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참고 자료 2013. 4. 4. 14:24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Meister Eckhart ]- 도미니크파의 신학자.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그의 사상에는 토마스의 영향이 두드러졌으며, 가장 큰 특색은 신비적 체험을 설교하는 데 있었다.
- 출생-사망
1260? ~ 1327
- 국적
독일
- 활동분야
종교
- 출생지
독일 튀링겐
도미니크파(派)의 신학자. 튀링겐 지방 호호하임에서 독일 기사(騎士)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년시절에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고, 파리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1302년 수사(修士) 학위를 받았다. 그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존칭이다. 1304년 도미니크파의 작센 관구장(管區長), 1307년 보헤미아의 주교 총대리가 되었다. 그후 한때 파리대학교에서 강의도 했으나, 1313년경 귀국하여 슈트라스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쾰른에 정착,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각광을 받았다.
만년에는 쾰른의 대주교 밑에 있으면서 이단적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선고를 받고, 교황에게 상소하였으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1329년 요하네스 22세가 그의 '26가지 명제(命題)'를 이단 내지 위험한 사상이라고 단죄한 까닭에 그의 저작물 배포의 길이 막혀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사상에는 토마스의 영향이 두드러졌으며, 가장 큰 특색은 신비적 체험을 설교하는 데 있었다.
즉, 영혼의 깊은 곳에서의 '영혼의 불꽃'과 신과의 합일(合一)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합일의 극치를 '영혼에 있어서의 신의 탄생'이라 하였고, 더구나 그 신은 삼위격(三位格:페르소나)의 구별을 초월한 근원적 신성(神性)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모든 피조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벗어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파하였다.
- 출처 : 두산백과
에크하르트
- 출생-사망
1260년경~1327
- 원어
Eckhart, Meister Johannes
- 이명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직업
학자
- 유파 및 분야
- 국적
독일
보통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 불리운다. 도미니크회에 속한 스콜라 학자로서 독일 신비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신은 어떠한 규정도 불가능한 무(無), 즉 신성(神性)이며, 세계의 생성은 이 신이 자기에 대하여 자기를 계시(啓示)하는 인식 과정이고 인간 생활의 목적은 신과의 신비적 합일(엑스타시스)에 있다고 하면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이 인간 속에서 작용하는 소중한 '영혼의 불꽃'에 의해야 한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범신론적 경향을 띠었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는 라틴어 외에 독일어로도 저작을 하여 이후 근대의 독일어로 학술서를 쓰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알려진다.
경력사항
- -도미니크회에 속한 스콜라 학자
- 출처 :철학사전, 임석진 외 편저, 2009, 중원문화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이 너무 엄격하고 노력하는 삶이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맥이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살아갈 능력이 너무나 떨어지고, 그러한 삶으로 자신이 매진하고 있다고 느끼지도 못한다. 그리므로 우리는 이런 점에서 (이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 가끔은 신과 멀어졌다고 느끼기도 하고, 신을 따라 살 수 없을 것 같다고도 느낀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을 경멸하곤 한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이 신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도 자신의 약점 때문에도 그리고 그 밖에의 어떤 것 때문에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대가 큰 잘못을 아주 많이 범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그대는 자신이 신 가까이에 있지 않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그대는 여전히 신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을 멀리 밀쳐놓는 바로 거기에 큰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때로는 신으로부터 멀리 또는 때로는 신 가까이로 왔다 갔다 할지라도, 신은 결코 멀리 나가시지 않는다. 이는 신이 늘 우리 가까이 머무시기 때문이다.
비록 신이 우리 안에 머무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신은 대문 앞 보다 멀리 우리와 떨어져 계시지는 않으신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논고 중에서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 신비주의 최고의 정신
원제 Meister EckhartISBN모든 고통을 위한 참다운 위로는 무엇인가?
중세의 설교자는 말한다, "버리고 떠나있음"으로 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14세기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의 수사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그는 라틴어 설교의 시대에 모국어인 독일어로 설교를 시작하였고
교회의 권력이 난무하는 시기에 인간과 신의 합일이 가능하다고 설교하였다.
당시로는 엄청나게 대담하고 파격적인 설교였다.
많은 중세 독일인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도회에서도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였고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당시 교회는 부패와 권력싸움이 한창이었고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 그리고 전염병으로 유럽인의 절반이 죽어나가고 십자군전쟁으로 수많은 과부들이 생겨나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때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위로를 주었던 위대한 설교사의 말은 "버리고 떠나 있음"이다.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신께 맡기면 인간은 누구나 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고 자신의 내면에서 신성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의 사상은 현대 서양 철학에서 헤겔과 에리히 프롬으로 연결되고 동양사상으로는 선불교 사상과 통한다.
