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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2013. 6. 26. 15:22
    두산백과

    동인

    [ 東人 ]
    요약
    조선 중기의 정파.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훈구파들이 물러나고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신진 관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당파이다.

    명칭은 후배측(신진 사림세력) 입장에서 분파의 계기를 이룬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중심 구성원은 류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우성전(禹性傳) ·최영경(崔永慶) 등이었다.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처음부터 학연적 성격이 짙었다.

    특히 심성(心性)을 강조하면서 훈척정치(勳戚政治)와의 투쟁과정에서 사상적 지주로 형성되어온 이황의 학문이 사상적 중심이 되었던 만큼, 구체제의 요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렬하고 훈구정치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수뢰혐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 등의 방식으로 서인을 압박하였으나, 그러한 공세적 입장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가담함으로써 순수성이 훼손되는 부작용도 겪었다.

    1582년(선조 15) 이이(李珥)가 중재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을 자처한 이후로 그들과의 사이에 굳어진 양당체제에서 명분과 실력면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1589년 자파 인물인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수세에 몰렸으나, 2년 후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鄭澈)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되자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국가적 위기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인들은 서인 정철에 대한 처벌 수위를 둘러싸고 격화되어 동인세력이 분리될 지경이었다.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산해, 정인홍(鄭仁弘) 중심으로 유영경, 기자헌,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 홍여순, 임국로, 이이첨 등이 북인(北人)으로 분류되고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 류성룡, 이원익, 이덕형, 이수광, 윤승훈, 이광정, 한백겸 등이 남인(南人)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이산해의 집이 강북이었기 때문에 북인이라고 불렀고 류성룡의 집이 강남이었기 때문에 남인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조식의 문인이고 후자는 이황의 문인이라는 학연적 성격을 가졌다.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기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질성(同質性)이 사라지고 모두 동인이라는 명칭도 의미를 잃게되었다.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들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예상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지만 동인들은 서인 세력을 몰아내는데만 골몰하여 이를 일축하였다. 특히 1590년 일본 통신사로 갔던 동인 김성일이 국가의 운명보다는 당파의 이익에만 치중하여 일본의 침략대비에 반대하였던 일화는 유명하다.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했던 서인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북인들이 1608년 광해군이 등극하자 정인홍을 중심으로 정권을 잡았다. 이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살해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북인들은 조선정치의 중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출처 : 두산백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동인 [東人]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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