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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2013. 2. 13. 15:35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오기

    용병에는 방법이, 치국에는 대책이 필요하다

    [ 吳起 ]

    오기는 전국시대 초기 위(衛)나라 사람으로 대략 기원전 440년에 태어나 기원전 38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노(魯)·위(魏)·초(楚)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공을 세우고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오기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 사회가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급변하던 격변기였다. 당시 제·초·연·한·조·위·진 등 제후국들은 너나할 것 없이 변법(變法) 혁신에 나서 부국강병을 외치며 천하를 서로 다투었다. 약육강식과 합병전쟁이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오기는 이런 시대에 살았고 또 이 시기에 꽃을 피웠다. 영웅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곳이 있는 법이다.

    참고 이미지

    파란만장한 개혁가, 국경을 초월한 구조조정의 전문가, 무패의 전략·전술가로 평가받는 오기의 삶은 비참한 최후에도 불구하고 빛난다.

    의리를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는다

    오기는 위나라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고, 문무를 함께 익혔다. 특히 칼과 창을 연습하고 병학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큰일을 이루어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가산을 아끼지 않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스승을 구하고 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의리와 믿음을 중시했다. 그는 굳센 의지로 진지하게 일을 처리했으며,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절대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친구와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약속했는데,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오기는 식탁 옆에서 밤새 친구를 기다렸고, 이튿날 친구가 오자 함께 식사를 하면서 아주 만족해했다.

    오기는 명예와 의리를 중시했으며 벼슬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의 나라 위(衛)는 너무 작고 약한데다 군주까지 무능하여 위(魏)·제·조 3국의 하수인 노릇밖에 못하고 있어 오기의 비범한 재능과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어려웠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나라 안의 못난 쥐새끼 같은 부류들이 오기를 할 일 없이 놀기만 하는 건달이라며 비웃는 현실이 더 큰 문제였다. 강직한 성격에다 기회를 만나지 못해 속을 끓이던 오기는 이런 치욕을 감당하지 못했다. 격분한 오기는 벼락같이 화를 내며 단숨에 자신을 비웃은 자들을 무려 30여 명이나 베어 죽였다. 그러고는 연로한 노모를 남겨둔 채 위나라를 떠나 이웃 노나라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떠나기에 앞서 오기는 자신의 팔을 깨물어 노모에게 상경이나 재상 같은 대관이 되어 큰일을 이루지 못하면 절대 돌아오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노에서 벼슬하고, 제에 대항하다

    노나라는 서주 초기 주공 단의 봉지이자 공자의 고향으로 나라는 작았지만 유명 인사가 많고 예를 숭상하는 고장으로 이름나 있었다. 말하자면 중국 문화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자부심 강한 나라였다. 노나라에 도착한 오기는 곧장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많은 노력과 진지한 자세로 유가 경전과 저술을 깊게 연구했다. 여기에 타고난 재능까지 보태져 그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선생과 학우들에게 많은 인정을 받았다. 제나라의 어떤 대부는 오기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오기가 세월도 잊고 열심히 공부하던 중 불행히도 노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유가의 윤리에 따르면 오기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 삼년상을 지내야만 했다. 하지만 오기는 조국을 떠나올 때 어머니 앞에서 팔을 깨물며 맹세했던 일을 떠올리며 귀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이 증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증자는 오기가 유가의 가르침을 어긴 불효막심한 자라며 자신의 문하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기는 뭐라 말도 못하고 증자의 문하를 떠나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병서를 읽고 병법을 연구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3년 뒤, 오기의 재능이 노나라의 상국 공의휴(公儀休)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그의 추천을 받아 오기는 노나라 대부가 되었다.

    기원전 401년, 패자를 꿈꾸던 제나라는 힘만 믿고 약한 노나라를 공격해왔다. 노나라를 아예 합병하겠다는 기세였다. 이 위기상황에서 노나라 목공은 오기를 대장군으로 기용하여 제나라에 대항하고자 했다. 목공의 이러한 의도는 상국 공의휴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대부 전거(田居)의 딸인지라 오기가 중요한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면 어쩌나 의심이 들어 목공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오기는 자기 손으로 아내를 죽여 노나라에 대한 충정을 표시했다. 그제서야 목공은 의심을 풀고 바로 오기를 장군에 임명하여 제나라 군대를 맞이해 싸우도록 했다.