그의 설교는 이 시대의 고통스러운 삶에도 참다운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독일 신비주의 최고의 정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329년 3월27일 84세의 교황 요하네스 22세는 이단심문재판에서 단죄칙서인 "주님의 밭에서'에 서명한다
"이 시대 독일 출신의 성서 박사이며 교수인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한 사람이
필요이상으로 많이 알고자 했기에
신앙이 신중함과 기준을 벗어났음을 우리는 고통스럽게 공지한다."
'
그 후로 600년 이상 묻혀있다가 독일관념론의 시대이며 낭만주의 시대인 19c 초반에 프란츠 본 바아더와 피이테, 헤겔, 로렌크란츠, 괴뢰스,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의해서 부활되고 재발견되었다. 20세기에 와서는 동양의 선불교사상과의 만남으로 재조명 받게 되었고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에도 그는 여전히 학문의 스승, 삶의 스승이다.
시대적 배경
독일 중세의 신비주의는 전성기 중세에서 후기 중세로의 이행의 전통 가운데 후기의 열매이다. 그 시대는 균열과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막강한 권력을 둘러싼 전투는 상대를 분쇄하기 위한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소위 바빌로니아 유배로 비유되는 교황의 아비뇽 감금(1309-1377)에 이어 교황권의 약화되자 막강했던 위계적 교회 구조는 치욕과 균열 그리고 당파적이고 이단적인 운동의 위협 아래 노출되게 된다. 이런 운동은 점점 강화되어 종교 개혁 이후로 머리와 지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와 함께 이 시대는 셀 수 없이 많은 자연 재해로 뒤흔들리고 붕괴되기도 하던 시대였다. 토지의 황폐화, 지진, 홍수의 범람, 유령처럼 떠돈 흑사병 등이 그러했다. 특히 흑사병은 유럽 전 지역에 만연하여 그 당시 최초로 예술로 형상화된 사자(死者)의 춤이라는 모티브로 모든 지상적인 것의 몰락과 붕괴를 끔찍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실로 그 시대는 '중세의 가을'이었다. 그 시대에 몸과 영혼이 고문당한 인간성이 죽음과 전율의 고통을 겪어내고 치러야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그 정점에 올랐던 전성기 스콜라 학문 체계의 휘황찬란한 전개나 외경을 자아내는 스콜라 학문 체계의 구축 등은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런 부조화는 시대를 갈라놓았고, 아마도 다시 한 번 눈앞에 닥쳐올 시대의 종말 앞에서 고통 속에 사는 인간을 불안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이 시대의 신비주의는 초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적인 것의 내재에 대해 말했다. 신비적 일치 경험 가운데서 각자의 고유한 가슴에 신이 내재한다고 말했다.
특히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통해 많은 기사들이 죽게 되자 13세기 중엽 후반에 고위 귀족이나 하급 귀족 가문에서 과부가 되거나 고아가 된 수많은 여성들이 우후죽순처럼 도미니코 여자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상류 계층의 이 여성들은 강한 지식욕을 갖고 있었다. 특히 종교적 신학적 가르침에 목말라 있었다. 게다가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환시를 보기도 하는 예리한 민감성을 갖고 있었고, 가끔은 자신을 벗어나 위로 상승하려는 정서적 열정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에 대한 열망은 거의 충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도미니코 수도원 총장 민덴의 헤르만(Herman von Minden)과 교황 클레멘스 4세가 1267년에 특히 신비주의적이면서도 전적으로 사변적인 설교 방식을 개발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수녀들을 돌보는 일을 도미니코 수도원의 교수와 강사들에게 위임했다.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설교자이면서도 동시에 독일 신비주의를 가장 유창하게 알려주고 있는 사람, 독일 신비주의에 있어 가장 탁월한 정신으로 '삶의 스승, 학문의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이다.
