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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호 -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사람
    참고 자료 2013. 4. 3. 10:12

    양호

    문무를 겸비하고, 가깝고 먼일을 두루 도모하다

    [ 羊祜 ]

    양호(221∼278년)는 자가 숙자(叔子)이고 태산 남성(지금의 산동성 비현 서남) 사람이다. 위·진 두 왕조를 거치면서 중서시랑·급사중·황문랑·비서감·중령군·위장군·거기장군 등과 같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죽은 뒤에는 진(晉) 무제(武帝)에 의해 시중·태부로 추증되었다.

    양호는 문무를 겸비하고 생각이 아주 깊었던 인물이었다. 조조의 위나라 말년 사마씨와 조씨 두 집안이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차분하게 시기와 상황변화를 기다리면서 투쟁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런 다음 성공적으로 자신을 지키고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했다.

    형주에 주둔하는 동안에 안팎을 안정시키고 덕으로 적을 제압하는 한편 땅을 넓혔다. 대외적으로는 가까운 세력이든 먼 세력이든 모두 품고 다독거려 "천하의 인심을 크게 얻었다." 그는 변방에 있으면서도 큰 모략을 가슴에 품고 진 무제가 오(吳)를 멸망시키는 데 완전한 책략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장수를 추천했다. 이 때문에 그 당시는 물론 후대에도 서진이 중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양호를 꼽기에 이르렀다.

    빛을 감추고 시세의 변화를 기다리다

    양호는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조들은 9대에 걸쳐 태수와 같은 1급 관직을 역임했고, 양호 자신도 매우 똑똑하고 박학다식했다. 집안 배경과 개인적 소질로 보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군에서는 상계리(上計吏)라는 벼슬에 추천했고, 주에서는 종사(從事)·수재(秀才)로 추천했다. 그러나 양호는 모두 사양했다. 양호가 벼슬길을 서두르지 않은 까닭은 관리가 될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정이 있었다.

    당시는 조조(曹操)에서 시작된 조위(曹魏) 정권의 말년으로 사마(司馬) 부자와 조위 황실 사이에 권력투쟁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양호는 이 두 세력과 모두 인척관계에 있었다. 친누나가 사마의(司馬懿)의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시집갔고, 아내는 황실 귀족 하후패(夏侯覇)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양호는 권력의 행방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자칫 싸움에 말려들었다가는 앞날이 깜깜해지는 것은 물론 심하면 목숨까지 부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란 존재를 감추기로 결정했다. 차분히 사태를 지켜보면서 참을성 있게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벼슬길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얼마 뒤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 대장군 조상(曹爽)은 양호와 왕침(王沈)을 자신의 막료로 불러들였다. 왕침은 그 부름에 두말 않고 응했지만 양호는 거절했다. 왕침이 자신과 함께 동참하길 권했지만 양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249년,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조상을 죽였고 왕침도 이에 연루되었다. 왕침은 "경이 전에 한 말을 알아들었어야 했는데!"라며 부끄러워했다. 양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담담하게 "처음부터 어떻게 그걸 예상했겠소"라고 말했다.

    양호 본문 이미지 1

    양호는 삼국시대를 종결짓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한 모략가였다. 그는 명문가의 기득권층 출신이었지만 문무를 겸비하고 시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사마의가 조상을 죽인 뒤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조씨 세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가평 3년인 251년 4월과 정원 2년인 255년 정월 태위 왕준(王浚)과 진동장군 관구검(毌丘儉)이 회남(淮南)에서 군대를 일으켜 사마씨 정권에 대항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양호는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도회(韜晦) 모략을 고수한 채 한 발짝 떨어져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대장군 사마소(司馬昭)가 그를 불러 막료로 삼고자 했으나 양호는 모친상과 형님의 죽음을 이유로 완곡하게 사양하면서 근신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양호는 중서시랑이라는 벼슬을 받아 출사했고 바로 급사중·황문랑으로 승진하여 조모(曹髦)의 측근이 되었다. 하지만 조모에 대해서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또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자세를 취하여 운신의 폭을 충분히 남겨두었다.

    258년 사마소가 정동대장군 제갈정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조위의 지방세력을 숙청하자 양호는 조위 정권과 거리를 두는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중앙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외직을 원했고 그 결과 비서감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총애를 얻고 있던 종회(鐘會)가 양호를 경계하는 바람에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264년 종회가 피살되고, 사마소는 양호를 불러들여 상국종사중랑이라는 중책을 주어 순욱(荀勖)·배수(裴秀)와 함께 재상부의 기밀을 책임지게 했다. 양호는 이 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직책에 충실했다. 부지런하게 한마음으로 사마씨에게 자신의 몸을 완전히 맡기기에 이르렀다.

