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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승
    참고 자료 2013. 3. 13. 14:05

    진승

    물고기 뱃속에 예언서를 숨기고, 죽창을 높이 치켜들다

    [ 陳勝 ]

    진승의 자는 섭(涉)이고, 양성(陽城,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 사람이다. 태어난 해는 분명치 않으며 죽은 해는 기원전 209년이다. 그는 오광(吳廣)과 함께 중국 최초의 농민 대봉기의 서막을 열었다. 그는 걸출한 농민 봉기군의 수령이자 원대한 포부와 총명한 기지를 갖춘 정치모략가이기도 했다.

    큰 기러기의 뜻

    『사기』 기록에 따르면 진승은 농민 출신으로 집안이 매우 곤궁하여 어릴 때는 남의 땅을 경작하며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그는 큰 뜻을 품고 있어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대단했다. 농사를 짓고 남는 시간에는 늘 인간 세상을 한탄했는데, 어떤 때는 침울해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한번은 일을 하고 쉬는 틈에 밭두둑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날 내가 떨치고 일어나 부귀한 사람이 되더라도 가난한 형제들을 잊지 않을 것이야!"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함께 일하던 고용 농부들이 이 말은 듣고는 "남의 집 땅이나 붙여 먹는 주제에 무슨 부귀란 말인가. 허풍 떨지 말라!"며 비웃었다.

    진승은 이들의 비웃음에 아주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허! 참새들이 어찌 큰 기러기의 뜻을 알리오"라며 혀를 찼다. 뜻이 있는 자는 언젠가는 큰 일을 이룬다. 머지않아 진섭은 실제로 그때의 호언장담이 정신나간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기회를 살핀 다음 꾀하다

    진승은 진나라 말기라는 황폐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았다. 진 왕조는 대외정벌을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고, 거기에 진 2세 호해의 사치스러운 궁정생활과 썩을 대로 썩은 정치가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통치자들은 위기에 처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명목을 붙여 세금과 노동력을 착취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견딜 수 없었다. 분노와 반항은 불만 당기면 활활 타오를 잔뜩 쌓인 마른 장작과 같았다. 진승은 이런 환경에서 자신이 불을 당길 사람이 되겠노라 결심했다. 그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 2세 원년인 기원전 209년 7월, 진승은 정복 전쟁에 차출되어 9백 명의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변방을 지키기 위해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 서남)으로 가고 있었다. 관리의 압송하에 이들 일행이 대택향(大澤鄕, 지금의 안휘성 숙현 서남)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큰비가 내려 길이 끊기는 바람에 기일에 맞추어 지정된 장소로 갈 수 없는 돌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진의 가혹한 법률에 따르면, 변방으로 징발된 모든 사람들은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장소로 모이지 않으면 모두 목을 베게 되어 있었다.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진승은 살기 위한 방법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담하게 진에 반기를 드는 봉기를 택했다.

    그는 동료인 오광에게 "지금 우리 처지는 달아나지 않아도 죽고, 도망가도 죽을 수밖에 없다. 크게 일을 일으켜 죽을 수도 있다. 이래저래 죽기는 마찬가지, 국가를 위해 죽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더 가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진승은 배우지는 못해 더 이상의 논리를 내놓지는 못했지만 인생의 가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보다는 국가와 고통받는 대중을 위해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인생은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고, 설사 죽는다 해도 값어치 있는 것이다.

    명분을 내세워 대중을 설득하다

    진승이 거사를 결심한 데는 심각한 사회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진승으로 보자면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라 나름대로 충분한 사상적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큰 기러기의 뜻'을 품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정치적 정황 그리고 백성들의 질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거사를 호소하는 모략사상의 깊이도 대단했다.

    그는 거사가 성공하려면 군중의 폭넓은 반응과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가지고 호소할 것인가? 현재 자신의 처지에 의존해서는 불가능했다. 당초 진승이 "훗날 부귀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까분다고 비웃지 않았던가. 이제 진짜 큰 사업을 벌이려 하는데 또다시 설득력 없는 방법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실패는 뻔했다. 진승은 걸출한 모략을 지닌 농민봉기의 수령이라는 명성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오광과 봉기를 모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책을 제시한 바 있다.