최고의 설교가
에크하르트는 수도원에서 저녁을 먹고 식탁에서 젊은 수사들과 『영적 강화』를 나누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쿠르트 루가의 말에 따르면 『영적 강화』에 있어서는 귀중한 은총이 특징적이다. 지옥, 마귀, 형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고통은 신을 수반한다. 죄는 인간을 반드시 파괴하지는 않는다. 선한 것의 힘이 악한 것의 힘만큼 강하다. 신은 항상 가까이 계신다." 이러한 내용들은 13세기 후반의 널리 제도화되고 법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적 세계에 있어서 놀라운 주장이었다. 에크하르트는 인간에게서 불안을 제거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에 속하는 본질적인 인간으로 전환시켰다.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원장직을 시작으로 유럽 곳곳의 수도원장과 관구장을 맡게 되면서 수사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을 도맡게 되고 동시에 에크하르트는 튀링겐 관구의 대리로서 외부에 있는 수사들을 방문하고 교육하는 일이 많아졌다. 수많은 도미니코 수도원과 수녀원이 마이스터가 설교하고 사목하던 주요 지역이었다. 이는 스콜라적인, 곧 대학 강단의 신학이 이제는 실천적 영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변환의 과정은 언어 사용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강단 신학에는 전혀 입문도 하지 않았지만, 신비 체험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수사들과 수녀들에게 성서 말씀은 즉각적이고도 가장 내적인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해야만 하였다. 에크하르트가 관장하는 지역의 수많은 수녀원에서의 신비주의적 삶이 의심할 바 없이 독일 신비주의의 전개 발전에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한다. 고향 관구 삭소니아에는 단지 9개의 여자 수도원이 있었던 반면에, 남부 독일에는 65개의 여자 수도원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설교의 대부분이 행해졌는데 이들 가운데서 유명한 것으로 『고귀한 인간에 관하여』, 『신적 위로의 책』이다.
때로는 열광적으로 존경받고, 많은 동료들에게 주목받았던 마이스터의 에크하르트의 압도적이고 매혹적인 슈트라스부르크 시대의 독일어 설교들은 대부분 신비적 정신과 삶의 배양지이며 중심지였던 라인 강 상류의 수많은 여자 수도원에서 행해진 것이 확실하다. 그는 또한 신학적 교양이 전혀 없는 민중들을 향하여 민족 언어인 독일어로 설교를 했기 때문에 혐의를 자초하게 된다. 그의 정신적 비상이 대중들이 도달하기에는 너무 높았다고 할지라도 전대미문의 그의 말들이 상당히 자극적이고 흡착된 방식으로 청중들의 영혼에 스며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신이 진리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일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신을 버리고 (오히려) 진리를 고수하고자 할 것이다."라고. 이 진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서 그의 내면으로부터 바깥으로 울러 펴진다. "만약 여기에 아무도 없다고 한다면, 나는 이 기부함에 설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독일어 설교들 가운데서 마이스터가 영감 받은 청중에게 내뱉었던 말들은 결코 단순한 스콜라적 탁상공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이하임과 동시에 무한히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대담하고 위험스러웠던 그의 설교
에크하르트는 당시의 라틴어 복음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는 심지어 당시로서는 의심할 수 없는 해석, 곧 복음서의 의미를 대담하게 뛰어 넘는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에 대한 해석이 한 예이다. 성서 속의 예수는 마르타보다는 마리아를 옹호하지만 에크하르트는 마르타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그는 역사적인 자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우선시한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신에 대한 몰입과 명상'의 태도도 중요하지만 내재적 수용에 따른 실천적 행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따라서 명상적인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가 신비주의적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탈아적(ekstatischen, 脫我的)인 "행복감, 종교적 고양의 달콤함"에 틀어박힌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성숙하고 확고한 덕과 걱정 없는 마음 가운데 모든 것에 방해받지 않고" 세상 한 가운데서 활동하는 인간이 신비주의적 인간의 전형인 것이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의미에서 신비주의자의 길은 오직 명상적 길(via meditativa), 곧 안으로 향하는 길만으로 뻗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길의 절대적 귀결인 활동적 길(via activa), 곧 바깥 일로 향하는 길로 뻗어 나가야 한다. 마치 그것이 가치 없는 창조인 양 여겨서는 안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청중들에게 활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충동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이 점이 에크하르트가 학문의 스승이면서 동시에 삶의 스승으로 불리어지는 이유이다.
영혼 가운데 신의 탄생 -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
에크하르트의 위대성은 고유한 그의 사상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사상은 '영혼 가운데 말씀의 탄생'에 대한 사상이다. 영혼의 불꽃 가운데 아버지 신에 의한 아들의 탄생이 에크하르트 설교의 유일한 동기이며 내용이며 목적을 이룬다.