    장군의 도장을 허리춤에 찬 오기는 제와 노 두 나라의 형세와 역량을 면밀히 비교하고 분석했다. 제나라가 강하고 노나라가 약한 상황을 앞에 두고 오기는 기세가 사나운 제나라 군대와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우회전술과 허허실실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나라 군대를 마비시키기 위해 오기는 먼저 나약하고 겁먹은 듯한 모습을 띤 사신을 제나라 병영으로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병력은 급히 부서를 조정하는 등 비상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오기의 용병술은 신기했다. 적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늙고 약한 병사들을 중군에 배치하고, 정예병을 양쪽에 숨겨놓는 전술을 택했다. 그러고는 제나라 군대가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해 방비를 허술하게 한 틈을 타서 양쪽에서 벼락같이 기습을 가했다. 뜻밖의 공격에 우왕좌왕하며 대응하던 제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노나라는 대승을 거두고 제나라의 침공을 물리쳤다.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오기의 군사적 재능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런데도 목공은 오기를 중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나라의 이간책에 흔들리고 오기가 아내마저 죽인 것은 그의 인품이 열등하다는 것을 드러낸 행동이라는 신하들의 말을 믿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기가 자신의 조국 위나라를 버리고 노나라로 도망쳐오는 바람에 두 나라의 화목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모함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목공은 오기를 승진시키기는커녕 그의 병권마저 회수해버렸다. 이런 불공평한 대우를 오기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노나라에도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위를 도와 서하에 공을 남기다

    위(魏)나라는 전국 초기 7웅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위나라가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국군 문후(文侯)가 인재를 대우하고 사람을 적절하게 기용하여 밝은 정치를 펼치며 개혁을 주장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문후는 이괴·서문표 등을 기용하여 7웅 중 가장 먼저 혁신정치를 펼쳤다. 이로써 위나라의 정치·경제·군사력은 신속하게 발전했고, 위나라는 이내 중원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오기는 진작부터 문후의 부국강병 정책을 존중하고 있던 터라 자신의 다음 정착지로 위나라를 선택했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다. 문후는 오기의 탁월한 군사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오기가 오자마자 대장군에 임명했다. 파격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기원전 409년, 문후는 오기에게 진(秦)나라를 공격하는 책임자로 발탁하여 황하 서쪽 지구를 빼앗으라고 명령했다.

    문무를 겸비한 오기는 귀신같은 용병술과 지휘력을 발휘하여 다섯 개 성을 단숨에 빼앗았다. 그리고 2년 사이에 서하(지금의 섬서성 동북부) 지구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이어 오기는 한·조와 연합하여 동쪽의 제나라 정벌에 나서 곧장 영구(지금의 산동성 등현 동쪽)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오기는 서하 지역의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서하수(西河守)에 임명되었다. 아울러 진·한 두 나라와 함께 작전을 수립하는 중책까지 맡았다. 문무를 겸비한 오기답게 그는 서하를 20년 넘게 굳게 지키며 서하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려 진·한 두 나라가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오기는 위나라에 전후 27년을 머물렀고, 동시에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성취를 이룬 시간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제후국들과 76차례나 전투를 치렀고, 그 중 무려 64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나머지 12차례는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에게 붙여진 '상승장군(常勝將軍)'이란 별명에 걸맞게 그는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그가 위나라에 있는 동안 위나라는 사방으로 천 리 가까운 땅을 개척했고, 이는 오기의 공에 힘입은 바 컸다.

    죽을 때까지 초나라의 혁신을 돕다

    오기는 위나라에서 세운 빛나는 업적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시기와 질투가 적지 않았다. 오기 역시 계급사회 특유의 폐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위 문후가 죽은 뒤 무후(武侯)가 뒤를 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오기를 신임하여 서하를 지키는 중임을 계속 맡겼다. 그리고 무후는 자신의 사위 공숙(公叔)을 상국에 임명했다. 그런데 공숙이 오기를 몹시 시기하고 미워했다. 그래서 늘 무후 앞에서 오기를 헐뜯었다. 오기가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기에 대한 신뢰도가 문후에 비해 현격하게 낮았던 무후는 사위의 말만 믿고 오기의 직책을 거두어들였다.