    지금 천하 백성들은 진 왕조의 가혹한 세금과 노역 그리고 형벌의 고통 때문에 벌써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진 2세 호해는 궁전을 크게 짓느라 힘든 백성의 피와 땀을 쥐어짜고 있다. 듣자하니 호해는 진시황의 작은아들로 황제 자리를 이을 자격이 없는 인물이라 한다. 당연히 황태자 부소가 뒤를 이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부소가 늘 진시황에게 어진 정치를 하라고 바른 소리를 하다가 황제의 미움을 사서 변방으로 보내 군대 일을 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는데도 진 2세에게 살해되었다.

    백성들은 부소가 아주 현명한 태자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벌써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또 한 사람 항연(項燕, 초 패왕 항우의 할아버지)은 원래 초나라의 명장으로 전투를 잘 해 많은 공을 세웠으며 앞장서서 병사들을 아꼈기 때문에 초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했다. 지금 어떤 사람은 그가 죽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나라로 도망갔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태자 부소와 항연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천하의 백성들에게 호소한다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호응할 것이다.

    그의 판단은 당시 인심과 부합하는 것이었고, 오광도 동의하여 바로 거사하기로 했다.

    진승1

    역사에 생기를 불어넣은 인물인 진승의 봉기는 참으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사마천이 농민출신인 그를 제후들의 기록인 세가에 편입시킨 까닭도 그에 의해 한 시대가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지도는 진승 봉기군의 진로와 진공 노선도이다.

    귀신을 빌리다

    옛날 사람들은 귀신을 믿었다. 그 당시는 과학문화가 아직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귀신을 통해 각종 자연·사회현상을 해석하는 일이 성행했다. 진승도 귀신을 믿고 있었고 또 귀신의 힘을 빌려 자신의 대업을 성취할 줄 알았다.

    진승과 오광은 거사를 계획한 뒤 다시 점치는 사람을 찾아 점을 쳤다. 이 점쟁이는 아주 총명하여 진승과 오광의 뜻을 알고는 "당신의 사업은 성공할 수 있고, 백성을 위해 큰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령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진승과 오광은 매우 기뻤다. 진승은 바로 '귀신 주문'이란 계책을 생각해내고는 한마디로 "이는 우리에게 귀신을 이용해 군중에게 선전함으로써 위신과 명망을 얻으라는 말이다"라고 간파했다. 진승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는 주사를 이용하여 천에다 '진승왕(陳勝王)'이란 세 글자를 크게 써서는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이 '단서(丹書)'를 물고기 뱃속에다 넣었다가 다시 그물에 걸려 잡히도록 했다.

    식사를 책임진 병사가 물고기를 사와서 요리를 하려고 배를 가르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 병사는 진승이 미리 손 쓴 것인지 모르고 처음부터 뱃속에 이런 글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여간 신기해마지 않았다. 병사는 그 단서를 들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이 '기이한 사건'을 선전했다.

    이와 동시에 진승은 또 오광을 시켜 밤중에 군영 부근의 황폐한 사당에 숨어 있다가 아무도 없는 야밤을 틈타 도깨비불을 피우고 여우의 울음소리를 가장하여 큰소리로 "위대한 초나라가 부흥하고, 진승이 왕이 된다!"고 외치게 했다. 비몽사몽간에 병사들은 이 고함 소리에 잠을 깼고, 두려움과 놀라움에 휩싸였다. 이튿날 아침, 잠을 깬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귓속말로 수군거리며 놀라고 신기한 눈빛으로 진승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물고기 뱃속에다 글을 숨긴' 내력이다.

    거사를 성공시킬 계책

    긴장된 거사 모의를 거쳐 준비작업은 기본적으로 모습을 갖추었다. 이제 남은 최대의 장애는 그들을 압송해가는 진의 관리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진승은 모략이 깊고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오광이 인간관계가 좋아 진의 병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오광과 친해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병사들은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오광의 말을 잘 들었다. 진승은 마침내 오광에게 진의 병사들을 상대하도록 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이랬다. 오광이 여러 사람 사이에서 위신이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일부러 진의 관리들을 자극하여 그 화가 오광에게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해서 진의 관리에 대한 군중의 불만을 자극하고 이를 구실로 진의 관리들을 죽인 다음 진에 반기를 들자고 호소하자는 것이었다.

    오광은 계획대로 행동에 들어갔다. 진의 관리들이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하게 되자 오광은 일부러 몇 번씩이나 도망치겠다고 큰소리를 쳐서 진의 관리들을 성나게 만들었다.