영혼의 불꽃은 자아 추구(Selbstsucht)와 피조물에 천 겹이나 되는 실타래로 싸여 있고 나로부터 떠오르는 겹겹의 층들 아래 감추어져 있고 파묻혀 있다. 그러나 만약 신비주의적 노력에 의해, 자신과 세계를 "놓아버리는 것"(lassen)에 성공한다면, "버리고 떠나 있음"의 상태라고 나타내고 있는 것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때 최고의 이성, 신적 불꽃은 인간을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속박에서 풀려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자유와 내적인 확고함은 결코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고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이는 완전히 놓아두고 있음을 위한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한 대가이다.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서 나는 좋은 뜻을 갖고자 하고, 좋은 사람이고자 한다. 그러나 그 나머지에 있어서는 나의 휴식을 취하련다라고 말하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사람은 평화를 향해 뛰어야 한다. 사람은 평화 가운데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곧, 내적인 휴식과 균형은 완전한 자기 통제에 이르기까지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예컨대 글쓰기의 기술 또는 바이올린 연주의 기술 등과 같은 기술을 완전히 익히는 것과 같다. 마침내 스스로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적절하게 예술가에 의해 통제되는 완벽한 기술은 오직 힘들고 성실한 연습의 열매일 수밖에 없다.
버리고 떠나 있음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그냥 놓아두고 있음, 벗어나 있음 등은 인간의 윤리적 과제이다. "죽으면 이루어지리라"고 에크하르트의 정언명법은 이렇게 요구한다. 모든 한갓된 가상을 벗어 던져라. 핵심을 자유롭게 하여 열매 맺도록 하기 위해 껍데기를 깨뜨려 버려라. 버리고 떠나 있음은 또한 그 자체로도 대단히 고귀하다. 왜냐하면 버리고 떠나 있음은 인간을 신과의 가장 위대한 동일성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설교할 때 나는 언제나 첫째로 버리고 떠나 있음, 곧 인간은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로부터 떠나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둘째로 인간은 또 다시 단순한 선성, 곧 신 가운데로 되돌아가 그와 하나의 형상이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하고자 했다. 셋째로 인간은 신이 그 영혼 속에 불어넣어 준 위대한 고귀성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자주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사람이 놀라운 방식으로 신에 도달할 수 있음을 자주 말하고자 했다. 넷째로 신적 본성의 순수함에 대해 자주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신적 본성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러한 광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주 말하고자 했다."
에크하르트의 버리고 떠나 있음의 고귀성과 유익성에 대한 이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귀결을 갖는다.
에크하르트 사상의 영향
에크하르트의 사상과 설교집은 단죄칙서를 받은 후로 600년이상 묻혀있다가 독일관념론의 시대이며 낭만주의 시대인 19c 초반에 프란츠 본 바아더와 피이테, 헤겔, 로렌크란츠, 괴뢰스, 그리고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의해서 부활되고 재발견되었다
19세기에는 독일 국수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민족종교의 창시자"로 왜곡되기도 하면서 현대에 이르렀다. C.G 융의 심층심리학과 마르크스주의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20세기의 사상가인 칼 야스퍼스는 에크하르트를 대상적인 것이 존재의 드러남을 위해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는 명상가로, 하이데거는 말해지지 않은 사물들의 언어가운데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철학가로 받아들인다.
가장 최근에 영어와 독일어 문화권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에크하르트를 수용한 사람은 에리히 프롬이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는 에크하르트의 "본질적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높이 평가한다. 프롬은 에크하르트를 자아 구속과 에고 중심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킴으로서 "소유양식"을 벗어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목표로 해석한다.
"소유를 향한 경향성은 돈에 대한 탐욕. 명예. 권력 등이 삶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었던 서양 산업사회의 인간을 특징짓는다. 에크하르트는 소유와 존재 사이의 구별을 힘차게 그리고 분명하게 기술했다.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다시 도달될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을 분석해 냈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지식에서 비어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잊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지식을 확실성과 동일성의 감정을 부여하는 소유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채워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식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지식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도그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소유양식에 속하는 것이다. 존재 양식에 있어서 지식은 박진감있는 사유과정 그 자체이다.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해 결코 멈추려 하지 않는 사유이다."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동양사상과의 만남
20세기에 들어서 동양의 선불교와 독일의 신비주의와의 유사성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활발해졌다. 선불교의 영성이 "순수 무無" "공空"이라는 개념에서 서로 일치한다.
독일인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는 독일의 신비주의와 선불교의 명상과의 유사성에 대해 알렸고 에크하르트의 편집자인 에른스트 벤츠는 선불교의 초월경험과 에크하르트의 초월적 경험이 일치한다고 하였다. 일본의 선불교에서도 독일 신비주의의 종교적 체험이 불교의 종교적 체험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독일의 신비주의와 불교 사이에는 어떤 교류나 대화가 없었음에도 "자기 자신을 떠나 벗어나 있음"이라는 큰 공감대가 있다.
- 출생-사망
'참고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생 sattva (0) 2013.04.08 샹카라 (0) 2013.04.05 우파니샤드 (0) 2013.04.04 양호 -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사람 (0) 2013.04.03 간단한 뇌졸중 확인법 STR (0) 2013.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