    오기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무후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지금처럼 자신을 믿어주면 틀림없이 진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헐뜯는 말만 믿고 자신의 충정을 의심한 나머지 파면하면 서하의 넓은 땅은 머지않아 진나라에게 빼앗기고 위나라는 약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한 번 떠난 마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은 법, 무후는 오기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기는 또 한번 발걸음을 타지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패했고, 20년이 채 되지 않아 서하 지구 전부를 빼앗겼다.

    오기는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도왕(悼王)은 오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던 터라 오기가 오자마자 영윤(상국)에 임명하여 국정을 관장하게 했다. 당시 초나라는 덩치는 컸지만 치국방략이 모자랐다. 겉으로는 막강해 보였지만 정치는 부패하고 경제는 난관에 부딪쳐 있었다. 따라서 군사력도 매우 약했다.

    오기가 초나라로 올 무렵 그의 나이는 벌써 환갑을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왕성한 노익장을 과시하며 의욕적으로 일을 처리해나갔다. 상국에 임명되자마자 그는 썩어빠진 낡은 귀족세력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변법 혁신을 추진했다. 목표는 역시 부국강병이었다.

    그는 도왕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법령을 투명하게 하고 필요 없는 관직은 폐지하는 한편 부패하고 무능한 귀족들을 내쳤다. 이를 바탕으로 전투력을 갖춘 군대를 양성했다. 다시 말해 그는 세습귀족의 특권을 취소하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전투력이 강한 병사 양성을 적극 추진한 것이다. 그는 군대를 엄격하게 정돈하는 동시에 이런저런 유세가들의 헛소리를 일체 배제한 채 실용적인 정책을 밀고 나갔다.

    오기가 취한 일련의 개혁조치는 급속도로 초나라를 강화시켰고, 초나라의 국력은 궤도에 올랐다. 이제 초나라는 진정한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오기는 대외전쟁에 나섰다. 남으로 백월(당시 중국 남방의 여러 소수민족에 대한 총칭)을 평정했고, 북으로 진(陳)·채(蔡) 두 나라(지금의 안휘·하남성 경계 지역)를 멸망시키는 한편, 위·조·한 3국의 침입을 물리쳤다. 또 서북으로는 진(秦)의 군대마저 물리치는 등 연전연승하면서 천하에 위세를 한껏 떨쳤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우여곡절을 겪게 마련이다. 오기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기구하게 분투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최후는 더욱 비장했다.

    기원전 381년, 오기가 초나라에 온 지 2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오기를 지지했던 현명한 군주 도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도왕의 죽음은 낡은 귀족세력들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즉각 정변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한 채 오기를 잡기 위해 나섰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도 오기는 자신의 개혁을 지지했던 도왕을 잊지 않았다. 그는 도왕의 시신이 안치된 영당으로 달려가 도왕의 시체 위에 엎어졌다. 그 순간, 수많은 화살이 오기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그때 그의 나이 63세, 일대 개혁가이자 기재는 이렇게 비운의 삶을 마쳤다.

    병법은 영원하고, 명예는 청사에 길이 남다

    오기의 일생은 일과 함께 한 빛나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한테 더욱 큰 평가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긴 『오자병법』 때문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오자병법』은 오기가 위나라에서 서하 지역을 지키는 동안 자신의 실제 작전경험 등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이라 한다. 당시는 모두 48편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사연으로 대부분 잃고 지금은 6편만 남아 있다. 『오자병법』은 이렇게 조각조각 나 있지만, 오기의 일생과 그의 군사전략 사상 그리고 지휘술 등을 결합해보면 대단히 정교하고 독특한 그만의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연구하고 본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래는 『오자병법』의 주요한 사상이다.

    첫째, 군사력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스려' 승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병사를 뽑아 훈련시켜 전투력이 강한 정예부대로 기른다는 뜻이다. 오기는 위 문후에게 이와 관련한 군사모략 사상을 밝힌 바 있다. 그는 경전을 인용해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옛날 제나라 환공은 5만 용사를 모집하여 제후국 사이에서 패자로 군림했고, 진나라 문공은 4만 정예부대를 집중하여 중원 패자의 꿈을 이루었다. 또 진나라 목공은 3만 병사를 골라 용사들을 적의 진지로 맹렬하게 돌진시켜 사방 열강을 정복했다.

