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수행은 좌선, 경행, 와선, 일상의 알아차림이 있는데, 어느 수행이든 다음과 같은 순서를 적용합니다.

 

1) 마음 알아차리기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금 무슨 마음가짐인가?’하고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바라는 마음이나 근심걱정이 있으면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먼저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편안해진 마음에서 수행을 시작합니다.

 

2) 몸의 느낌 알아차리기

좌선에서는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경행에서는 서있는 몸의 자세를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쭉 알아차리며 내려갑니다. 이것은 몸의 느낌을 알아차려 마음을 현재에 두면서 몸을 이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아무 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지금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이든지 알아차리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합니다.

 

3) 가장 두드러진 대상에서 그 모양을 알아차리기

현재 몸과 마음에서 생긴 가장 분명한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좌선에서는 호흡을 주로 알아차리고 경행에서는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며 일상에서는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몸의 움직임에 마음을 두는 것은 마음을 몸에 붙여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과정입니다.

 

4) 대상의 모양에서 느낌을 알아차리기

마음이 집중되면 움직임을 통해 느껴지는 몸의 감각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수행자는 느낌이 나타나면 알아차리고 느낌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움직이는 모양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을 보기 위해 느낌을 찾으면 생각에 빠지고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5) 수행 중 나타나는 장애를 법으로 알아차리기

수행을 하면 장애는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 장애를 없애려하거나 장애를 따라가면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이들을 나타날만해서 나타난 자연스런 법으로 알아차리고, 다시 현재의 주 대상으로 돌아와 알아차림을 이어갑니다.

6) 수행 중 가끔 마음과 몸의 자세를 알아차리기

이따금씩 ‘지금 몸의 자세는 바른가?’ 하고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등으로 현재 자신의 몸의 자세와 마음자세를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알아차림을 놓쳤다가도 다시 알아차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잘하려는 마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수행을 잘하려는 마음은 몸과 마음을 긴장시킵니다. 이런 긴장은 마음을 들뜨게 해서 알아차림을 할 수 없게 합니다. 그냥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하고, 지금 나타난 것은 무엇이나 다 법으로 알아차린다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점점 더 많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1. 좌선

 

좌선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몸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립니다. 주로 들숨 날숨에 의한 현상들을 알아차리지만, 가려움, 통증, 망상, 졸음, 싫증, 의심 등도 나타나면 그것도 모두 알아차립니다. 좌선은 여기저기로 방황하는 마음을 몸이라는 기둥에 알아차림이라는 끈으로 묶어서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만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불러서 몸에 붙이는 작업입니다.

 

좌선을 시작할 때

 

1) 바른 자세로 앉습니다.

몸의 긴장을 다 풀고 편안하면서도 바른 자세로 앉으십시오. 턱을 약간만 아래로 당기고, 허리는 편안하게 펴십시오. 손은 무릎 위에 편하게 올려놓고, 발은 반가부좌를 하거나 두 발을 나란히 바닥에 놓는 평좌를 하십시오. 한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을 만큼 부담 없는 편안한 자세로 앉으십시오.

 

2)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바라고 있는가, 하기 싫은가, 졸리는가, 들떠있는가, 의심 하는가 등을 알아차리십시오. 이것은 현재의 마음상태나 기분을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때 어떤 마음이 있든지 그냥 ‘그런 마음이 있네!’하고 알아차리십시오. 아무 마음도 느껴지지 않을 때는 ‘아무 마음도 없네!’라고 알아차리십시오.

 

3) 몸의 느낌을 직접 알아차리며 내려갑니다.

먼저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이어서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자, 먼저 눈꺼풀이 있는 것을 아십시오. 눈꺼풀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느낌입니다. 이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눈꺼풀이 서로 닿아있는 것을 느끼십시오. 점차 닿아있는 부위에서 따스함, 가벼움, 무거움, 떨림, 빛 등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중 지금 경험하는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얼마동안 그 느낌의 변화를 주시하십시오.

 

이제 입술로 갑니다. 입술이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이제 입술에 있는 따뜻함, 촉촉함, 떨림 등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 변화를 보십시오. 또 느낌이 변하는 것을 얼마동안 주시하십시오.

