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북인
    참고 자료 2013. 6. 26. 15:30
    두산백과

    북인

    [ 北人 ]
    요약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후반에 성립된 동인으로부터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었다.

    1589년(선조 22) 동인은 정여립(鄭汝立)의 반란사건으로 실각되었다. 이어 서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정철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서인이 실각하였고 이때 다시 동인이 득세했다. 그러나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정인홍(鄭仁弘) 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류성룡(柳成龍) 등의 온건한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서인에 대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리되었다. 학통상으로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동인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했다. 이는 학통이 당파가 되는 조선 성리학의 특성이었다.

    임진왜란 중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과 영남에서 북인이 의병을 일으켜 구국에 앞장섰던 일을 바탕으로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북인은 현실정치에 이견이 대립되었던 차에 세자를 책봉하는 견해의 차이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갈라졌다. 대북파는 정인홍, 이이첨을 중심으로 했고, 소북파는 유영경을 중심으로 했다. 대북파 내에서도 골북(骨北)·육북(肉北)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 되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 배격[晦退辨斥]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비(宣祖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축출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서인과 남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것이 결국 자기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가 되어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광해군 축출[仁祖反正]로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이후 남이공(南以恭)·정온(鄭蘊) 등이 인조대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정파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일부 인물들은 남인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사상은 정통 주자성리학과 거리를 둔, 조식을 스승으로 하였던 데서 나타나듯이, 서인 및 남인과 어느 정도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명(明)이 후금(後金)과의 싸움에 군대를 동원하라고 요구하였을 때에는 광해군과는 달리 대개 출병에 찬성하는 등 사대 명분론 등에서는 다른 사림들과 입장을 함께하였다.

    참조항목
    남인, 붕당정치, 동인


    출처 :두산백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북인 [北人] (두산백과)


    '참고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사무애법계  (0) 2013.06.26
    보시  (0) 2013.06.26
    남인  (0) 2013.06.26
    소론  (0) 2013.06.26
    노론  (0) 2013.06.26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