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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by 최진석교수참고 자료 2013. 3. 22. 17:50
도덕경 - 이 세상에 자연의 질서를 적용하자
[ 道德經 ]노자의 등장
중국 한나라 때의 역사가인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노자는 중국 고대 주(周)나라 쇠퇴기인 동주(東周) 시기에 오늘날 국립도서관에 해당하는 수장실(守藏室)에서 문헌 자료의 수집과 보관을 관장하는 관리로 일을 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나라를 떠났던 것 같다.
주나라를 떠나기 위해 국경에 당도하였는데 국경을 지키던 윤희(尹喜)라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정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요량으로 멀리 떠나려 하신다면, 가시기 전에 저에게 선생님의 생각을 남겨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노자는 그 자리에서 오천여 마디를 써 주었다. 그 후 노자는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신비한 이미지로만 남게 되었다. 이 때 노자가 남겼다는 글을 우리는 『노자』 또는 『도덕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책은 진위나 분량 및 편집 내용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신비한 전설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은 다양한 문화권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성경』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번역본을 가진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양에 250여 종의 번역본이 있었으니 지금은 거의 300여 종에 가까울 것으로 짐작된다.
『노자』를 둘러싸고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존재해 왔다. 어떤 사람은 문명 자체를 부정하고 원시적 자연 상태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는 반문명적 주장이 들어 있는 책으로 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특수한 수양을 거쳐서 초월적 경지를 맛볼 수 있게 해 주는 수양서로 읽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우주의 발생 원리를 설명하는 형이상학 서적으로 읽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치서로, 어떤 사람은 처세술의 기록으로 읽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해석들은 모두 각자의 독자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을 수도 있지만, 모두 노자가 살던 시대적 배경에서 당시의 다른 학자들과 공유했던 노자의 문제 의식을 충분히 반영하였는지는 깊이 있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어느 철학자나 자신이 살던 시대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시대의 문제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자는 음으로 양으로 자신이 살던 그 시대와 호흡을 함께 하는 것이다.새로운 질서 건립의 꿈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람으로 20여 세 연하의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노자』라는 책은 적어도 전국시대 초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노자』에는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상과 문제 의식이 담겨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아마 중국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인데, 이런 변화의 요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자(天子)의 절대적 지배 아래 제후국들이 유기적 관련을 맺으며 유지되었던 기존의 천하관이 무너져서, 지배 체제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이 등장하였다.
둘째, 인간 사회의 절대적 지배자였던 하늘의 보편성과 능력이 의심받게 되면서 천명관(天命觀)이 무너지고 인간의 존재 가치나 그 방식에 대한 다양한 인문주의적 논의들이 등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초월한 절대 존재자가 세상사의 모든 것을 관여하는 것으로 더 이상 믿지 않고,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 세상의 새로운 질서를 도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다양한 이론들을 제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셋째, 기존의 피지배 계층에서 부와 권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되자, 지배와 피지배 계층 사이에 동요가 생겨 나서 그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시기에는 그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하늘/인간, 천자/제후, 군자/소인의 이분 구도가 무너져서 새로운 질서 체제의 건립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논의의 중심 주제는, 구질서가 허물어진 상황 하에서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노자기우도(老子騎牛圖)」
이런 맥락에서 노자의 철학적 주제는 사회 전체의 새로운 질서와 관련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노자와 함께 비교적 초기의 철학자로 간주되는 공자나 묵자에게도 공통되는 문제로서 그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주제가 사유의 중심축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려는 문제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공자나 묵자처럼 인위적으로 형성된 특정한 문화 체계를 진리로 간주하고 그 진리에 백성들을 집중ㆍ통일시키는 통치 방식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특정한 문화 체계에 집중ㆍ통일한다는 것은 그 문화 체계가 '기준'으로 기능하여, 그 '기준'에의 근접 정도에 따라 사회가 차별화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구분'은 항상 갈등의 요소로 작용하고, 갈등이 증폭되면 결국 생업에 종사해야 할 "말[馬]들이 전쟁터에서 새끼를 낳을" 정도로 질서가 붕괴되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자』 제2장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와 같이 노자는 특정한 문화 체계에 집중ㆍ통일하는 방식을 버리고 갈등의 요소도 없는 '자연'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에 쓰이던 말로 농사나 짓는" 평화로운 질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노자는 '자연'을 진정한 질서의 원천, 즉 도(道)라 부르고 이 '도'를 따르는 것이 새로운 질서 건립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장 성숙한 인격을 갖게 하는 데 최고의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각 능력과 전통의 힘을 빌어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질서를 건립하려 했던 공자와는 달리, 노자는 자연의 질서를 인간 세계의 질서에 적용시키려 했던 것이다.이 세상에 적용해야 할 자연의 질서, '도(道)'
노자가 개인의 삶이나 전체 사회의 운영 모델로 채택한 자연은 특정한 의지나 욕망을 따라 움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문화적 체계에 의해 재단되어 구분되거나 이름이 붙는 그러한 공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노자는 자연의 이런 성격을 '무위(無爲)'라고 불렀다.
