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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과학을 넘어서: 인지과학과 체화된 인지로 by 이정모
    참고 자료 2014. 3. 18. 12:34
    뇌과학, 경계를 넘다

    뇌과학을 넘어서: 인지과학과 체화된 인지로

    • 저자

      이정모 〈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명예교수〉

    20세기 후반, 뇌 영상 기법 등의 신경과학적 방법론이 개척되면서 뇌의 구조와 그 기능에 대한 연구 방식을 재구성하며 뇌에 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로 뇌과학이 현대 과학과 일반인의 관심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런데 뇌과학이 일반인의 지적 관심을 사로잡게 된 것은 뇌의 해부학적 측면이나 유전학적, 생물학적 기반보다는 뇌의 심리적 기능을 밝히는 연구 성과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뇌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뇌의 신경해부학적 구조라기보다 뇌의 심적(주로 인지적) 기능이다. 즉 뇌과학이 일반 사람들에게서 각광을 받는 까닭은 뇌 그 자체라기보다는 뇌와 마음의 연결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뇌와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는 신경과학 이외에도 인지과학, 심리학 등이 있다. 서로 중첩되는 분야가 많기에 이들 학문 간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대학에는 뇌과학 학과도 있지만 그 교과 과정을 보면 뇌의 인지적 기능을 연구하는 인지과학 연구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 뇌과학 학과보다는 MIT 등에서와 같이 ‘뇌 및 인지과학 학과’가 이 분야 학과의 명칭인 현실은 뇌 연구에서의 인지적인 접근이 필수라는 것과 뇌과학과 인지과학의 학문적 경계의 애매함을 잘 나타낸다.

    1990년대에 이르러 각광을 받으며 떠오른 지 20여 년 밖에 안된 뇌과학이 지금 다른 학문들과 연결되어 많은 과학적 발견을 이루어 냈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현재 세계적으로 일종의 뇌과학 지상주의가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입장은 미래에 뇌과학적 연구가 충분히 진전된다면 의식을 비롯한 인간의 심적 현상에 대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환원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 입장이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지니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과도하게 단순화한 뇌과학 지상주의의 관점을 넘어서서 뇌과학의 바탕에 대해 더 본질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자 한다.

    인지주의 틀의 출현

    국내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 20세기에 인류문화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인지주의’ 틀의 형성이라고 하겠다. 정보처리 패러다임으로써 인지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그 이전에는 단순한 산술적 계산기에 머물던 컴퓨터가 비로소 오늘날의 지능적 컴퓨터로 재개념화되어 새 세상이 열렸다.

    생명체인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만든 인공물의 하나인 컴퓨터가 정보를 처리하는 점에서는 같은 종류의 시스템이라는 발상의 대전환으로 인하여 비로소 인류 문화에서 컴퓨터 시대와 디지털 문화 시대가 열렸고, 이어서 인터넷 문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과 디지털 컴퓨터가 모두 상징(기호)을 조작하는 정보 처리 시스템이라고 보는 관점을 정립한 이러한 인지주의 틀의 출현을 과학사 또는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20세기의 과학혁명, 곧 ‘인지혁명’이라고 부른다.

    좌뇌와 우뇌의 기능 차이를 처음으로 연구하여 노벨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인 스페리(R. Sperry) 교수가 일찍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지주의의 등장은 하나의 ‘과학혁명’이었고, 과거의 물리학 중심의 전통적 과학에서처럼 모든 것이 전적으로 아래에서 위로(bottom-up) 결정된다는 상향적 결정론의 관점이, 인지주의 과학혁명에 의하여 하향적(top-down) 결정론의 입장과 조합하여 ‘이중 방향’, ‘이중 결정’ 모형으로 과학이 변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과학관과 세계관이 급진적으로 수정된 것이다. 더구나 인지과학과 여러 소프트 테크놀로지(특히 인공물과 인간의 상호작용 관련 기술)의 수렴, 융합은 또 다른 미래 가능성들을 시사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21세기는 ‘국제화 시대’가 아니라 ‘인지 시대(the Cognitive Age)’라는 선언적 기사를 싣기도 했다.

    넓게 본다면 인지과학은 뇌과학을 그 하위 구성 영역의 하나로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좁게 본다면 뇌과학을 인지과학과 차별화하여 독립적인 학문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 뇌과학의 탐구 주제에서 심리적 기능과 인지적 기능을 제외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남는 뇌과학은 별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학문이 되지 못한다.