 

다음은 손으로 갑니다. 손이 어딘가에 닿아있습니다. 그곳에 마음을 두고 손의 모양이나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따뜻함, 쑤심, 진동 등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 느낌의 변화를 얼마동안 주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엉덩이로 갑니다. 엉덩이가 방석에 닿아있는 것을 아십시오. 그리고 닿아있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무거움, 단단함, 떨림 등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지금 느끼는 감각을 대상으로 그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얼마동안 그 느낌의 변화를 주시하십시오.

 

4) 현재를 알아차립니다.

현재 이 순간을 지켜보십시오. 현재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현재는 소리를 듣는 마음, 호흡을 느끼는 마음, 피부의 감촉을 느끼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근심 걱정하는 마음, 때로는 편안한 마음이 지나갑니다. 얼마동안 이런 마음의 흐름을 주시하십시오. 이것은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보는 심념처 수행입니다.

 

5) 몸의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다시 몸으로 돌아와 앉아있는 자세를 전체적으로 크게 느껴봅니다. 가만히 몸 전체의 느낌을 주시합니다. 몸의 어디선가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호흡으로 일어나는 풍대의 작용입니다.

 

호흡은 코, 가슴, 배, 몸의 일부에서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그 중 가장 잘 느껴지는 곳 하나를 선택해서 그 자리에서 호흡을 알아차리십시오. 호흡은 자연스런 호흡을 해야 합니다. 복식 호흡이나 단전호흡으로 호흡을 일부러 만들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호흡의 움직임 중에서 ‘일어남' 하나만을 알아차리다가 어느 정도 대상에 마음이 잘 집중되면 이제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십시오. 좀 더 집중이 되면 일어남, 꺼짐, 쉼까지 알아차리십시오.

 

처음에는 호흡의 모양을 알아차리면 마음이 집중되면서 점차 팽창 수축의 느낌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 느낌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알아차림을 이어갑니다.

 

6) 수행 중 나타나는 장애를 알아차립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중에 마음은 어느덧 망상, 통증, 졸음, 싫증, 의심에 빠집니다. 이런 장애들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장애를 없애려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리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서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십시오.

 

7) 좌선 중에 이따금씩 몸의 자세를 살펴봅니다.

좌선 중에 ‘지금 몸의 자세는 바른가?’하고 몸의 자세를 알아차립니다. 만일 몸에 힘이 들어가 있거나 반듯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반듯하게 고쳐줍니다. 그러면 다시 몸의 긴장이 풀어지며 알아차림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또 이따금씩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현재를 알아차려보십시오. 만일 알아차림을 놓치고 생각에 빠졌으면 ‘생각하고 있네!’ 라고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돌아와 다시 알아차림을 시작합니다. 이때 알아차림을 놓치고 생각에 빠졌다고 후회하면 다시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좌선 중에 나타난 대상은 무엇이든지 다 법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이 잘되길 바라거나 장애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무엇이든 나타나는 대로 모두 법으로 받아들여 알아차리십시오.

 

 

2. 경행

 

우리는 하루에 많은 시간을 움직이는데, 경행은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경행의 알아차림은 일상생활에서 가고, 서고, 눕고, 구부리고, 돌고, 허리를 펴고 등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게 합니다.

 

일상에서 어디를 갈 때 마음이 몸의 움직임에 있지 않고 대부분 목적지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고 근심걱정을 합니다. 이것은 알아차림이 없는 것으로 번뇌의 마음상태입니다. 그러나 경행을 하여 알아차림이 숙달되면, 생활 속에서도 항상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깨어있는 상태가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는 좌선과 경행을 같은 비율로 합니다. 좌선과 경행을 교대로 하는 것은 움직일 때나 움직이지 않을 때나 모두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비밀은 경행에 있다고 할 만큼 중요합니다. 경행은 움직임의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므로 찰나를 보는 힘을 길러줍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좌선과 경행을 같은 비율로 했다고 합니다. 수행자들이 건강을 위한 특별한 다른 운동은 하지 않고, 오직 경행으로 다리의 근력을 키우고, 소화를 돕고, 혈액순환을 돕고, 체력을 길렀으며, 탁발이나 전법여행을 할 때도 경행을 하면서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했습니다. 그만큼 경행은 좌선과 함께 실천해야할 중요한 수행입니다.

