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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 포퍼
    참고 자료 2013. 12. 21. 12:07

    Karl Popper 1902.07.28~1994.09.17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 철학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으나 유대인이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질 즈음에는 뉴질랜드,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영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게 된다. 나치의 잔혹한 인종차별 행위가 미친 영향은 당대 지식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엄청난 충격이였으며 포퍼는 자신도 유대인이었기에 충격을 많이 받아 그 유명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된다.


    포퍼의 열린 사회론은 쉽게 말해 전체주의를 무자비하게 비판하고 민주주의 사회를 옹호한 내용으로 플라톤, 히틀러, 그외 독재자나 독재를 옹호한 자들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닫힌 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마르크스에게도 매우 부정적이였다. 이에 대해서 한 가장 유명한 말이 만약 누군가가 20대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는 심장이 없는 자다. 만약 누군가가 20대가 지나서도 공산주의자라면 그는 뇌가 없는 자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말 때문에 한국에서는 우익 쪽이 포퍼를 참 좋아한다.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그냥 저항의 측면이 강한 20대와 현실적이면서 저항에 대해 회의적인 50대를 설명한거다.
    블라디미르 푸틴도 비슷한 말을 했다. 또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혁명에서는, 저 '공산주의자' 이야기가 '무정부주의자'로 
    바뀌어서 주인공 쥘리 팽송이 사랑(?)하던 철학 선생의 대사로 등장한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자신의 논리적 근거는 공산주의는 반증이나 비판을 수용안하고 자신의 주장을 도그마처럼 유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포퍼는 과학철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역사주의, 전체주의등을 불같이 공격했던 것이나 열린사회를 옹호할 때의 포스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과학철학자로서의 이미지가 흐릿해져서 그렇지 포퍼는 본래 과학철학을 본업으로 삼던 사람이다.) 가장 대표적인게 바로 반증주의. 즉 모든 과학적 주장은 반증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반증 불가능한 이론은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이에 대비되는 이론이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학혁명)이다. 새로운 과학 정신은 과거의 학설을 반증하거나 축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학설과 단절된 상태에서 등장한다는 것.
    또한 반증가능한 이론중에서도 반증가능성이 높은 이론(일반적으로 보다 보편적인 이론)이 반증가능성이 낮은 이론(일반적으로 보다 특수한 이론)보다 좋다고 보았다. 사실 이는 과거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에 많은 유사점을 볼 수 있다.


    한편 포퍼는 자신의 과학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이론들을 비판하였는데, 포퍼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그 예측의 언명이 모호하며(일례로 공산주의 혁명의 발생 시기를 보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공산주의 혁명이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언젠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언제는 언제인가? 1년 후인가, 10년후 인가, 수 세기 후인가? 이러한 시기의 모호성은 마르크스이론이 가져야 할 반증의 시기를 끊임없이 유예시켜 줄 수 있다.), 때문에 이론에 반하는 현상에 유연하게 대처 할 수 있기에 반증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회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벗어나거나, 공산주의 운동이 실패 할 때마다 혹은 현황이 바뀔 때마다 그러한 유연성에 기반하여 각종 보조가설이나 ad hoc 등으로 이론의 수명을 연장시켰으며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포퍼에 의하면 이와같이 마르크스의 이론은 틀릴 확률이(반증될 확률이) 무척 낮은 이론이고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인 것이다. 
    앞 문단에서처럼 포퍼는 틀릴 확률이 높은 이론(반증되기 쉬운 이론)이야말로 좋은 이론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나쁘거나 비과학적인 이론이다.


    열린사회론과 반증주의는 큰 영향을 끼쳤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많았고 포퍼 자신도 논쟁을 피하지 않는 편이라 수많은 학자들과  토론과 대결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토론 중 포퍼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 중 하나가 1946년에 비트겐슈타인과 벌였던 이른바 '부지깽이 논쟁'. 포퍼는 당시 최고의 석학 중 하나로 평가받던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적수로 여겨 오래 전부터 그와 대결하기를 꿈꾸었다고 하는데, 1946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이 회장으로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 도덕 과학 클럽에 포퍼가 세미나 발표자로 초청이 되어 실현할 기회가 생겼다. 포퍼의 진술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가 실재한다'는 포퍼와 '철학적 문제란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도중 비트겐슈타인이 분에 못이겨 시뻘건 부지깽이를 들어 포퍼에게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다 버트런드 러셀의 제지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이 도망치듯 강연장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논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스캔들에 가까운 모양새인데, 정작 당시의 정황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한 당시 참석자들의 진술들이 워낙 엇갈리기 때문. 또한 이때의 '승리'를 자랑으로 여겨 자신의 저작에서 여러 차례 이 사건을 언급했던 포퍼와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포퍼에 대한 언급 자체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당시 인지도가 좀 떨어지던 포퍼를 비트겐슈타인이 듣보잡 취급했다는 것이 정설이다.이때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다른 사람들 모르게) 자신의 후기 철학에 몰두해 있었다. 포퍼가 당시 표적으로 삼은 건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철학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비트겐슈타인이 열폭해서 지팡이로 포퍼를 때렸다고 표현해 놓은 매체가 많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위의 저 20대 공산주의 발언때문에 재벌경제 옹호자들(대표적으로 송병락)이나 또는 월간조선 같은 잡지에서 자주 인용되어 반공우파로 인식되어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있지만, 이 양반은 공산주의만큼이나 우파 전체주의나 권위주의도 깠다. 
    히틀러를 피해 망명한 것을 보면...하이에크..
    언론에 의해 크게 이념과 이미지가 왜곡되어 읽히는 사상가다.
    하이에크는 그의 사상으로 잘 알려진 자유방임만큼이나 공정경쟁을 대단히 중시했는데, 한국의 주류경제학계와 재벌, 보수언론들은 후자는 싹 빼버리고 전자만 강조해서 전체적으로 하이에크가 재벌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그가 되어버렸다.
    하이에크 기준으로는 한국 보수는 좌파, 사회주의자로 분류된다. 이는 한국에서 좌파, 우파 기준이 국가 주도로 경제 성장 vs 부의 분배인데 반해서 서양 우파, 좌파 기준이 개인의 자유 vs 중앙으로 권력 집중(국가의 의한 부의 분배, 국가 주도 국책사업등등이 여기 다 포함)으로 한국 좌파, 우파를 둘 다 싸그리 좌파항목으로 집어 넣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이나 일본 보수는 파시스트나 국가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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