    대안으로 일부 신경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지과학은 신경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 인지과학은 신경과학 또는 생물학의 하위 학문이 되는데, 이것은 ‘사랑’ 등과 같은 마음의 내용을 포함한 모든 심적 현상이 뇌의 신경적 활동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환원주의적 관점으로 귀착하게 된다. 이 관점은 인지과학이나 인문학에서 수용하기 힘든 입장이다(Gazaniga 2012).

    뇌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점에 도달했을까? 뇌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과 유전공학, 정보 통신 기술, 그리고 인문학과 인류 문화와 인간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의 정립이 요청되는 시점일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현재 일종의 뇌과학 지상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심적 현상을 뇌의 신경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적 뇌과학의 관점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는 뇌과학 연구가 갓 출발하여 진행되는 단계여서 모든 것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뇌과학 연구가 충분히 발전하고 진행된다면 인간사의 모든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뇌과학의 신경 과정 작용의 환원주의적 원리에 의해 이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의 틀이 일반적으로 널리 확산될 것이다.

    신경과학자들, 과학 학술지, 언론, 그리고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뇌는 곧 마음이다(마음=뇌)’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뇌 연구 결과 하나하나에 매료되어 뇌 지상주의에 매여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마음은 뇌의 신경적 활동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신경과학자들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에는 어떤 잘못이 있을까? 뇌와 신경과학에 대한 관심이 과연 21세기 내내, 그리고 22세기와 그 후의 미래에도 지속될까? 날마다 새로워지는 뇌과학적 발견에 뒤지지 않으려면, 그리고 과학사적으로 21세기 후반을 잘 맞이하려면 우리는 생각의 틀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뇌과학을 넘어서 1

    21세기 현재,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하고 중요한 변화가 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중요한 생각의 변화 중 하나는 바로 기존의 생각, 즉 ‘나의 마음은 곧 나의 뇌다’, 더 나아가서는 ‘나는 나의 뇌다’라는 식의 생각을 버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마음, 의식을 뇌와 몸 밖으로 확장시켜서 뇌-몸-환경을 불가분의 총체적 단일한 단위로 이해하려는 스피노자식, 메를로 퐁티식의 생각이 되살아난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몸을 동물과 연속선상에 있는 하나의 자동기계로 생각하며, 마음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몸을 동물적 기계로 보았고, 마음과 영혼은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마음은 사고하는 실체이며 외연을 지니지(물리적 공간을 점하고 있지) 않는 반면, 몸은 물리적 공간에서 기하학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외연을 지닌 실체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존재론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수정론적인 입장이 이후에 있었으나, 서구의 문화사에서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적 입장이 대세로 지배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신경과학의 등장으로 인해 마음을 뇌의 신경적인 활동으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일원론(마음=뇌)적 관점이 지배적이긴 했으나, 정신(마음)과 물질을 대립적으로 보는, 또는 생각의 주체와 그 대상이 되는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보는 데카르트식 존재론의 관점은 아직도 신경과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뇌=마음’, ‘마음=뇌’, ‘의식=뇌’ 라는 기존의 단순한 과학적인 믿음을 과감하게 버리는 움직임이 철학을 비롯한 학계에서 태동하고 있고, 이러한 ‘마음’ 개념의 재구성의 추세가 더욱 확산된다면 단순히 철학, 신경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및 사회과학 전반, 그리고 인공지능, 로보틱스, 다른 인간 관련 공학 등에 강력하면서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로보틱스나 소프트 IT 연구에는 가장 강력하고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한다.

