로 두려운 일입니다.
    엄중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재삼 강조합니다만, 수도해도 과위를 증득하지 못하고 공을 증득하지 못하는 것은,
    심리 행위 자체가 전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앉아서 의식 경계가 조성한 약간의 공을 가지고 도라 여기는 겁니다.
    ...
    보통 공이라 말하는 이 일념은 시작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의 성취를 유도하기 위한 가장 초보적인 길에 불과합니다.
    그렇긴 해도, 이 심념(心念)은 한 순간 한 찰나에도 많은 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고요해질 때는 육근이 동시에 사용되어,
    온갖 것이 몰려와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게 됩니다.
    바로 육조가 말한, "언제나 되어야 자성이 능히 만법을 생겨나게 할까?"입니다.
    단지 공만을 닦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청정하게 전일할 때에도 가려운 데를 긁을 수 있고, 입으로 씹을 수 있으며, 다리로 동시에 바닥을 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념(念)의 작용입니다.
    "내 심념은 이 때 공이 되었으니, 가려운 데를 긁는 것은 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본능적인 반응도 바로 염(念)으로서,
    이것은 아뢰야식의 염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타좌하고 수도하면서 수많은 마경을 만나지만, 실제로 이 마는 모두 자신의 일생에서 만든 겁니다.
    뿐만 아니라, 마경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은 무의식 속에서 그것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의 마음 씀씀이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역경>64괘 중 다 좋은 괘도 없고, 전부 다 나쁜 괘도 없습니다.
    좋은 것 속에 나쁜 것이 있고, 나쁜 것 속에 좋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 단 하나의 괘만은 여섯 효가 비교적 다 길합니다. 바로 겸괘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우리더러 공을 배우라고 하며, 계율 상에서도 제일 먼저 겸허하라고 합니다.




    <情의 자비와 智의 자비>

    진정으로 겸허함에 도달했을 때에야 비로소 보살의 자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나에게 세 보물이 있으니, 자애와 검소와 천하에 앞장서지 않는 것이다."
    천하에 앞장서지 않는 것은 바로 겸허입니다.
    불가 또한 그렇습니다. 불가의 겸허는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할까요? '無我'에 이르러야 합니다.
    겸허가 극에 이른 것이 무아입니다.



    우리는 단지 타좌만을 통해 공에 이르고자 하지만, 心行 상에서 도달하지 못하면 공이 될 수 없습니다.
    앉아서 공을 지키고 있지만, 그건 '내'가 지키고 있는 공으로 무아의 공이 아닙니다.
    만약 무아가 되었다면 무엇하러 공을 구하겠습니까? 무아라면 이미 공이 되어 있는 겁니다.



    행원으로 말하자면 '行'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見地입니다.
    행이 이르지 못하면 견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한 자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자비란 곧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보통 자비를 '情'에 속하는 것이지 '智'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의 자비는 智로서, 반야의 자비입니다.
    진정으로 무아가 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자비가 됩니다.
    내가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한다고 말한다면, 이미 하승으로 떨어진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인자함은, 특히 모성애는 결코 대가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직 '情'입니다. 이 情은 '자기'사랑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보살의 자비는 '智'로서, '無我'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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