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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은 물질이 아니다.참고 자료 2018. 2. 27. 16:41
비록 외부세계를 직접적으로 알 수 없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외부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추정할 수는 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런 추정을 하는데 과학적 노력들을 집중해왔다. 과학자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세계의 진정한 본질을 추정하려 애써왔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저 밖의’ 세계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는 상당히 다름이 드러났다. 예컨대 녹색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생각해보자. 물리적 세계에는 특정한 진동수를 가진 빛이 있기는 하지만 그 빛 자체는 녹색이 아니다. 눈에서 뇌로 전달되는 전기적 충격들도 녹색이 아니다. 물리적 세계에는 어떤 색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녹색은 이런 진동수의 빛에 반응해서 마음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성이다. 녹색은 오로지 마음속의 주관적 경험으로서만 존재한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나는 바이올린이 내는 음악 소리를 듣지만, 내가 듣는 소리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성이다. 외부 세계에 그런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진동하는 공기 분자들만 존재할 뿐이다. 장미의 향기도 그것을 경험하는 마음이 없다면 존재하지 못한다. 경험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어떤 모양의 분자들에 지나지 않다.
우리가 물질에서 경험하는 고체성도 그렇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분명 고체성에 대한 경험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자체’도 틀림없이 고체라고 추정한다. 2,000년 동안 우리는 원자를 작고 단단한 공 형태라고 믿어왔다. 그것은 일상경험을 토대로 확실하게 이끌어낸 모델이었다. 그런데 원자가 더욱더 기본적인 소립자들(전자, 양자, 중성자 등등)로 이루어져 있음을 물리학자들이 발견함에 따라, 원자 중앙에는 핵이 하나 있고 그 주변을 전자들이 궤도를 그리며 도는 형태로 되어있다는 모델로 바뀌었다. 이것도 경험을 토대로 이끌어낸 모델이었다.
원자는 아마 지름이 10억 분의 1인치에 불과할 정도로 작을 것이다. 그러나 소립자들은 이보다 10만 배나 더 작다. 원자핵을 골프공 크기로 확대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원자 전체는 축구장 크기가 될 것이고, 전자들은 관람석 둘레를 돌면서 날아다니는 완두콩들 같을 것이다. 20세기 초에 영국 물리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 경이 말 한 대로, “물질은 대부분이 유령이 나올듯한 텅 빈 공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물질은 99.9999999% 텅 빈 공간이다.
양자이론을 개발함에 따라, 물리학자들은 소립자들조차도 고체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소립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과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그리고 소립자들은 핀으로 고정시켜 정확하게 측정할 수도 없다. 소립자들은 입자보다는 파동처럼 보일 때가 훨씬 더 많다. 게다가 명확한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아 잠재적 존재의 불분명한 구름 같다. 물질이 무엇이든 간에, 물질은 거의 실체가 없다.
물질이 단단한 실체라는 우리의 관념은 녹색과 마찬가지로 의식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성이다. 그것은 ‘저 밖에’ 있는 것에 대한 모델이지만, 거의 모든 모델이 그렇듯이 실제로 저 밖에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질량이라는 개념조차도 의심스럽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가속도를 구별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가속하면 우리는 몸이 더 가벼워진 느낌을 받고, 엘리베이터가 감속해서 멈추면 몸이 더 무거워진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다. 저울 상으로도 우리 몸무게는 변할 것이다. 우리가 질량으로 경험하는 것은 우리 발밑에 놓인 땅의 저항이다. 만일 그 저항이 없다면 우리는 지구의 중심부를 향해 자유 낙하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계속해서 감속하고 있으며, 그것을 질량이라 해석한다. 궤도상에 있는 우주비행사는 질량을 경험하지 않는다. 우주선의 벽에 부딪쳐서 순간적인 감속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음도 밝혀냈다. 시간과 공간은 관찰자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당신이 나를 지나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데, 우리 둘 다 두 사건-이를테면, 거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하고 있는 자동차- 사이의 시간과 거리를 측정한다면, 당신의 측정 결과가 내 쪽의 측정 결과보다 시간과 거리 모두 짧게 나올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당신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당신을 지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당신의 참조틀에 입각해서 보면, 나의 관찰 결과가 당신의 관찰 결과보다 시간과 거리 모두 짧게 나올 것이다. 기묘한가? 그렇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수한 실험을 통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틀린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관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이 관념 또한 마음속의 구조물로, 저 밖에 있는 것에 대한 완벽한 모델이 아니다.