    저명한 철학자인 앤디 클라크, 데이비드 찰머스 등이 이러한 발상 전환의 중심에 서있으며, 여러 학자들의 공감을 받고 있다(물론 강한 비판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핵심 주장은 ‘데카르트를 넘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신(마음)과 물질(신체), 그리고 주체와 객체를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구별한 데카르트식의 존재론의 개념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또한 20세기 전반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나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현재 신경과학의 한 부분인 뇌과학의 환원주의적 관점이 인간을,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활동을 왜곡하여 이해, 접근, 탐구하게 되고,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경과학자라고 해서 모두 이러한 환원주의 관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철학자들의 일부가 늘 그렇게 이야기해 오던 것이기에, 철학자들이 그러한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또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기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냥 무시하고 넘겨 버리지 못할 이유는 이러한 논의를 최근에 다시 전개하도록 촉발시킨 사람들이 철학자가 아닌 인공지능학자, 로보틱스 연구자, 지각심리학 연구자들이었다는 데에 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미디어랩의 중심 연구자였던 로드니 브룩스 교수는 인공지능, 로봇 등을 연구하던 중에 과거 데카르트식의(고전적 인지과학의) 인공지능 이론이나 로봇 시스템 이론으로는 제대로 된 인공지능 시스템이나 로봇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개념화의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했다. 이에 다른 인공지능 연구자, 로보틱스 연구자들이 점차 공감했다. 시스템에 내장된 프로그램과 그것이 작동할 주변 환경이 밀접히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학자들의 이러한 강력한 이의 제기에 힘을 얻은 철학자들은 과거의 현상학적 철학 전통에서 이야기하던 개념들을 다시 꺼내어 생각하고 가다듬어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몸-환경-활동의 중요성을 이미 예전에 이야기했던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등의 생각들에 현재까지 진행된 신경과학, 인지심리학, 동물행태학, 인류학, 로보틱스 등에 대한 연구를 연결하여 마음, 의식, 존재의 개념들을 다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재구성의 결과로 마음과 의식은 ‘뇌를 넘어서’ 개념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알바 노에의 《뇌과학의 함정》이라는 책에서 주장한 바를 인용하자면, ‘마음, 의식, 나=나의 뇌(의 활동)’라는 일부 신경과학자들의 ‘거대한 착각’에서 이제는 우리가 빠져나와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동안 잘못 가고 있던 자연과학을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적 재개념화를 통해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때이다.

    ‘뇌는 마음과 같지 않다’, ‘마음(의식)은 뇌와 몸, 그리고 환경(다른 인간과의 관계 포함)의 상호작용 활동에 의존한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몸과 환경을 빼놓고 뇌가 곧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의미는 (환경과의 행위적 활동) 관계에서 (비로소) 생긴다’, ‘뇌 혼자서 무엇을 이룰 수 없기에 실상 모든 의미는 머릿속에 없다’, ‘우리의 경험을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뇌 자체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이 아니라, 우리와 사물(환경)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동적인 (행위 또는 활동) 관계이다’, ‘마음을 세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춤을 근육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우리 뇌의 신경적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과학자들이 알게 된 무언가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집에서 실험대로 가져온 선입견이다’ 그래서 신경과학자, 일반인, 대중 매체 등, 우리 모두가 빠져 있는 이러한 (뇌과학적) 거대한 착각에 정면으로 맞서 이를 포기하고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착각을 벗어나서 스피노자,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의 관점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은 ‘체화적 인지’ 또는 ‘확장된 마음’의 틀로써 현재 인지과학의 대안적인 관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뇌과학을 넘어서 2: 체화적 인지 틀의 형성

    20세기에 인간의 마음에 컴퓨터 은유를 적용하여 출발한 인지과학은 인류 사회에 컴퓨터 문화 시대를 제공했고 (그것이 지금의 인터넷 시대, SNS 시대로 발전했다) 21세기의 현 시점에서 또 다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 변화의 틀은 위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적 존재론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다.

    최근에 철학과 인지과학에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또는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은 종래의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이 갖고 있던 데카르트식의 이원론적 존재론의 생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관점이나, 그 반대인 ‘마음은 곧 뇌의 신경 과정이다’라는 뇌과학의 환원주의적 일원론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관점이다.

    이 틀은 인간의 마음, 인지가 개인의 뇌 속에 추상적(다분히 언어적) 명제의 형태로 표상된 내용이라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몸을 가지고(embodied) 환경에 구현, 내재되어(embedded) 사회 문화 환경에 적응하는 (몸이 있는) 유기체가 ‘환경’과의 순간적 상호작용 행위 역동(dynamics) 상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마음, 즉 몸과 문화와 역사와 사회의 환경적 맥락에 의해 구성되고 결정되는 그러한 ‘역동적 활동’으로써의 마음을 강조하는 접근이다.