노자는, 인간 행위의 많은 부분은 특정한 문화 체계와 이론적으로 정립된 체계에 의해 인도되면서 그 체계에 부합하는 욕망의 흐름을 타고 흘러 특정한 방향으로 치우치거나 불균형을 초래하면서 사회를 구분하고 결국 배제와 억압의 과정을 거쳐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고 본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노자는 자연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에게 구분하는 작용을 하는 앎의 활동에 의존하지 말고 특정한 욕망으로 무장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지식이나 욕망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그것들이 행사되면서 드러나는 특정한 방향으로의 지향성과 거기서 생겨 나는 배타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모든 지적 체계는 무엇인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형성되는데, 실현하려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의 지적 체계는 그것과 다른 지적 체계와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욕망이나 의욕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특정한 체계에 의해 인도되면서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향해 내달리는 마음의 활동이다. 하나의 욕망을 실현하려다 보면 그 욕망에서 비켜나 있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고, 또 그 모든 것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의 인간은 특정한 문화 체계에 의해 인도되는 개인의 욕망이나 인위적인 지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모든 것이 반대되는 다른 한 쪽을 허용하면서 존재한다는 자연의 질서를 충분히 체득하여 '도'로 표현되는 자연의 운행 원칙을 구체적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인간의 질서에 적용해야 할 자연의 질서를 나타내는 범주이다.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에 적용한다는 말은 도를 실천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노자가 파악한 자연의 질서는 어떤 특정한 토대 위에 구축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노자의 '도'에는 '실체'나 '본체'의 의미란 없고 그 대신 대립적인 것들의 '관계'와 반대편으로 향하는 운동력이라는 의미가 있다. 노자는 이 세계를 있음/없음, 높음/낮음, 긺/짧음, 어려움/쉬움, 앞/뒤 등으로 개괄되는 대립항들이 각자 자기의 반대편을 존재 근거로 삼으면서 반대편으로 향하려는 경향을 매개로 서로 꼬여서 존재한다고 이해한다. 세계가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원리 내지는 법칙 혹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는 사실을 '도'라는 말로 억지로 표현할 뿐이다. 어떤 것도 반대되는 짝이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노자에게서 만물은 '도'라는 근원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발생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립항들의 '관계'라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도'는 이 세계('자연')가 존재하는 형식이자 원리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런 본질적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텅 빈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뜻 보면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만물의 근원이나 실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노자의 '도'에는 본체나 실체로서의 의미가 없고, 그저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형식 내지는 존재 원리의 의미만 있다. 어느 것도 독자적인 본질을 배타적으로 가지고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근대적 사고에서는 모든 것이 각자의 본질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근대를 시작한 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보자.
데카르트는 이 세계에 상호 환원이 불가능한 궁극적 존재 두 개를 상정하는데, 하나는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이다. 정신은 사유(思惟)라는 본질 속에서 배타적으로 존재하고, 물질은 연장(延長)이라는 본질 속에서 또 정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존재한다. 즉, 정신이 정신인 이유는 정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하는 성질 때문이고, 물질이 물질인 이유는 물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연장이라는 성질 때문인 것이다. 이에 비해 노자는 이 세계를 개괄하는 두 가지 범주 즉, 무(無)와 유(有)를 상정한다. '유'가 '유'인 이유는 '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와의 관계 속에서 있다. '무'도 '무' 자체가 아니라 '유'에다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두고 비로소 '무'가 된다.
다시 말하면, 높음과 낮음이라는 대립되는 개념을 볼 때, 무엇이 높다는 것은 그것 자체에 높다는 성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낮은 어떤 것과 비교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이 높은 것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것의 존재 상태도 반대되는 방향을 향해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노장 철학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중심의 위치를 갖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중심은 없다
『노자』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존재 근거로서의 어떤 본질적 토대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존재나 가치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나 가치는 반대편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존재하고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유가 철학에서는, 인간이 도덕적 가능성을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하며, 따라서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대접받는다. 그러나 노자는 인간이 다른 존재에 비해서 우월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반대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면 어떤 것도 독자적인 위치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며 인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현대의 많은 문제들 가운데 특히 환경 문제가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한 노자의 사상은 환경 문제를 제기한 세계관과 상당히 대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환경 문제에 대한 대안을 노자에게서 찾을 때 많은 사람들이 노자의 원시 자연성으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힌트를 얻으려고 하는데, 이는 노자 사상 자체에 대한 오해일 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의 대안에 대한 탐색 자체로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노자의 철학에서 인간중심주의가 포기된 것은, 인간의 위치나 도덕과 같은 제반 가치들의 기준이나 존재 근거를 '인간'에 두지 않고 '자연'의 존재 형식에 두었다는 점에서 당연히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근대 서양의 도덕은 인간의 이성(理性)이 빚어낸 것이다. 그러나 노자에게 있어서 가치나 행위의 근거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자연에 있다. 노자는 "훌륭한 행위는 [인간적 기준이 아니라] '도'를 본받아 행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 세상의 새로운 질서를 도모하였던 노자에게 있어서도 행위나 가치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중심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노자의 자연주의는 인간의 지위를 특별히 존엄한 것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이지, 원시 자연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주의가 아닌 것이다.