    얼마 뒤 양호는 군권과 조정 안팎의 일을 장악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265년 사마염이 조위 정권을 무너뜨리고 황제에 오르면서 양호는 공신 대열에 오름과 동시에 서진 정권의 핵심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양호는 '교만하면 손해를 부르고 겸손하면 이익이 돌아온다'는 이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최고 지위에 오른 뒤로도 여전히 공손하고 근신하는 자세를 지켰다. 자신보다 직위가 낮은 동료 대신들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위치를 내세우지 않았다. 최고 자리에 올라 조정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그는 너무 지나친 총애를 받았다며 극구 사양했다. 형주에 파견되어 지역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는 일을 마치면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 뼈를 묻고 싶다는 뜻을 사촌 동생에게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보잘것없는 선비로서 무거운 자리에 올랐으니 어찌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냐며 강한 책임감을 나타냈다.

    덕으로 적을 제압하여 형주를 경략하다

    태시 5년인 269년 2월, 진 무제 사마염은 양호를 도독형주제군사로 삼아 특별히 위장군 본영을 거느리고 양양에 주둔케 했다. 당시 오(吳)는 형주 지구 북쪽 기슭에다 세 곳의 중요한 군사거점을 마련했다. 서쪽은 서릉(西陵, 지금의 호북성 의창시), 중앙부는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 강릉시), 동쪽은 석성(石城, 지금의 호북성 종상현)이었다. 그 중에서 석성은 지세가 험준한데다 양양과 가장 가까워 진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양호는 부임하자마자 기발한 계책으로 오나라가 석성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유도했다. 오군이 철수하자 양호는 곧장 군대를 보내 석성에 주둔하게 하는 한편 근처에다 다섯 개의 새로운 성을 쌓았다. 이렇게 해서 "기름진 땅을 거두어 오의 자원을 빼앗음으로써 석성 서쪽이 모두 진의 소유가 되었다." 그 결과 형주 지구의 군사력이 크게 개선되었다.

    양호가 양양에 주둔한 지 2년째, 오는 육항(陸抗)을 형주도독으로 파견하여 양호에 대항케 했다. 육항은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당시 오에서는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다. 태시 8년인 272년 9월, 오의 서릉을 책임지고 있던 보천(步闡)이 진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고를 받은 육항은 급히 서릉으로 출격했고, 진 무제도 양호에게 군대를 진격시켜 보천을 구원하도록 했다. 마침내 두 군대가 실력을 겨룰 기회가 왔다. 그 결과 육항은 서릉을 공략하여 보천의 목을 베었다. 양호는 별다른 성과 없이 양양으로 물러났다. 양호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양양으로 물러난 양호는 적의 정세를 면밀하게 분석한 다음, 자신의 군대 내부를 안정시키고 덕으로 적을 제압한다는 수비 위주의 전략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안정과 발전을 통해 양양의 역량을 증강시키기 위해 양호는 두 가지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미신을 타파하고 지역민들을 교화하는 것이었다. 지역민들에게 계몽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양호는 학교를 열었으며 동시에 사회 분위기를 정화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일부 지역에서는 관리가 부임지에서 죽으면 후임 관리가 그곳을 꺼려하여 관부를 다시 짓는 일이 있었다. 양호는 백성의 재물과 노동력을 낭비하는 이런 미신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는 "생사는 명에 달려 있는 것이지 머물던 곳과는 상관없다"면서 이런 나쁜 관행을 금지시켰다.

    둘째는 농지를 개간하여 군대의 자금에 충당한 일이었다. 형주 지구에서 양호가 통솔하는 부대는 모두 8만이 넘었다. 양호는 이 중 반은 변방 수비에 충당하고 나머지 반은 농지를 개척하는 데 투입했다. 그 결과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양호가 처음 양양에 왔을 때 군대에는 백 일 버틸 양식도 없었는데, 십 년 뒤 형주 8만 군사는 십 년을 먹고도 남을 식량을 쌓아놓고 있었다고 한다. 양호는 이밖에도 대량의 군사 장비를 고치고 비축했다.

    양호는 여러 방법으로 내부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덕으로 적을 제압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 중 주요한 것들이다.

    첫 번째, 덕과 믿음으로 오의 백성들을 회유했다. 양호는 여러 사람들과 사냥을 갈 때면 늘 경계를 넘지 않도록 주의했고, 진나라 병사가 사냥감을 얻었더라도 그것이 오나라 쪽에서 쏜 것이라면 모두 되돌려주었다. 병사들이 어쩔 수 없이 오나라의 곡식을 베어 식량으로 삼았다면 돌아와 반드시 계산해서 되돌려주었다. 이렇게 하자 오나라 사람들도 점점 그에게 탄복했고, 그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양공'이란 존칭으로 불렀다.

