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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멘
- 신(神)의 행위, 영향력, 신비스런 힘을 뜻하는 고대 라틴어.
- 원어명
numen
고대 로마인들은 제우스, 헤라, 아레스 등 많은 신을 믿는 다신 신앙 속에 살았으며, 신들이 자연 세계와 인간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들이 지닌 신비한 초자연적 힘과 영향력을 누멘이라고 한다. 또 신들의 신성(神性)을 뜻하기도 했으며, 신 자체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인들은 누멘이 특별한 자연현상이나 사물들, 특이한 능력을 지닌 인간들 속에도 현존한다고 믿었다. 이 말의 복수형태(numina)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사물들이나 현상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던 것 같다.
누멘은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마나(mana)’의 개념과 매우 유사한 면이 있다. 영국의 인류학자 R.H.코드링턴이 그의 저서 《멜라네시아인들 The Melanesians》(1891)에서 처음으로 멜라네시아인들이 마나라는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믿으며, 그 믿음이 삶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에 따르면 마나는 ‘어떤 자율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을 뜻하는 말로서, 멜라네시아인들은 인간의 보통 능력을 초월하며 자연의 정상과정을 벗어나는 모든 현상을 마나에 의한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누멘과 마나는 모두 초자연적인 힘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개념이지만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로마 종교에서 누멘은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라기보다는 신들이 지닌 특별한 속성을 일컫는 말로 신들의 힘, 의지, 영향력, 활동, 현현 등과 관련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R.오토는 누멘이라는 말을 고대 로마 종교의 범위를 넘어서 오늘날 종교학이나 신학에서 널리 쓰이는 보편적 개념으로 확립시켰다. 그는 《성스러움의 의미 Das Heilige》라는 책에서 누멘의 형용사형인 ‘누미뇌제(numinöse)’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여, 종교세계의 고유한 현상인 성스러움의 의미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삼았다. 즉 ‘성스럽다’라는 말이 도덕적, 합리적 개념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지녔던 근원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누멘적인 것(Das Numinös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오토에 따르면 누멘적인 것의 체험은 종교의 가장 근원적인 현상으로서, 다른 어떤 체험과도 혼동될 수 없는 독특한 고유의 체험이라고 한다. 그것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신비에 접할 때 느끼는 독특한 체험을 뜻한다. 오토는 이것을 ‘피조물적 감정’이라고 부르며,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는 자를 대할 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며 무(無) 속으로 빠져들어감을 느끼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누멘적 감정은 상반되는 양면성을 지닌 것으로, 누멘적 대상이 두려움, 전율, 공포감, 어마어마함의 느낌을 자아내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끌어당기며 사로잡고 매혹시켜 경탄하게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