    오기는 이론을 실천과 접목시켰다. 위나라에서 그는 폭넓은 조사와 깊은 분석, 연구를 통해 뛰어난 정예병을 선발하는 한편, 병사들의 특징과 장점에 근거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그는 "한 사람이 전투와 관련된 일을 배워 열 사람을 가르치고, 열 사람이 전투와 관련된 일을 배우면 백 사람을 가르치고……만 명이 전투와 관련된 일을 배우면 3군을 가르친다(『오자』 '치병')"고 말한다.

    위나라 군대는 오기의 세밀하고 엄격한 훈련을 받은 결과 평상시에도 군기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전시에는 용맹하게 전투에 나서는 무적의 정예부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기 자신도 일찍이 5만 군대를 거느리고 50만의 진나라 군을 물리친 적이 있었다. 이는 그의 군사이론을 충분히 입증한 좋은 사례다.

    둘째, 군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상벌을 분명히 했다. 오기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엄격하게 집행할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오기는 또 약속은 틀림없이 지켰다. 그는 병사들이 성과를 올리기만 하면 아무리 그 수가 많아도 반드시 상을 내렸다.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군기를 어기면 아무리 큰 공을 세우더라도 엄격하게 처벌했다.

    한번은 오기가 군을 이끌고 진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였을 때의 일이다. 한 병사가 혼자서 멋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군의 머리 둘을 베고 돌아왔다. 결과로 보자면 당연히 상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오기는 상은커녕 그 병사를 즉결처분했다. 군법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오기가 세운 엄격한 기율 아래 위나라 병사들은 군법을 준수하면서 일단 전투에 나서면 모두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정예병으로 성장했다.

    셋째, 병사를 아끼고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병사들이 기꺼이 전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군사와 관련하여 오기는 병사의 정치교육과 내부단결을 몹시 중시했다. 그는 엄격한 관리를 강조하면서, 명령과 상벌을 확실하게 집행함과 동시에 병사들이 수치심을 알게 했으며, 바른 예의로 사병을 자극할 것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이렇게 해야만 병사들이 기꺼이 전투에 참여하여 죽음도 마다 않고 싸우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여사(勵士)').

    내부 단결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오기는 장수들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장수는 늘 병사들 생활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기가 병사들을 얼마나 아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사기』에 생동감 넘치게 전해온다.

    오기가 장군이 되자 가장 신분이 낮은 사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식사를 함께 했다. 잠을 잘 때는 자리를 깔고 자지 않았으며, 행군할 때는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 먹을 식량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등 사졸들과 수고로움을 함께 나누었다.

    언젠가 병사 중 하나가 독한 종기가 났는데 오기가 그 종창을 입으로 빨아주었다. 그 병사의 어머니가 이 일을 듣고는 통곡을 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아들은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는데 장군이 직접 종창을 빨아주었거늘 어째서 통곡을 하는 거요?"라고 묻자, 그 어머니는 "그게 아니라우. 예전에 오공(오기)께서 그 아이 아버지의 종창도 빨아준 적이 있는데, 그이는 물러설 줄 모르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지요. 오공이 지금 내 자식의 종창을 또 빨아주었으니 이제 그 애가 언제 죽을지 모르게 되었소이다. 그러니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라고 말했다(「손자오기열전」 중에서).

    이 일화는 병사들에 대한 오기의 사랑이 한 순간이 아니라 일관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때문에 그는 병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깊은 사랑을 받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넷째, 전기(轉機)를 장악하여 적을 굴복시키고 승리를 거둔다. 작전지휘라는 측면에서 오기는 '지피지기'와 적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작전을 수립할 것을 강조했다. 오기는 지휘관에게 적의 약점들을 세밀히 관찰한 다음 전기를 움켜쥐고 과감하게 공격하고 출격할 것을 주문했다. 적이 다르면 전략전술도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기동성을 갖추고 기민하게 전략전술을 변경하여 대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속일 수 있으면 속이고, 뇌물이 통하면 뇌물을 먹여라. 첩자를 쓸 수 있으면 첩자를 보내고, 위협이 통하면 위협하라. 끊어서 공격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유인할 수 있다면 유인해라.