 

경행하는 방법

 

경행도 좌선과 마찬가지로 단계적으로 하는데, 처음에는 알기 쉬운 것부터 가볍게 알아차리다가 점차 자세하게 알아차립니다. 경행의 순서는 서고, 가고, 서고, 돌고, 가고를 반복하면서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1) 수행자는 먼저 왕복할 수 있는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서 몸의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정면을 향하여 섭니다. 몸의 긴장을 풀고, 두 손을 모아서 앞으로 잡거나 뒤로 잡습니다.

 

2) 경행을 하려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바라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 들뜬 마음, 아무 것도 없는 마음 등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3) 현재 서 있는 자세에서 얼굴, 어깨, 손, 종아리, 발바닥의 느낌을 직접 알아차리면서 죽 내려갑니다. 마음이 발까지 내려오면 발이 바닥에 닿은 것을 알아차립니다.

 

4) 이제 한발 한발 걸으면서 발바닥이 닿는 것만 알아차립니다.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하고, 앞으로 갈 때는 반듯하게 일직선으로 걷습니다. 그다음 단계로 발뒤꿈치가 들리는 것부터 알아차려 발을 들어서 놓는 것까지 다 알아차립니다. 그 다음 단계로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알아차립니다.

 

5) 끝에 가면 반드시 서서, 서있는 몸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어깨의 긴장을 알아차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6) 정면을 향해 돌면서 몸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돌 때는 천천히 돌면서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거나, 혹은 어깨에 마음을 두고 어깨가 크게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다시 서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가려는 의도에 의해 발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7) 경행을 할 때 처음에는 발의 움직이는 모양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다가 점차 무겁고 가볍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잡히면 그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이어서 그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또 경행 중에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망상이라고 가볍게 알아차리고 다시 발의 움직임으로 돌아와 알아차림을 이어갑니다.

 

8) 눈은 좌우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서너 걸음 앞의 바닥을 봅니다. 처음에는 약간 빨리 걷다가 차츰 적당한 속도를 유지합니다. 경행을 할 때 지나치게 천천히 걸으면 몸이 긴장되어 알아차림을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적당한 속도로 걸으면서 계속 발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9) 길이나 운동장에서 빠르게 걸을 때에는 발이 닿는 것만 알아차리거나, 몸의 움직임을 전체적으로 크게 주시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다가 전면에서 발의 움직임이 나타나면 그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설명은 이론이고, 실제로는 자신이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 또 알아차려지는 만큼 알아차리게 됩니다. 수행자가 많은 대상을 완벽하게 다 알아차리려고 힘을 주면 안 됩니다. 완벽하게 보려는 마음이 몸을 긴장시키고 마음을 들뜨게 해서 마음이 몸에 붙어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아차려지는 만큼만 꾸준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잘 하는 것입니다.

 

 

3. 와선(臥禪)

 

와선은 누운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인데, 주로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또는 저녁에 잠을 잘 때, 누운 채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알아차리는 것은 그날 하루를 정리하는 것이며, 이런 알아차림을 통해 숙면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우면 몸이 최대한으로 이완되기 때문에 호흡이 잘 나타나서 호흡을 보기가 쉽고, 또한 자려고 누웠을 때는 다른 할일이 없기 때문에 몸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좋습니다.

 

이렇게 매일 잠들기 전 정신이 혼미해질 때 알아차림을 하면 죽을 때도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에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으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재생연결식이 깨어있어 지혜롭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상태와 같은 파장의 몸과 마음이 생기므로 그 삶은 지혜와 함께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와선에서 생긴 알아차림은 다음 생의 질을 결정하는 원인이 됩니다.

 

와선하는 방법

1) 아침에 일어날 때 알아차리기

① 누운 자리에서 잠을 깬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② 누운 상태에서 일어남, 꺼짐의 호흡을 얼마간 알아차리다가 천천히 일어나면서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을 보면 편안하거나, 들떠있든가, 어떤 걱정을 합니다. 이때 그 마음을 보아주고 잠깐이라도 호흡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은 사라지고 다시 청정한 마음이 됩니다. 하루의 시작을 알아차림으로 출발하면 그 좋은 파장이 하루를 좋게 이끌어 갑니다.