    두 번째, 덕과 믿음으로 오나라 장수와 병사들을 와해시켰다. 전투가 벌어지면 양호는 반드시 약속한 날짜에 군대를 출병시켰으며, 기습하지 않았다. 장교들 가운데 기습을 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양호는 좋은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나라 군대의 장수나 병사를 포로로 잡으면 즉시 그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오나라 장수 진상(陳尙)·반경(潘景)이 진의 변경을 침략하자 양호는 그들을 추격하여 목을 벤 다음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렇게 감정에 호소하는 양호의 행동에 오나라 군사들의 항복이 끊이질 않았다.

    세 번째, 덕과 믿음으로 오나라 군대의 장수들을 통제했다. 실제 전투지휘에서 양호는 육항에 비해 자신이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호는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피한다는 '양장피단(揚長避短)'의 전략을 구사하여 상대를 압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런 기본 원칙하에서 양호는 육항에 대해 교묘한 정치공세를 취했다.

    육항이 병이 나서 사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양호는 즉시 좋은 약재를 육항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이 약은 좋은 약이오. 내가 먹으려고 지었는데 때를 놓쳤소.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병이 났다고 하니 마침 잘 되었소"라는 편지를 딸려 보냈다. 육항도 아량이 넓은 위인이라 의심 없이 약을 먹으려 했다. 부하들이 말리자 육항은 "양호가 어찌 그런 사람이겠는가"라며 듣지 않았다. 전에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 양호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술을 마셨다. 육항은 "양호의 덕은 악의나 제갈량도 못 따를 것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부하 장수들에게 "저 쪽이 덕으로 나오는데, 내 쪽이 폭력으로 맞선다면 이는 싸우지 않고 굴복하는 것이다. 각자 경계선을 지키면서 자질구레한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오의 주군 손호(孫皓)가 이런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육항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육항은 이렇게 대답했다.

    "읍이나 향도 신의가 없는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국가야 오죽하겠습니까! 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양호의 덕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양호를 다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양호가 덕으로 적을 제압하는 모략으로 확실하게 육항을 견제함으로써 육항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형세도

    삼국시대 형세도

    큰 모략을 가슴에 품고 오나라 정벌을 이끌다

    양호는 오랫동안 변방에서만 근무했지만 그의 가슴은 대국을 관찰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동오를 자르고 전국을 통일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했다. 양양에 주둔하는 동안 그는 덕과 믿음의 정치를 펼치는 한편 군량과 군대 장비를 비축하면서 형주 경략에 온힘을 쏟았다. 이는 동오를 멸망시키기 위한 정신적·물질적 조건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양호는 몰래 동오를 멸망시킬 책략을 수립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74년 육항이 병으로 죽었다. 동오의 정치는 갈수록 부패해졌다. 양호는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276년 10월 진 무제에게 글을 올려 동오 정벌을 제안했다. 물론 정벌에 따른 훌륭한 대책도 함께 제기했다.

    양호는 먼저 동오 정벌의 필요성을 거론했다. 그는 운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만 일의 성사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단숨에 멸망시키지 못하면 인민들이 안정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현실에 안주하여 상대가 도발하지 않는데 정벌할 필요가 있냐며 동오 정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그러한 논리는 제후들이 각 지역을 나누어 차지하던 할거시대에나 통하는 것이지 천하통일을 목전에 둔 지금의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 논리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또 촉나라를 예로 들면서 오나라가 장강이라는 요충지에 의존하고 있지만 겁낼 것 없다고 지적했다. 즉 험준한 요충지에 의존해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쌍방의 세력이 막상막하일 때는 가능하지만, 우열이 확실하게 차이가 나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가 있어도 대책을 낼 수 없고 따라서 요충지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촉나라의 지형도 오나라 못지않게 험준했지만, 한번 공격에 곧장 수도인 성도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시체가 들을 덮어 만 리에 이를 정도의 대승을 거두지 않았던가.

    지금 오나라와 촉나라를 비교해보면, 오나라에는 장강과 회수가 있지만 촉나라의 검각과 다를 바 없고, 산천의 험준함도 두 나라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실권자 손호의 포악한 정치는 무능한 유선을 능가하고 있으며, 오나라 백성의 곤경은 촉나라의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아울러 현재 진나라의 군대는 이전보다 수적인 면에서도 늘었고 자원과 군비도 지난날에 비해 훨씬 더 막강하다. 지금 오나라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만약에 시기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군사와 백성들만 수고롭게 하여 적에게 틈을 준다면 이는 분명 실책이다. 따라서 지금 결단을 내려 통일이란 대업을 실현해야 한다. 이상이 양호의 상황 분석이었다.