    이 ‘체화된 인지’적 틀은 고전적 인지주의의 정보 처리 접근이 지니는 제한점을 벗어나려고 한다. 고전적 인지주의가 환경과는 독립적으로 한 개인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인지적 표상이나 정보 처리를 강조했다면, 체화된 인지의 입장은 몸으로 환경 속에 구체화되며, 몸의 활동을 통해 환경과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행위로써의 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몸 밖의 환경을 구성하는 다른 인간들의 마음이나 각종 인공물들(컴퓨터, 휴대 전화, 로봇 등)에 분산되어 표상되거나 작동하는 마음, 그리고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인 상황에서 행위로 구성되는 마음으로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몸에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 몸의 감각 운동적 체험 바탕이 마음의 핵심이 되며, 고차적인 심적 기능도 이러한 감각 운동적 기초의 제약과 허용의 틀 안에서 비로소 이해,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지각하는 내용은 몸의 활동에 바탕을 두고 있고, 우리의 행위는 지각에 의해 인도된다. 신경계, 몸, 환경 요인 들이 실시간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과학적 설명이 주어진다. 최상위의 관리 통제자(마스터)라고 하는 뇌에 의한 전반적인 계획이나 통제가 없어도, 분산된 단위들의 지엽적인 상호작용에 의하여 자가조직적(autopoietic)으로, 창발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것이 심적 현상이다.

    마음은 환경으로 확장되고, 상황 속에서 분석되고 이해되어야 하며, 자연적이고 생태적 상황에서 그 맥락이 고려되어야 하며, 환경과 역동적인 시간 경과상의 상호작용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전통적, 논리적, 형식적 접근보다는 역동적 접근을 통하여 과학적으로 탐구되어야 하며, 현상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체험되는가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도 설명적 요소로 반드시 포함되어 마음이 이루어 내는 ‘의미’가 설명되어야 한다.

    몸과 뇌를 지닌 인간이 빚어내는 자연 현상인 동시에 사회 현상이기도 한 심리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연결이 필수다. (물론 한국에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서구에서는 자연과학이기도 한 심리학과의 연결도 필수다.)

    즉, 1) ‘뇌’를 포함하는 ‘몸’과 2) ‘환경’(각종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과 3) 그리고 이 둘이 연결되는 상호작용적 ‘활동’의 세 측면이 서로 괴리되지 않고, 하나의 역동적인 전체로써 개념화하는 그러한 접근을 해야 ‘마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주장하듯이 몸의 한 부분적 실체에 지나지 않는 ‘뇌’에서 마음의 모든 것이 일어나며, 환경과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뇌의 신경적 작용이 모든 심적 현상과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등에 연원을 둔 이러한 개념적 변혁에의 움직임은 종래의 일부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이 갖고 있던 마음과 몸에 대한 데카르트식의 이원론적 생각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심신이원론이나 대부분의 신경과학자, 뇌과학자들이 지니는 ‘마음은 곧 뇌의 신경 과정이다’라는 환원주의적 일원론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틀의 펼침이다.

    이 체화된 인지 접근은 고전적 인지주의에서 배제되었던 ‘몸’을 마음의 바탕으로 되찾게 하며, 몸을 지닌 마음과 분리될 수 없는 ‘환경’을 인지과학과 심리학으로 되돌리게 하며, 공간적 연장이 없었던 추상적인 ‘정신적 실체’라는 마음이 아니라 ‘몸을 통해 환경으로 연장되고 확장된, 환경과(컴퓨터, 휴대 전화 등의 인공물 포함) 상호작용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개념을 재개념화 할 가능성을, 아니 그래야 하는 필연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개념을 이렇게 ‘뇌를 넘어서’ 환경과 괴리되지 않는 실체의 개념으로 재구성한다면, 이러한 재구성의 틀은 심리학, 인지과학의 기초적인 이론의 틀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물리학, 생물학 등), 테크놀로지(로보틱스, 소프트 IT 등 포함), 예술(공연 포함) 등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적, 응용적인 틀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상당한 시사점을 지니게 된다(뇌과학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도).

    이 ‘체화된 인지’가 학계에 떠오르기 이전에도 이미 인지과학의 틀을 도입하여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가 인지과학과 연결되었다. 학문 간의 수렴과 융합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인지정치학, 행동경제학, 인지경제학, 신경경제학, 행동법학, 인지법학, 신경법학, 학습과학 등의 새 분야들의 등장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분야들에서는 뇌의 신경적 현상 관점에서 사회 현상을 개념화하려던 시도들의 편협한 한계를 넘어서서 ‘체화된 인지’의 틀을 도입하여 인간과 사회 현상을 보는 관점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미래 사회과학의 과제로 남는다.