 

2) 저녁에 자기 전에 알아차리기

① 잠자리에 누운 상태로 잠을 청하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② 침대에 닿아있는 몸의 부분 부분을 알아차려 내려갑니다.

③ 그 다음 얼굴, 목, 가슴, 배를 알아차리다가 배에서 호흡이 잡히면 배의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리다가 자연스럽게 잠이 듭니다.

 

와선을 하면 금방 잠이 드는데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잠이 들면 숙면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잠들기 전 알아차림으로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잠들었기 때문에 악몽을 꾸거나 선잠을 자지 않습니다.

 

만일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잠을 못자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앉아서 좌선을 합니다. 좌선을 하다가 졸음이 오면 자연스럽게 누우면 됩니다. 불면증이 있을 때 잠이 못잘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자꾸 여러 생각을 일으켜서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불면증일 때는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 다음 호흡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낮 동안에 알아차림이 잘 이어져 의식이 명료하게 깨어있었으면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계속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때는 아침까지 와선을 하면 좋습니다. 이 경우 잠을 자지 않았어도 모든 피로가 풀려있기 때문에 가볍고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밤새 깨끗한 마음의 작용인 알아차림을 했기 때문에 몸도 깨끗한 상태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4.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

 

1) 일상생활이 모두 수행할 기회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하루 15시간 이상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활동하는 자신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면 수행이 빠르게 발전합니다. 다행히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릴 대상이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므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알아차림이 가능합니다. 알아차림에는 돈이나 시간이 들지 않고, 단지 알아차리겠다는 의지와 실천만 필요합니다.

 

수행자에게 일상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활 속에서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되도록 많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차립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도 무슨 마음으로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행동합니다. 일상생활은 대상에 휘둘려 알아차림을 놓치기가 쉽기 때문에 더욱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일상에서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알아차리면서 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 행동을 하는지, 무슨 마음으로 하는지,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아는 지혜가 뒤따라옵니다.

 

알아차림을 많이 한 사람은 지혜의 힘이 좋아져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선업이 됩니다. 그래서 아직 위빠사나의 지혜가 높지 않아도 스스로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게 되고, 나쁜 말을 하지 않게 되고, 나쁜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계를 어길 정도의 불선업을 짓지 않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려 이익이 되는 생각은 하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항상 마음이 먼저 생각을 하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을 알아차리면 그 일이 옳은가 그른가를 알아서 적절하게 행동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행위를 알아차리기

 

아침에 잠에서 깨면 먼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어서 호흡을 몇 번이라도 알아차린 뒤에 일어납니다. 이때 몸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방문을 열고 닫는 것, 화장실에 가는 것, 세면장에서 양치질과 세수를 하는 것, 목욕을 하는 것 등을 모두 알아차립니다. 또한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주위를 둘러보거나 할 때 알아차립니다.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거나, 침묵하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대소변을 볼 때까지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매순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려야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때 ‘지금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현재로 돌아와서 알아차림을 다시 시작합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든지 일하는 현장에 마음을 두면 됩니다. 저녁에 잠을 잘 때도 아침에 일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호흡을 주시하면서 잠을 자야 합니다.

 

 

4)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는 대부분 탐심을 가지고 먹습니다. 그래서 먹을 때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 ‘탐욕으로 먹는가’, ‘성급하게 먹는가’, 아니면 ‘편안한 마음으로 먹는가’를 알아차린 뒤에, 만일 탐심이나 성급한 마음이 있다면 일단 먹는 것을 중지하고 그 마음이 가라앉을 때 까지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다시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를 알아차려서 탐심이나 급한 마음이 사라졌을 때 먹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탐욕을 먹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지금 무슨 마음인가?’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린 뒤 다시 음식을 뜨는 것을 알고, 수저를 들 때 그것을 알고, 입에 넣을 때 넣는 것을 알면서 먹습니다. 그리고 씹고 난 후에 음식을 삼키는 것까지 모두 알아차립니다.