    이어 양호는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양주와 익주의 부대를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시켜 수륙 양면에서 진격하여 적의 빈틈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형초의 부대로 강릉을 공격하고, 평남과 예주의 부대로는 곧장 하구로 쳐들어 갈 것을 제안했다. 서주·양주·청주·연주 등의 군대를 연합하여 말릉으로 공격하자고 했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공격을 가해 오나라 군대가 도처에서 적을 맞아 싸우게 하면 기세가 흩어져 수동적인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마지막으로 양호는 오나라에 승리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동호가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안과 밖이 잘 구분되지 않는 나라라는 점에 주목하여, 동서 수천 리에 이르는 길목을 모두 방어하지 않으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동오의 실권자 손호는 자만심이 강해 유능한 신하들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러니 장수들과 대신들의 마음은 늘 의심의 그림자로 가득 차 있고, 병사들은 원망하는 볼멘 소리가 높다. 그러니 평상시에도 머뭇거리며 잘 움직이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전쟁이 터지면 결코 한마음이 되어 죽을힘을 다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 오나라 군대의 작전은 속전속결에 길들여져 있어 지구전을 펼 수 없다. 활을 비롯한 무기도 진나라에 비해 떨어진다. 오로지 수군과 수전에서만 우리보다 나을 뿐이다. 만약 대군이 일제히 밀고 들어가 곧장 중심부를 찌른다면 오나라 군대는 틀림없이 강을 버리고 성지로 후퇴하여 수비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적의 장점을 없앤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진나라 군대는 죽기를 각오하고 있고, 오나라는 안팎으로 흔들릴 것이 뻔하다. 따라서 시기를 넘기지 말고 공격하면 반드시 꺾을 수 있다.

    이처럼 양호는 동오를 멸망시킬 치밀한 방책을 세웠을 뿐 아니라 두 차례에 걸쳐 진 무제에게 이 중대한 일을 맡을 장수를 추천했다. 첫 번째로 추천한 장수는 왕준(王濬)이었다. 왕준은 일찍이 양호 밑에서 참군(參軍)을 지낸 바 있기 때문에 그의 재능과 담략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272년 진 무제는 익주자사로 있던 왕준을 대사농으로 승진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양호는 진 무제에게 은밀히 글을 올려 왕준을 익주자사에 그대로 유임시켜 동오를 멸망시킬 준비를 하라고 충고했다. 양호의 예견은 들어맞았다. 익주의 부대는 훗날 동오를 멸망시키는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양호는 두 번째로 두예(杜預)를 추천했다. 278년 양호는 병으로 자리에 누웠고, 그는 죽음을 앞두고 두예를 자기 대신 양양에 주둔시킬 것을 무제에게 청했다. 두예 역시 양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동오를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탁월한 공을 세웠다.

    진 무제 사마염은 양호의 모략을 크게 칭찬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다 279년에서야 비로소 양호가 제기한 모략에 따라 동오를 멸망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이듬해인 280년 3월, 동오를 멸망시켰다는 승전보가 수도 낙양에 전해졌다. 모두가 기쁨에 들떠 무제에게 축하의 말을 올리자 무제는 술잔을 들고는 "이 모두가 태부 양호의 공이로다!"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양호는 동오가 멸망하기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인물소개 양호

    양호는 명문가 출신이다. 여동생 양유휘는 당대 최고 실력자인 서진 사마사의 아내 경헌 양황후였고, 외할아버지는 당대의 명사이자 대학자였던 채옹이었다. 또 외할아버지의 여동생은 동한 말기를 빛낸 여류 시인 채염(채문희)이었다. 이렇듯 남다른 가문에서 자랐음에도 양호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고 자신의 녹봉을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등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그는 당시 정세를 면밀하게 분석한 끝에 오나라를 정벌하고 중국을 통일하는 원대한 방략을 제시했다. 양호의 정치적 삶과 모략은 삼국시대를 종결짓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곳으로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아울러 통일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데도 역점을 두었다. 중병을 얻어 귀향하면서도 자신의 후임으로 두예라는 탁월한 인물을 추천하여 자신의 계획이 중단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의 국가 방략은 반대파에 의해 좌절되었고, 그는 자신의 계획이 실천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2년 뒤, 진은 오나라를 평정했다. 진 무제는 "이 모두가 양 태부(양호)의 공이다"라며 그의 공로를 잊지 않았다. 그가 10년 넘게 벼슬살이를 했던 양양의 백성들은 현산에다 사당과 비석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는데, 길을 지나다가 비석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아 두예는 이 비석을 눈물 흘리게 하는 비석이란 뜻으로 '타루비(墮淚碑)'라 불렀다.

    출처 :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차이위치우 외 지음 | 김영수 편역, 2005.10.20,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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