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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신상담
[ 臥薪嘗膽 ]필(邲)의 전투에서 대패한 진(晉)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초나라가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진나라와 초나라 간의 패권을 다투는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결국 송나라가 나서서 두 나라를 화해시키고 나서야 전쟁을 그만두었다. 이리하여 중원의 정세가 평온해지자 남방에서 오나라와 월나라가 싸우기 시작했다. 오나라 왕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의 보필로 구거(桕擧)의 싸움에서 초나라를 대패시켰는데 오나라군이 초나라 도성 정도를 진격할 때 월나라군이 오나라로 진격했다. 이로 인해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합려는 즉시 군대를 돌려 오나라로 돌아와 월나라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기원전 496년, 월나라 왕 윤상(允常)이 병으로 죽자 아들 구천(勾踐)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합려는 월나라가 국상을 치르는 틈을 타서 군대를 진격시켰다. 두 나라 군대는 휴리(携李)라는 곳에서 크게 싸웠는데 결국 오나라군이 대패하고 합려는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합려는 임종시에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의 원수를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왕이 된 부차는 기필코 월나라를 패망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오자서를 상국(相國)으로, 백비(伯嚭)를 태재(太宰)로 삼아 월나라를 진격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복수를 하기 위해 부차가 밤낮으로 군사를 조련한다는 소식을 들은 구천은 이듬해에 선제 공격을 했다. 대초(大椒)라는 곳에서 결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월나라군이 대패했다.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친 구천은 오나라 군사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었다.월왕 구천의 검 [춘추시대]고대 병기 중에서도 특이한 보물로, 출토 당시에도 여전히 빛이 났다. 굉장히 날카로워서 머리카락도 벨 수 있다. 몸체에는 흑색의 무늬가 있고 ‘월왕 구천 자작용 검(越王勾踐自作用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검은 고대 중국의 검 주조 기술이 높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구천은 부인을 죽이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고 했다. 그런데 대신 문종(文種)과 범려(範蠡)가 맹목적인 결전은 오로지 죽음뿐이라면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오나라 백비에게 뇌물을 먹여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어떠냐고 설득했다. 구천은 그 말을 따라 몰래 백비에게 미녀들과 금은보화를 보냈다. 탐욕스러운 백비는 뇌물을 받자 매우 기뻐했으며, 부차에게 월나라 구천을 살려주라고 권유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살려주기로 했다. 단, 구천이 오나라로 와서 속죄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범려
구천은 부차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나라 대사를 문종에게 맡긴 후 부인과 대부 범려 등을 데리고 오나라로 갔다. 부차는 아버지 합려의 능묘 옆에 돌집을 하나 짓고 구천 부부와 그의 대신들을 몰아넣었다. 그러고는 죄수옷을 입히고 말을 먹이는 고역을 시켰다. 그리고 외출을 할 때면 범려를 밟고 수레를 탔으며, 구천에게는 말고삐를 잡게 했다. 구천은 이렇게 2년 동안 오나라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다. 문종은 백비에게 미녀와 금은보화를 또 보내어,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내도록 부차에게 진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비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법이 거의 없는 부차였다. 2년 동안 구천이 진심으로 속죄했다고 생각한 부차는 백비의 말을 듣고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이 원수를 기필코 갚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무명옷을 입고 잡곡을 먹었다. 잠도 초가집에서 잤으며 돗자리 대신 섶나무를 펴고 잤다. 식탁 위에는 쓰디쓴 쓸개를 달아놓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쓸개를 맛보고는 “구천아, 회계의 치욕을 잊었단 말이냐?” 하고 외치곤 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고 분투하도록 거듭 자신을 격려했던 것이다. 이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긴 유래이다.
월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본 오자서는 근심이 커졌다. 그는 “구천이 지금 쓸개를 맛보며 국민들과 함께 복수를 벼르고 있습니다.” 하고 부차에게 여러 번 간언을 했다. 그러나 부차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멀리했다. 2년 후에 부차는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온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경하했지만 오자서는 도리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제나라를 친 것은 작은 승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큰 심복지환을 남겨놓는 것인 줄을 왜 모르십니까?”
이 말에 대노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살하라며 보검 한 자루를 주었다. 오자서는 그 보검으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얼마 후, 구천은 문종에게 조정 일을 보게 하고 자신은 범려와 함께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오나라를 습격했다. 오나라군은 크게 패하고 오나라의 태자도 전사했다. 기원전 473년, 구천은 재차 오나라를 진격해 부차를 고소산(姑蘇山)에서 포위했다. 이렇게 해서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구천은 부차에게 회계 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섬인 용동(甬東)을 봉해주었다. 부차는 간신 백비의 말만 듣고 충신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다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을 베어 자살하고 말았다. 구천은 국왕의 예로 부차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백비는 죽여버렸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은 춘추시대 말기에 일어난 큰 사건이었다. 기원전 475년에 이르러 중국은 전국시대에 진입했으며, 봉건사회가 시작되었다.오·월 전쟁도
- 출처 :중국상하오천년사, 풍국초, 2008.4.25, 신원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