 

꼭 식사 시간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음식을 보았을 때, 과자를 먹을 때, 그럴 때마다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때마다 ‘성급한 마음이 있는가!’, ‘탐심이 있는가!’, ‘배가 부른데도 많이 먹으려고 하는가!’ 등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먹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힘은 약하고 탐심은 아주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을 알아차려서 급한 마음이 없어지고 편안해졌을 때 먹어야 알아차리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에 마음을 두지 말고 자신의 눈과 코와 혀에 마음을 두고 먹어야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여러 반찬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자꾸 탐심이 일어나서 급하게 먹게 됩니다. 젓가락을 들고 이것저것을 탐색하며, 음식을 흘리고, 몇 번 씹지도 않고 급하게 삼키거나, 아직 삼키지도 않았는데 다시 음식을 입에 넣기도 합니다. 또한 남의 몫까지 먹습니다. 이 모두가 탐심을 가지고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탐심을 먹기 때문에 탐심은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음식은 탐욕으로 먹지 말아야 하고, 또한 음식을 이름으로 먹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닭고기, 돼지고기, 과일 등 음식의 모양이나 이름에 빠져 먹지 말고, 그 음식의 고유한 맛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의 모양이나 이름은 관념이고 음식의 맛은 실재입니다. 음식의 이름은 변하지 않지만 그 맛은 순간마다 변합니다. 만일 고급요리라는 모양에 빠지면 알아차림을 놓치고 과식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맛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각각의 고유한 맛이 있으므로 수행자는 음식의 고유한 맛을 알아차리고, 그 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냐 싫어하는 음식이냐에 따라 탐심과 성냄이 일어나는데, 그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먹어야합니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면 좋거나 싫거나 하는 마음 없이 차분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을 하면서 먹게 되고, 적당히 알맞게 먹게 될 것입니다.

 

 

5) 낮에 활동하면서 알아차리기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자신의 발걸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생각하면 생각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발걸음을 알아차립니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립니다. 또한 다른 직원들의 언행에 대해서 시비 분별하는 자신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어, 직장에서 가장 바르고 적절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실수가 적어지고, 일의 능률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없다면 매순간 일어난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속아서 자신도 모르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없는 순간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도 많아집니다.

 

그 외에도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모든 행위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때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과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현재를 알아차리는 노력으로 하루 종일 업무와 수행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명상원에서 좌선이나 경행으로 알아차림이 숙달되면, 일상에서 알아차림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알아차림이 이어지는 수행자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이 힘이 수행자를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자주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어, 실제로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려야한다고 생각만 하고, 실제 알아차리는 행위가 없다면 이는 망상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이때라도 생각을 알아차리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 알아차리면 다시 위빠사나 수행이 시작됩니다.

 

 

6) 일상의 알아차림이 주는 이익

 

수행자가 일상에서 모든 행위를 알아차림과 함께하면 번뇌가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안정된 마음은 정신과 물질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품을 보게 합니다. 이처럼 일상에서 항상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 주의를 집중해서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것은 바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팔정도를 닦아가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수행자를 언젠가는 불사不死의 문,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7) 일상의 알아차림은 분명한 앎과 함께

 

일상의 알아차림은 대념처경의 분명한 앎을 닦는 것입니다. 대념처경의 분명한 앎 편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돌아갈 때나,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나,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팔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대가사와 다른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대 소변을 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가고, 서고, 앉을 때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도, 말하거나 침묵하고 있을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분명한 앎은 일상의 행위에 대한 네 가지 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첫째, 지금 자신의 이 행위가 이익이 있는가?

둘째, 지금 자신의 이 행위가 시기 상황이 적절한가?

셋째, 지금 대상이 적절한가? 지금 적절한 수행 주제를 지니고 있는가?

넷째, 지금 대상을 어리석지 않게 보는가? 대상을 나와 연관시켜보는가? 대상을 무상, 고, 무아의 측면에서 보는가?

이것이 네 가지 분명한 앎입니다.