    참다 못한 관리들이 오광에게 욕을 하며 모욕을 주자 군중들은 이들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진의 관리들은 더 성이 나서 오광에게 채찍질을 했고, 한 군관이 검을 빼들고 오광을 죽이려 했다. 이에 오광은 군관의 검을 빼앗아 단숨에 군관 몇을 찔러 죽였다.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던 진승도 군관 둘을 죽이고 모두를 향해 "여러분, 우리는 큰비를 만나 제 날짜에 변방으로 갈 수 없게 되었고 가봤자 목이 잘릴 것이 뻔하오. 만에 하나 목이 잘리지 않더라도 변방에 있으면 열에 여섯 일곱은 죽어갈 것이 뻔하오. 우리는 건장한 사내들이오.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어도 명성을 남기고 죽어야 하지 않겠소?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는 하늘에서 내려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에 군중들도 어깨를 들썩이며 큰소리로 "우리는 당신의 명령을 따를 것이오!"라고 외치며 호응했다.

    그리하여 진승은 오광의 계책에 따라 먼저 공자 부소와 항연을 치켜세우며 인민의 바람을 실현시키기 위해 봉기할 것을 표명했다. 진승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의지를 나타냈고, 스스로를 대초(大楚)라 했다. 이어 단을 만들어 맹서하고 진 관리의 목을 귀신과 하늘에 바치는 제사를 올렸다. 진승은 자신을 장군에 오광을 도위에 임명하여 봉기군을 이끌었다.

    진승이 봉기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다시 실패하기까지 겨우 반년이란 시간이었지만 그가 이끈 사업은 세상을 바꾸고 시대를 전환시키는 거대한 영향을 남겼다.

    인물소개 진승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2천2백 년 전, 한 고용 농민의 인간해방 선언이었다. 이 인간해방 선언은 그로부터 약 1천5백 년 뒤 이웃나라 고려의 노비 만적에 의해 그대로 인용되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중국사 최초의 농민 봉기군 우두머리 진승은 역사에 생기를 불어넣은 인물이었다.

    모략가로서 진승은 탁월한 이미지 메이커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 군중의 심리를 휘어잡는 선동적 웅변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9백 명을 이끌고 통일 제국 진나라에 항거하며 죽창을 높이 치든 이후 왕이 되고 실패하기까지는 불과 반년이었다. 하지만 이 반년은 중국사 전체를 통털어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고자 했고, 시대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 짧은 시간, 거대한 행보가 남긴 영향은 현재 진행형이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자신의 원대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에게 진승이 던진 일갈이었다.

    출처 :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차이위치우 외 지음 | 김영수 편역, 2005.10.20, 들녘        


    중국역대인명사전

    진승

    [ 陳勝 ]
    • 출생 - 사망

      미상 ~ BC 208

    진(秦)나라 말기 양성(陽城) 사람. 자는 섭(涉)이다. 원래 신분이 비천하여 남에게 고용되어 농사에 종사했다. 진시황제가 죽은 뒤 진이세(秦二世) 원년(기원전 209) 7월 어양(漁陽)으로 수(戍)자리를 갔을 때 둔장(屯長)이 되었다. 기현(蘄縣) 대택향(大澤鄕)에 왔을 때 폭우를 만나 정해진 기한까지 도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해져 참수형을 다하게 되자 동료 오광(吳廣)과 함께 수졸(戍卒) 9백 명을 유인해 반란을 일으켜 지휘자를 살해하고, 스스로 장군이 되었다.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리던 여러 군현들이 모두 호응했다. 진(陳) 땅에 주둔하면서 왕을 칭하고 장초(張楚)라 불렀다.

    얼마 뒤 군대를 보내 조위(趙魏)의 땅을 차지하고, 주문(周文)에게 주력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秦)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병사는 점점 늘어나 수십만에 이르렀다. 나중에 주문이 패하고 진나라의 장군 장한(章邯)이 진(陳)을 포위하자 성보(城父)로 퇴각했다가 어자(御者) 장가(莊賈)에게 살해당했다. 왕으로 6개월 있었다.

    출처 :중국역대인명사전, 임종욱 편저ㅣ김해명 감수, 2010.1.20, 이회문화사
                                    

    진승이 농민군 반란을 일으키자 전국에서 연쇄반응이 나타났다. 이후 6국의 재출현 하지만 항우와 유방은 과거로의 회귀가 시대정신이 아님을 알고 통일왕조의 건설을 목표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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