    오기는 또 지휘관에게 '사기(四機)'를 파악하라고 요구한다. '사기'란 이렇다. 첫째는 '기기(氣機)'다. 병사의 사기(士氣)를 적절하게 파악하여 관건이 되는 시점에 좋은 강철을 칼날에 사용하듯 적을 압도하는 기백을 갖추게 하라는 말이다. 둘째는 '지기(地機)'다. 이는 지형을 정확하게 이용하여 적을 불리한 상황으로 몰라는 뜻이다. 셋째는 '사기(事機)'다. 이는 간첩·양동(陽動)·위장 등 각종 방법으로 적을 현혹하고 파괴하여 적을 피동적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다. 넷째는 '도기(刀機)'다. 무기·기술·장비·전술 등을 충분히 활용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결합하고 이로써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한다는 뜻이다.

    오기는 또 작전에서 과감하게 기지를 발휘할 것을 강조한다. 머뭇거리지 말라는 뜻이다.

    용병에서 가장 큰 피해는 머뭇거리는 데서 비롯된다. 삼군의 재앙이 의심에서 나온다('여사').

    이는 오기의 작전 지휘술이 손자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이론이자 실천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만만치 않다

    다섯째, 안으로는 문(文)을 밖으로는 무(武)를 닦고 준비하라. 군사와 정치의 관계에 관해 오기는 심오한 인식과 독특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가 군사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이 같은 인식은 당시로서는 군사이론의 최고 정점에 오른 것으로, 지금 보아도 대단히 정확하고 올바른 판단이다. 오기는 일찍이 위 문후에게 현명한 군주는 반드시 안으로는 문치(文治)를, 밖으로는 무비(武備)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이 둘을 결합해야만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여러 차례 경전을 인용해가면서 문후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국가의 안위와 성쇠는 정치의 좋고 나쁨과 관련이 있지 산과 강의 험준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민심과 군주의 덕치에 달려 있지 자연적 험준함과 같은 방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문후는 어떻게 하면 군대를 안정시켜 적이 부술 수 없게 단단히 지키며, 적을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느냐고 묻자 오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덕 있는 사람을 위에, 모자라는 사람은 아래에 두면 군대의 진영은 자연스럽게 안정됩니다. 백성을 즐겁게 자기 일에 종사하게 하고 각급 관리와 화목하게 잘 지내게 되면 군대의 수비는 단단해 격파할 수 없게 됩니다. 백성이 자신의 군주를 한결같이 칭송하는 반면 적국의 군주를 혐오하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오기는 정치에서의 구체적 운용을 전략전술에 놓고 작전에서 필요한 '사화(四和)'라는 중요한 원칙을 제기했다.

    불화(不和)하는 나라는 출병할 수 없고, 군대와 불화하면 진영을 짤 수 없고, 진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공격할 수 없고, 전투에서 불화하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도국(圖國)').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 이렇듯 변증적 요소가 풍부한 사상을 갖춘 오기의 군사이론과 전략전술은 정말 보기 힘든 귀중한 것이다.

    오기의 군사 지휘술·이론·모략사상에 대해 역사가들은 역대로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전국시대 말기의 한비자는 천하에 병법을 논하는 사람 치고 손자와 오기의 병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서한의 역사학자 사마천은 『사기』에서 손무·손빈·오기 세 사람을 같은 열전에 편입했다. 송나라 때의 이학자 주희는 손빈과 오기를 고대 작전지휘를 가장 훌륭하게 해낸 군사가라고 했다. 청나라 말기의 양계초는 오기를 '중국 초일급 명장'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칭찬들이 오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인물소개 오기

    파란만장한 개혁가, 국경을 초월한 구조조정의 전문가, 무패의 전략·전술가로 평가받는 오기의 삶은 비참한 최후에도 불구하고 빛난다.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개혁을 주도했다. 그의 개혁은 늘 수구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그만큼 그의 개혁이 본질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개혁은 변혁의 시대에 부합했고, 각국 군주들은 그를 이용하여 자국을 개혁했다. 그러고는 쓸모가 없어지면 그를 내쳤다. 하지만 오기는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늘날로 보자면 그는 개혁 전담 CEO와 같은 존재였다.

    군사모략가로서 오기의 빛나는 점은 병사들의 교육과 정신무장을 강조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장수의 작전과 전략을 충분히 이해하는 의식 있는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오기의 군사모략이 다른 것들에 비해 한 차원 높다는 평가를 듣는 까닭은 군사와 정치의 관계를 심각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의 안위와 성쇠는 정치의 질에 달려 있다고 단언한다. 정곡을 찌른 말이다.

    출처 :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차이위치우 외 지음 | 김영수 편역, 2005.10.20,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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