 

결국 수행자가 현재 자신의 행위를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림을 이어가면 거기에는 분명한 앎이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행위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正念과 분명한 앎正知 새의 양 날개처럼 함께 있습니다.


! 퍼온 글임 !


1차 원문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링크 사라짐)


2차 펌 소스 : 제따와나 다음카페 (http://cafe.daum.net/jetavana/MnOz/87)




출처 :  http://beyondblue.egloos.com/429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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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성모정신과

<시애틀 쎄알트 대추장의 연설문>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부족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우리는 왜 이곳에 왔는가? 연어떼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올해의 첫 연어떼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연어는 우리의 주된 식량이기 때문에

 

연어떼가 일찌감치 큰 무리를 지어 강의 위쪽으로 거슬러오는 걸 보는 일만큼 우리에게 즐거운 건 없다.

 

그 숫자를 보고서 우리는 다가오는 겨울에 식량이 풍부할 것인가를 미리 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기쁜 까닭은 그 때문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어떼가 햇살에 반짝이며 춤추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이 우리를 찾아올 것을 짐작한다.

 

우리가 무리를 이루어 몰려왔다고 해서 전투를 벌이려고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 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연어 떼를 바라보며 다가올 겨울의 행복을 짐작하는 우리만큼 행복한 것인가?

 

워싱턴의 대추장(미국대통령 피어스를 말함)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냈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그의 부족은 숫자가 많다. 그들은 초원을 뒤덮은 풀과 같다. 하지만 나의 부족은 적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에 드문드문 서 있는 들판의 나무들과 같다.

 

백인 대추장은 우리의 땅을 사고 싶다는 제의를 하며 우리에게는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따사로움을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인디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인디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들은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백인들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들은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인디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인디언은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연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인디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인디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신령스러운 기운을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들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대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들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이 온 이후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 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나날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 가는 존재이다.

 

자기네 하나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인디언에게나 백인에게나 똑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인디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그대들은 불태워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들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풀이 우거진 언덕이 말하는 쇠줄(전화선)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숲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인디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연어떼를 보았으니 이제 나와 나의 부족은 행복한 얼굴로 돌아간다.

 

어쩌면 또 한 번의 행복한 겨울은 짐작에 그칠 뿐,

 

나의 부족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꿈인지 모른다.

 

당신들 백인들에게 밀려,

 

살아남기 위해 고통 받아야 할 막막한 겨울 들판으로 뿔뿔이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본 연어떼의 반짝이는 춤을 나의 부족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내 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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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성모정신과

반야심경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해석

 


초기불교의 《아함경》에서는 일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5온에 대하여 설할 때, 5온의 각각이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며 고()이고 공()이라고 설하고 있다.(《잡아합경》 제3, 61경 〈분별경(分別經)〉 참조)

여기서의 공은 '무상하다' 정도의 의미를 갖는 아공(我空)을 뜻한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4법인에 있는 제행, 제법, 일체는 오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오온을 현대어로 대체하면 생각, 감정, 오감이 된다.


 

초기불교 4법인의 해석

  • 일체개고 一切皆苦 오온은 무상하여 항상 변하기 때문에 모두 괴로움()이므로 버려야 한다.

  • 제행무상 諸行無常 오온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으므로 버려야 한다.

  • 제법무아 諸法無我 - 오온에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으므로(참나가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

  • 열반적정 涅槃寂靜 오온을 버린 열반(참나)은 고요하고 편안하다.

 

오온이 참나()의 작용이므로 청정하여 영원히 버릴 수 없다고 인식하는 대승불교에서의 공은 법공(法空)으로, 여기서의 공은 '참나의 작용'을 뜻한다.

 

대승불교 4법인의 해석

  • 진속불이 眞俗不二 참나에서 보면 절대계와 현상계는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으므로 오온도 영원하다.

  • 자타일여 自他一如 참나에서 보면 나와 남은 하나로 존재한다.

  • 무주열반 無住涅槃 대승보살은 열반에 집착하지 않는다.