대립면의 관계로 이 세계의 존재 형식을 파악한 노자에게서 '중심'이란 존재할 수 없다. 중심이란 본질이라고도 불리는 존재 근거를 상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세계의 모습을 설명하는 철학에서라야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형식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지점은 '이상(理想)'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도덕적 가능성을 인간 존재의 본질적 근거로 이해한 맹자에게서는 도덕을 내용으로 한 이상이 설정될 수밖에 없고 인간은 그 이상(理想)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자 사명이다.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1)도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자연적인 인간이 학습과 수양을 거쳐 집단적이고 체계적이며 문화적인 질서 속으로 진입해야 할 지점, 즉 이상을 제시하는 말이다.
이런 체계에서는 구체적 삶의 일상이나 개별적 인간의 자발적인 체험 공간이란 이상을 위해 포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자는 일상이나 구체적 체험 공간 혹은 문화적 세례를 받기 전의 인간의 자발성 등은 참되게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런 가치의 보장이 전제되는 사회에서라야 진정한 질서가 유지되고 삶의 역동성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반면에 노자는 공자의 극기복례와는 달리 '거피취차(去彼取此)', 즉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자"는 주장을 내세운다. 여기서 '저것'이란 저 멀리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으로 설정되어 있으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그런 추상적이고 바람직한 이상을 의미한다. 즉, 그와 같은 이상 지향적인 태도를 버리고 바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자발적인 체험 공간으로 내려오라는 뜻이다.
그래서 노자는 맛있는 음식으로 합의된 맛에 이끌리지 말고 네가 지금 구체적인 삶 속에서 먹고 있는 그 음식을 맛있는 것으로 여기라고 한다. 또한 멋있다고 인정받는 옷을 입으려 하기보다는 네가 바로 지금 입고 있는 옷을 아름다운 옷으로 여길 것이며, 저기 다른 곳에 있는 풍속을 따르려고 애쓰지 말고 바로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의 풍속을 좋은 것으로 여기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바로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체계나 인위적 문화에 의해 훈도되는 피동적 주체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있는 자발성에서 삶의 충실한 빛을 발견하고 죽어 가던 일상을 살려 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했을 때 자기의 구체적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발견하여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이 일체를 이루는 참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해 준다.서한(西漢) 시대에 만든 『노자』백서(帛書)
이렇게 되어야 사회는 바람직한 질서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 노자의 뜻인데, 전체 사회적인 의미로 볼 때는 지방 분권적 혹은 지방 자치적 성격을 강하게 보여준다. 사실 노자는 추상적 이상에 의해 억압받던 구체적 개인의 자발성과 그 자발적 인간의 삶의 공간인 일상을 회복시키고 보편적인 문화의 지배력으로부터 개별적 문화를 살려내는 효과를 보여 주는데,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강력한 통일적 단일성보다는 분산적 다양성으로의 발전을 지향한다.
노자는, 하나의 이념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거대한 통일 국가에서는 그 이념에의 접근 정도에 따라 혹은 동의 여부에 따라 각 지방이 차별화되고 그 차별이 결국은 갈등의 요인이 되거나 정치 체제에의 자발적 참여를 방해하게 되어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게 된다고 본다. 자연의 거대한 운행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자발성의 운용에 의해서 거대한 효과를 내고 있듯이 정치 체제에서도 자발성이 가지는 가치와 힘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자발성이라는 것은 바로 정치 행위의 공간이 작아서 그 정치 행위 자체가 즉각적으로 자기의 생활과 연결될 때에 비로소 발휘 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나라를 소규모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런 정치 체제의 의미를 함축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거대한 통일을 이루었을 때 유가 사상이 전면에 나서고, 분열의 시대나 거대한 통일 국가가 모순에 봉착할 때 도가적 사상이 전면에 나섰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노자의 사상은 현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노자 사상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절대 기준을 설정하거나 어떤 중심을 토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지방 분권적인 특색을 띠고 인간중심주의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현대의 환경 문제에 대해서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상에 의해 억압받던 구체적 세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철학적 자산을 발견할 수 있다.
2. 노장 사상이라고 함께 병칭되는 장자와는 어떻게 다른가?
노자가 새로운 인간 질서의 건립에 치중함으로써 통치를 위한 철학을 건립한 듯한 인상을 준다면, 장자는 개별적인 주체가 어떻게 절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노자와 달리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강조되고, 주관적 상대주의가 부각된다. 그리고 우주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구성의 문제에 대한 토론도 노자를 훨씬 능가하는 점이다. 노자에서는 희소한 기(氣)라는 개념이 장자 철학의 중추를 이룬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 노자의 사상은 문명을 거부하는가?
일반적으로 노자의 사상을 반문명적이라고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노자는 문명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화력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을 비판하고, 그 대신 자연의 운행 원칙을 적용한 문명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문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문명을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추천할 만한 텍스트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지음, 소나무, 2001.
- 출처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5.22,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