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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아스포라
    참고 자료 2013. 3. 5. 10:30

    디아스포라

    [ Diaspora ]
    • 외국어

      Diaspora

    본래는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팔레스타인을 떠나서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1948년에 이스라엘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이스라엘 밖에 사는 유대인도 디아스포라라고 하는데, 이산 유대인이 역사상 특히 큰 역할을 한 것은 그리스ㆍ로마시대이다. 이들 이산 유대인은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인이 유폐한 유대인의 자손만이 아니라, 그 후의 역사를 통해서 정치적ㆍ경제적 이유 등으로 각지에 흩어진 사람들이었다. 당시 최대의 이산 유대인 공동체는 팔레스타인이 지배하는 바빌로니아에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나 소아시아, 시리아에도 중요한 공동체가 존재했는데 기원전 1세기의 문서는 유대인이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각지의 어디에도 거주했다는 것을 전한다.

    그들은 어디에 있어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독자적인 공동체를 유지했다. 또한 이산의 땅이 임시의 땅이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노력해서 예루살렘 신전에 순례하고, 예루살렘 신전을 위해서 매년 1명당 반 시켈을 헌금하는 관습을 지켰다. 그들 커뮤니티의 중심은 시나고그(회당)에서의 예배였는데, 이 예배에 이용하기 위해서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성서』가 헤브라이어 원전에서 헬레니즘 세계의 공통어였던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각지의 시나고그와 그리스어역 성서는 1세기에 로마제국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전파를 가능하게 했다. 디아스포라 출신의 유명한 유대인 중에는 기원전 5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단의 기초를 확립한 바빌로니아의 에수라, 기원전 1세기 말부터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당시 최대의 율법학자 히렐,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지 필론, 그리스도교의 사도가 된 바울 등이 있으며 탈무드는 후에 바빌로니아에서 완성되었다.

    동의어
    이산, 離散
    참조어
    유대인
    출처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한국사전연구사 로고





    디아스포라

    [ Diaspora ]
    요약
    팔레스타인 밖에 살면서 유대교적 종교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 유대인’ ‘이산의 땅’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分散) ·이산’을 뜻한다. 역사적인 서술에서 이 단어는 헬레니즘 문화 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통해, 그리스 근역(近域)과 로마 세계에서 유대인의 이산을 가리키고 있다.

    역사적 배경

    BC 8세기 후반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바깥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이 BC 734∼BC 721년의 아시리아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아시리아 영토에 편입되었는데, 이때 많은 유대인이 고향을 떠났다. 또 BC 598∼BC 587년 바빌로니아인(人)의 침략으로 남쪽의 유다왕국이 멸망하자, 비슷한 이주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개척자 같은 정신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많은 무리가 다른 지역, 특히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그 후, BC 4세기 초 알렉산드로스대왕페르시아제국을 정복하자, 근동에서는 그리스인(人)의 통치에 의해서 파급된 그리스문화에 실려 문화적인 혁신을 겪게 되었다. 또 교역과 상업이 급속하게 발달한 데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이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던 탓으로, 유대인의 이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매우 능동적으로 반응하여, BC 1세기 말엽에는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탈리아에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나타났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2장 9∼11절에도 바르티아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프리기아·밤필리아 ·이집트 ·키레네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언급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중심지는 로마제국의 3대도시인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였다. 안티오키아에 유대인들이 정착한 것은 BC 150년 이후였으며, 로마인은 그보다 더 늦었는데, 규모가 크고 부유하였으며 영향력이 강하기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신약시대의 디아스포라 학자 필로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만도 100만 가량 있었던 것 같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어서 헤브라이어아람어를 사용하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리스어를 상용(常用)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도시들에서 주로 수공업과 무역에 종사하던 그들은 본토 유대인들보다 높은 수입을 올렸으며, 그들이 행하는 무역의 증요성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원주민보다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로마의 시민권이 제국(帝國)의 여러 곳으로 넓혀질 때, 바울로 사도처럼 그 시민권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

    문화적 영향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문화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적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70인역(譯)’이라고 불리는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역본을 출간하여,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 많은 학자 ·저술가가 나왔는데, 필로가 가장 유명하였다. 그리스문화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며 지도력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성전과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팔레스타인 안에서는 야훼(하느님)에 대한 제사는 오로지 예루살렘(성전)에서만 거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종교적 회당(會堂), 즉 시나고그가 디아스포라에서 생겨났으며, 그것은 팔레스타인으로 역수입되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도 유대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나고그를 통해서였으며, 이 회당 조직이 사도 바울로의 전도여행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목할 것은,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최초로 반(反)유대인적 풍조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배타성, 경제적 번영, 특권들 때문에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혐오가 퍼졌다.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체사레아 등지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났고, 법정에서는 유대인에게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끊임없는 반목이 계속되어 결국 칼리굴라의 박해로 이어져, 학자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로마 법정에 박해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박해는 칼리굴라의 암살로 끝났다. 반유대적인 편견(偏見)은 키케로, 페르시우스, 세네카, 퀸틸리아누스, 타키투스 등 로마의 문학가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2000년을 두고 전유럽과 중근동(中近東)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 집요하고도 비이성적인 반유대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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