  • 요익중생 饒益衆生 대승보살은 모든 중생에게 도움이 되도록 6바라밀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위와 같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차이를 염두에 두고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인 반야심경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반야 바라밀을 통해 오온이 모두 참나()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게 됨

  • 참나는 텅 비어 고요하지만 신령스럽게 알아채는(공적영지空寂靈智) 자리이므로 대승불교에서는 이의 작용을 공이라고 한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게 행할 때, 오온(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모두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觀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密多時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

 

2. 오온은 참나의 나툼이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 않다. 즉 참나가 바다라면 오온은 파도와 같기 때문에 서로 분리할 수가 없다.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아니하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수와 상과 행과 식도 모두 이와 같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舍利子色不異空空不異色色卽是空空卽是色受想行識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의 뜻


  • 수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수와 다르지 아니하며, 수가 곧 공이고 공이 곧 수이다.

  • 상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상과 다르지 아니하며, 상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상이다.

  • 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행과 다르지 아니하며, 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행이다.

  • 식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식과 다르지 아니하며, 식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식이다.

 

3. 모든 법은 참나의 작용이기 때문에 오온은 청정하며 영원히 지속된다.

 

사리자여, 모든 법(오온)이 공의 형상이기 때문에 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舍利子是諸法空相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不減)

 

4. 참나 안에서는 버려야 할 오온이 존재하지 않는다.(오온도 청정하다)

 

그래서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와 상과 행과 식(이상 오온)도 없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空中無色無受想行識)

 

5. 참나 안에서는 육근과 육경, 육식으로 만들어진 버려야 할 18계도 없다.(18계도 청정하다)

 

, , , , , 식(이상 육근)도 없고 색, 소리, , , 촉각, (이상 육경)도 없으며, 시야의 경계에서 부터 의식의 경계(이상 육식)까지도 없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耳鼻舌身意無色聲香味觸法無眼界乃至無意識界)


  • 6(六根) - 안계(眼界) · 이계(耳界) · 비계(鼻界) · 설계(舌界) · 신계(身界) · 의계(意界)

  • 6(六境) - 색계(色界) · 성계(聲界) · 향계(香界) · 미계(味界) · 촉계(觸界) · 법계(法界)

  • 6(六識) - 안식계(眼識界) · 이식계(耳識界) · 비식계(鼻識界) · 설식계(舌識界) · 신식계(身識界) · 의식계(意識界)


위의 6근과 6경과 6식으로 만들어진 18가지 계() 18계라고 한다.

 

6. 참나 안에서는 끊어야 할 12연기도 없다.

(초기 불교의 12연기에서 무명無明은 대원경지의 광명으로 바꾸고, 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원으로, 4가지 지혜로, 과 색은 여래의 마음과 여래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육입六入은 육입을 통해 중생을 돕겠다는 여래의 불가사의한 업을 짓는 것으로, 은 대상과 접촉했을 때 깨어 있음으로, 는 자비심으로, 는 무탐으로, 는 무집착으로, 는 모든 중생에게 이로운 선업만 짓는 것으로, 그 다음의 생노사生老死는 또 다른 중생을 구하기 위해 다시 윤회를 하는 것으로 항목들을 모두 바꾸면 대승보살의 긍정적인 12연기가 된다.)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이상 12연기)도 없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亦無無明盡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

 

대승보살의 4가지 지혜란?

  • 5(안이비설신) 5식은 성소작지

  • 의식인 6식은 묘관찰지

  • 에고인 7식은 평등성지

  • 참나인 8식은 대원경지

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 성소작지(成所作智) : 5(안이비설신)을 전화하여 얻어지는 지혜. 5(五官)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하는 가지가지 업을 짓는 지혜.

  • 묘관찰지(妙觀察智) : 6 의식을 전환하여 얻어지는 지혜. 제법의 모양을 신묘하게 관찰하여 정과 사를 구별하고 다른 이를 교화하여 의혹을 끊게 하는 설법단의(說法斷疑)하는 지혜

  • 평등성지(平等性智) : 7말나식(末那識)을 전환하여 얻어지는 지혜. 차별한 현상계에 있어 피차의 모양을 없애고 자타가 평등이라고 관하는 지혜.