    공학 분야 중에는 처음부터 인지과학의 한 중심 분야였던 인공지능 연구에 의해 각종 소프트웨어 시스템이나 디지털 기기의 디자인 분야들, 특히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HCI)] 분야가 인지과학과 연계해 왔다. 이러한 분야들에서 뇌과학 연구의 발전 결과와 그 시사를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연구 영역이나 뇌-로봇 인터페이스(brain-robot interface) 영역이 이러한 시도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의 여러 시도들은 새로운 것을 보여 줄 듯하면서도 문제점들을 계속 안고 있다.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으로 ‘의미(meaning)’를 습득하고 창조하면서 삶의 이야기를 엮어 가는 존재, 환경과 괴리되지 않고 하나 되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삶을 인공적으로 구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문학과 예술 분야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체화된 인지’의 틀은 여러 가지 새로운 개념적 재구성을 시사한다. 예술 분야에서 ‘환경과 괴리되지 않은 채, 몸을 통해 구현되는 마음’의 관점은 문학, 음악, 미술, 공연 등의 분야에서 여러 새로운 개념적 구성 작업을 가능하게 한다. ‘뉴 미디어 이론’에 새로운 인지과학의 틀이 깊이 관여한 이유이다. 그러나 인문학과 예술의 분야는 이를 넘어서 또 다른 개념적 재구성이 요청된다. 즉 내러티브, 이야기의 문제이다.

    뇌과학을 넘어서 3: 내러티브적 마음

    인문학자 마크 터너는 《문학적 마음(The Literary Mind)》이라는 책에서 ‘인지과학의 중심 주제가 사실상 문학적 마음의 문제’이고 ‘이야기가 마음의 기본 원리’라고 했다. 로이드 등의 철학자들의 논의에 의하면 내러티브란 인간 마음의 기본적, 일차적 작동 원리이다(Lloyd 1989).

    인지과학 출발의 기틀을 닦은 심리학자 브루너(J. Bruner)는 의미 만들기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며, ‘의미’라는 것은 ‘상징(기호)과 그 지시 대상’에 의해 정형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환경에 바탕을 둔 ‘내러티브적 해석’에 의해 매개되고 조정되고 또 재조정되어서 그 맥락적, 개인적 다양성이 살아나고 그 문화적 체계 내에서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는 해석의 틀에 의해서 비로소 생성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지금의 주제와 관련하여 넓게 해석하자면, ‘의미’란 한 문화 공동체의 환경에 부여되는 역동적이고 소프트웨어적이며 내러티브적인 것이지, 환경과 별개의 독립적인 실체로 개념화될 수 있는 뇌의 신경적 과정이 아니다. 하드웨어적인 것 그 자체만으로 의사소통의 의미를 지니게 되고 다양한 수용자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그러한 현상적, 심리적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각자가 아침부터 밤까지(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열심히, 부지런히 쉬지 않고 ‘이야기’적 의미를 양산해 내는 그러한 존재이고, 마음의 본질은 ‘이야기, 즉 내러티브 생산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에 바탕을 두고 인간적 존재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존재적 의의를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란 한 인간이 몸을 통해 환경에 현실적으로 구현되어서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체험적으로 엮어 내는 이야기적, 내러티브적 해석이 바탕이 되는 의미이다.

    이는 비록 환경과 독립적인 기관으로 설정될 수 있는 뇌의 신경적 작용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는 되지만, ‘뇌를 넘어서’ 환경과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역사와 문화와 개인적인 일화들이 엮이고 짜이는 문화적 의미의 체계이다. 사회문화적 환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생물학적인 그 무엇이다. 이를 뇌과학의 신경적 과정 현상만으로는 도저히 그 내용을 다 설명할 수 없는 심리적, 인지적인 산물이다.

    인지과학에 내러티브적 접근의 도입이 필연적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의 결정적 산물이며 또한 인간의 마음 활동인 문학을 인지과학과 연결해 탐구해야 할 것이다.

    문학과 체화된 인지

    인지과학 입장에서 본다면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마음의 본질을 분석하고 기술한다는 것, 그리고 문학하는 사람들의 문학 활동과 독자의 심적 활동이 인지과학에서 논하는 언어 이해와 마음 이론의 적용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느낄지에 대해 저자가 나름대로 생각하여, 즉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저자의 마음 이론에 바탕을 두고, 저자 자신의 생각을 상징으로, 표상으로 표현하고, 독자는 이를 읽으면서 자신의 기억에서 ‘이야기(내러티브)적 원리’, 각종 세상의 지식을 동원하여 그 상징 표상을 정보 처리하고 해석하여 이해하고 그것이 정서적 매커니즘과 연결되어 감흥을 받게 된다.