칸트는 아인슈타인보다 100년 앞서 이것을 예견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마음이 그 경험을 구성하는 차원적 틀이라고 결론지었다. 시간과 공간은 지각 과정 속으로 편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 현실이 지닌 측면들이 아니다. 객관적 현실은,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그 밖의 어떤 것, 그가 시공간(space-time)이라 부르는 것이다. 시공간은 관찰될 때 일정량의 공간과 일정량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얼마만큼이 공간으로 지각되고 얼마만큼이 시간으로 지각되느냐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관찰자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공간과 시간과 물질이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면, 에너지는 어떠할까? 물리학자들은 에너지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말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에너지는 일을 하는, 즉 변화를 만들어내는 잠재력이라 정의된다. 에너지는 여러 다양한 형태로 온다. 위치에너지, 운동에너지, 화학에너지, 전기에너지, 열에너지, 복사에너지로 … ….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같은 에너지를 측정할 수 없다. 에너지가 일으킨 변화만을 측정할 수 있을 뿐이다.
흔히 에너지는 우주의 근본적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또한 잘못 알고 있는 것임이 드러났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변환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방정식 E=mc²이 바로 그러함을 설명한다. 이 방정식대로라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관찰자들이 한 물체가 지닌 에너지의 양을 측정하면 그 결과는 서로 다를 것이다.
양자이론은 에너지의 본질에 관해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한다. 양자는 일반적으로 에너지의 가능한 최소 단위인 에너지양자라 불린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양자는 사실 작용양자다.
그렇다면 작용은 무엇인가? 작용은 거리와 속도, 운동량, 힘처럼 물리학에서 만나는 물리량 중 하나다. 그렇지만 작용은 대개 기초 수학이나 물리학 수업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작용은 물체의 운동량에 물체의 이동 거리를 곱한 것, 또는 물체의 에너지에 물체의 이동 시간을 곱한 것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운동장에서 공을 던진다고 해보자. 같은 공이지만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날아갈 때가 반 정도 거리만 날아갈 때보다 작용량이 클 것이다. 이때 공의 질량을 배가시키면 작용도 배가된다. 아니면 당신이 일정한 비율로 에너지를 발산하며 달리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달리는 시간을 두 배로 늘리면 작용도 두 배로 늘어날 것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양자 하나의 작용량은 대단히 작지만 –약0.000000000000000000000662618erg. secs (즉 6.62618×10⁻²⁷erg. secs)- 늘 정확하게 동일하다. 이것은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절대적인 것의 하나이며 공간이나 시간, 물질, 에너지보다 근본적이다. 그러므로 영점장은 잠정에너지장이 아니다. 흔히 그렇게 불리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점장은 잠재양자장, 잠재작용장이다.
광자(光子)는 빛의 양자 한 개지만, 광자와 관련된 에너지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예컨대 감마선 광자는 전자파 광자보다 수 조배나 많은 에너지를 지닌다. 그러나 광자 하나하나, 양자 하나하나는 동일한 작용 단위다.
광자는 흡수되면 -이를테면 눈의 망막에 흡수되면- 일정량의 에너지로 나타나는데, 그 양은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의 양을 통해 측정된다. 뇌에 전달되어 색깔로 해석되는 것이 바로 이런 변화다. 변화 또는 에너지의 양은 진동수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서로 다른 색이 서로 다른 진동수를 지닌 빛에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동수란 무엇인가? 진동수도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광자에 적용된 또 하나의 모델이다. 광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진동수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은, 광자라는 개념조차도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 외부 세계에 투사해 왔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 우리는 입자들을 경험하므로 빛이 입자일 거라고 상상한다. 또 파동도 경험하므로 빛이 파동일 거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빛은 때로는 입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적합한 듯 보이고, 때로는 파동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적합한 듯 보인다. 그러나 빛은 파동도 입자도 아닐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의 경험 전체는 마음속의 구조물, 의식 안에 나타나는 형상이다. 이런 정신적 형상들은 물리적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저 밖의 세계가 의식 안에 나타나는 형상들과 같다고 상상하지만, 외부 세계는 거의 모든 점에서 마음속에서 창조된 영상과 전혀 닮지 않았음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에게 물리적 세계의 근본적 차원과 특성으로 보이는 것, 즉 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 등은 단지 의식 안에서 나타나는 형상들의 근본적 차원과 특성일 뿐이다.
[에르빈 라슬로 저, 변 경옥 역, 과학, 우주에 마법을 걸다, pp244-251]
[출처] 물질은 물질이 아니다.|작성자 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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