  • 대원경지(大圓鏡智) : 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전환하여 얻어지는 지혜. 삼라만상을 그대로 나타내어 부족함이 없는 원만 명료한 지혜

 

7. 참나 안에서는 버려야 할 4성제(고집멸도苦集滅道)가 없다.(고와 집과 멸은 청정하므로 영원히 지속되며, (8정도)는 참나의 작용이다)

 

고통(), 고통의 원인인 아집과 무지(), 고와 집의 소멸(), 를 깨침(이상 4성제)도 없으며, (초기 불교의 무상정등정각에서 깨달은) 앎이 없기 때문에 얻을 것도 없으며, 얻을 바도 없기 때문에,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以無所得故)

 

8. 참나가 알려 주는 진속불이, 자타일여의 지혜를 갖게 되었으므로 대승 보살은 요익중생을 위해 무주열반에 든다.

 

(대승)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걸리는 것이 없으므로 두려움도 없어 모든 본말이 뒤집혀진 몽상을 멀리하여 (무주)열반에 든다.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故心無碍故無有恐怖遠離顚倒夢想究竟涅槃)

 

삼세의 모든 부처들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대승불교의 새로운)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를 얻는다.

삼세제불 의 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三世諸佛般若波羅密多故得阿多羅三三菩提)

 

그러므로 알지어다. 반야바라밀다는 크고 신령한 주문이요, 크고 밝은 주문이요, 가장 높은 주문이요, 비할 바 없는 주문이요,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故知般若波羅密多是大神呪是大明呪是無上呪是無等等呪)

 

모든 고통을 덜어낼 수 있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으니,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자면 곧 이러하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能除一切苦眞實不虛故說般若波羅密多呪卽說呪曰)

 

가자 가자 넘어 가자, 모두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3)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娑婆訶)

참고 자료 : 윤홍식의 반야심경과 금강경 강의 - 견성콘서트 #05

            https://www.youtube.com/watch?v=AaWn7gpszBs 

 

한문으로 만들어진 반야심경의 뜻 풀이는 많은 제약이 따르므로 반야심경에서 전하는 바른 뜻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현대판 반야심경으로 홍익학당에서 작성된 홍익보살의 길대승보살의 길로 제목만 변경하여 아래와 같이 첨부합니다.

 

대승보살의 길 현대판 반야심경

 

에고는 무상한 생각ㆍ감정ㆍ오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직시하십시오.

일체의 생각ㆍ감정ㆍ오감에 대해 "몰라!"라고 선언하십시오.

일체의 마음의 작용 이전의 '나라는 존재'로 존재하십시오.

 

'나라는 존재'는 영원합니다.

어떠한 부족함도 없는 시공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오직 알아차릴 뿐입니다.

오직 존재할 뿐입니다.

 

이제 생각ㆍ감정ㆍ오감으로 작용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생각ㆍ감정ㆍ오감이 모두 참나의 작용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생각'도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참나도 생각을 통해 현상계를 경험합니다.

 

'감정'도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참나도 감정을 통해 현상계를 경험합니다.

 

'오감'도 알아차리는 참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참나도 오감을 통해 현상계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의 작용은 모두 참나의 작용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멸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임을 느껴보십시오.

 

참나가 바다라면 마음은 파도입니다.

참나가 태양이라면 마음은 햇살입니다.

참나가 영원하면 마음도 영원합니다.

둘은 본래 하나입니다.

 

'나라는 존재감'은 영원히 우리의 내면에서 빛날 것이며, 참나가 빛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현상계에 머물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참나의 작용인 마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영원하면 우리의 세계도 영원할 것입니다.

 

찰나찰나 모습이 바뀔 뿐, 우리는 사멸하지 않고 이 현상계에 영원히 머물면서, 생각ㆍ감정ㆍ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의 생각ㆍ감정ㆍ오감은 모든 존재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선의 결을 따르면 선한 결실을 맺을 것이며, 나와 남을 모두 해롭게 하는 악의 결을 따르면 악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이 우주가 나로 인해 더욱 밝아지고 행복해지도록,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언제 어디서나 선한 작품을 지으십시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멸의 선업을 지으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출처] 홍익보살의 길 (홍익학당) 2014. 8. 7 윤홍식

 


http://blog.naver.com/ancit0/221095996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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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성모정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