    문학 작품의 언어적인 표현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저자의 글은 독자가 독자 자신의 기억에서 어떠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야기적 의미를 해석하고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기호적인 단서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의 해석과 구성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인지(정서를 포함한)의 과정이며, 인지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과거의 문학(비평) 이론들로써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 등의 입장들이 있었다. 이 틀이 20세기 말에 무너지고, 이제는 문학의 내용 전개나 예술을 자연주의나 진화이론에 바탕을 두고 이해하거나 인지이론에 의거하여 이해하고, 분석하고, 비평하고, 기술하려는 입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기존의 문학(비평) 이론은 주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측면만 강조했지, 그러한 문학 활동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인지적인 측면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 결과가 지니는 시사점을 무시했다. 실제의 인간은 진화역사적으로 변화/발달한 몸을 지닌 생물체인데, 과거의 문학은(적어도 문학 비평이론) 이러한 문학적 산물을 내어놓고 또 이해하는 인간이 자연의 존재라는 ‘자연 범주’의 특성을 무시해 왔다.

    과거의 문학 비평 이론은 문학 작품이나 예술 등과 관련된 인간의 마음이 ‘자연과학적으로 밝혀지는’ 숨겨진 복잡성에 대하여 학문적 인식과 과학적 지향의 수용이 (인지과학적 의미에서) 없었다. 아니, 실제의 예술 작품 생성 작업 현장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나, 문학(비평) 이론가들은 문학 이론 구성에서 이러한 면을 무시해 왔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인간 삶의 무엇을 위하여 생겨났는가? 문학 활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개개의 문학 작품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들은 진화이론적 관점에서,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앞으로 문학과 인지과학의 연결 분야가 인지과학의 응용분야로 발전할 뿐만 아니라, 이 분야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또 다른 상위 수준의 인지과학 이론의 틀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그러한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인지과학적 연구가 문학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인지과학 자체도 문학과 연결됨으로써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하여 보다 거시적이고 새로운 이해와 접근을 전개할 수 있음이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이 인지과학에서는 마음의 작동 원리가 본질적으로 ‘내러티브 엮기’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거대한 착각을 넘어서

    앞으로는 심적 현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문학과 인지과학이 연결되고 수렴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문학의 상위 범주인 인문학은 당연히 인지과학과 연결되어야 한다. 인문학과 인지과학의 수렴-융합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하드웨어적 작동 원리를 밝히는 뇌과학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뇌(신경)과학은 심적 현상에 대한 인지과학적, 인지심리학적 설명에서 충족되어야 할 어떤 신경생리-생물적 제약을 제시하고 그 설명의 자연과학적 타당성을 보장할 수는 있으나, 신경과학적 설명이 곧 심리 현상에 대한 충분한 과학적 설명일 수는 없다. 놓치는 것이 많다.

    뇌(신경)과학은 인간 심리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설명을 위해 필요조건일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 심리 현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과거의 일부 연구자들이 지녔던 뇌과학 지상주의라는 ‘거대한 착각’을 이제는 넘어서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뇌과학 지상주의라는 이 거대한 착각을 넘어서서 신경과학, 인지과학(사회과학의 대부분이 이에 수렴된다), 인문학, 공학과 기술(소프트 IT 포함) 등을 모두 수렴하여 포괄적이고 융합적인 연결을 도출할 수 있는 21세기적 개념의 틀이 ‘체화된 인지’의 틀인 것이다.

    참고문헌

    • 마이클 가자니가. 《뇌로부터의 자유: 무엇이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을 조종하는가?》 박인균 옮김, 추수밭, 2012.
    • 알바 노에. 《뇌과학의 함정》 김미선 옮김, 갤리온, 2009.
    • Lloyd, D. (1989) Simple Minds Cambridge, MA: MIT Press.

    출전

    • 이정모 (2011) “뇌과학을 넘자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의 연결점인 인지과학의 새 틀” 《시와 반시》 제77호, 198-211.

      [네이버 지식백과] 뇌과학을 넘어서: 인지과학과 체화된 인지로 (뇌과학 경계를 넘다, 2012.11.5,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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