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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중엄
    참고 자료 2013. 11. 20. 17:02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범중엄

    천하를 걱정하고 중원에 지혜를 전파하다

    [ 范仲淹 ]


    "천하의 근심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 이 말은 북송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군사가, 탁월한 문학가이자 교육가인 범중엄이 천고의 명작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남긴 명언이다. 이 구절은 '중국정신'의 일부가 되어 중국 문명의 찬란히 빛나는 보배와 같은 정신유산으로 남아 있다는 평을 듣는다. 주희는 범중엄을 유사이래 천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범중엄

    명재상의 표상으로 평가받는 범중엄의 개혁정치는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대세는 그 어떤 모략으로도 거스를 수 없었다.

    큰 뜻을 품고 부지런히 공부하다

    범중엄은 자가 희문(希文)에 소주 오현(지금의 강소성 오현) 사람이다. 송 태종 단공 2년인 989년에 태어나 황후 4년인 1052년에 죽었다. 그는 당 왕조에서 재상을 지낸 두이빙(杜履冰)의 후손이고, 아버지 범용(范墉)은 영무군 절도사 밑에서 서기를 지낸 적이 있다. 범중엄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지냈다. 집안이 힘들고 구차했지만 범중엄은 소년 시절부터 가슴에 큰 뜻을 품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공부했다. 그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예천사라는 절의 승방에 기거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읽었다.

    게으름 피지 않고 힘겹게 공부하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그는 매일 저녁 두 홉의 조로 죽을 끓여놓고 다음날 칼로 4등분하여 아침저녁으로 각각 두 덩이씩 먹었다고 한다. 여기에 식초에 절인 생선을 조금 곁들여 먹고는 다시 공부를 계속했다. 이렇게 밤낮 없이 쉬지 않고 힘들게 공부했는데, 겨울에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 때면 얼음물로 얼굴을 씻어가며 자신을 격려했다.

    예천사에 소장되어 있는 책으로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자 그는 걸어서 당시 꽤 유명한 천부서원까지 왔다고 한다. 범중엄은 천부서원의 학습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을 쉬지 않고 공부했다. 이른 새벽에는 검술을 연마하고 밤이면 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남들은 꽃구경할 때 그는 유가경전인 육경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한번은 송 황제 진종의 행차가 부근을 지나게 되어 모두들 구경간다고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범중엄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글을 읽었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 한 명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어떡하냐며 나무라자 그는 오히려 "나중에 뵈도 늦지 않을 것이야!"라고 말해 그 친구의 말문을 닫았다. 어떤 사람이 1년 내내 죽만 먹고 힘들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는 맛있는 음식을 갖다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먹지 않아 음식이 상하면 사람들이 욕할 것이라고 하자 그는 깊이 인사를 하며 감사의 말을 건넨 다음 차분하게 "저는 죽 먹고 생활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단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 나중에 고생을 견디지 못할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공부는 사람을 고생시키지 않는다.' 몇 년 뒤, 유가경전에 대한 범중엄의 실력은 무르익었다. 대중상부 7년인 1014년 가을과 이듬해 봄, 그는 과거를 통과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40년 가까운 그의 정치 생애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숭정전 어전시험에서 그는 5년 만에 진종 황제의 용안을 직접 보게 되었다.

    백성을 위한 제방공사와 교육사업

    천희 5년인 1021년 범중엄은 태주 해릉 서계진(지금의 강소성 동태현 부근)에 있는 염창(소금창고)의 감독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이 지역의 방조제가 진작에 무너지는 바람에 방패막이가 없어 염전에서 소금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바닷물이 논과 밭으로 스며들어 농사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할 때는 바닷물이 태주성 아래까지 차오를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해마다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관청은 관청대로 부진한 소금생산과 고르지 못한 세금징수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이에 범중엄은 강회조운 장윤에게 글을 올려 이 같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통주·태주·초주·해주 연해에다 단단한 제방을 새로 쌓자고 건의했다. 장윤은 흔쾌히 이 방대한 공사를 허락했으며, 조정에서는 범중엄을 흥화현 현령으로 임명하여 제방공사를 전체적으로 책임지도록 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만 명의 인부들이 눈을 동반한 폭풍과 해일을 만나 그 중 백 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좌절을 눈앞에 두고 일부 관리들은 이를 하늘의 뜻으로 돌리며 이 사업을 처음부터 다시 논의하는 한편 공사를 중단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은 서울까지 전해졌고 조정 대신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범중엄은 이런 위기상황에서도 전혀 두려움 없이 태연했다. 일부 관원들은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고, 병사와 민부들이 놀라 흩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범중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굳건한 태도 때문에 관리들은 점차 심리적 평온을 찾았고,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얼마 뒤 수십 리에 이르는 긴 제방이 완성되었다. 염장과 논밭의 생산 및 백성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이 이로써 보호받기에 이르렀다.

    아부하지 않으며, 직언 때문에 세 차례 귀양가다

    일찍이 범중엄이 모친상으로 복상하는 동안 안수(晏殊)가 범중엄의 명성을 듣고 부학(府學)에 초청한 바 있다. 범중엄은 복상 중인데도 본분을 지키지 않고 게으름을 부리는 관리들을 도태시킬 것과 관리 선발에 신중을 기할 것, 그리고 장수들을 잘 위로할 것 등 만여 자에 달하는 글을 조정에 올리기도 했다. 복상이 끝나자 안수는 범중엄을 황실 도서의 교감과 정리를 책임지는 비각교리에 추천했다. 실제로는 황제 옆에서 각종 문서와 관련된 일을 보좌하는 자리였다.

    이로써 범중엄은 황제를 수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조정의 각종 기밀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출세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범중엄은 조정의 이런저런 내막을 알게 되자 상층사회의 험악한 정치투쟁에 대담하게 개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황제 인종이 스무 살 성년이 되었음에도 조정의 정치·군사권이 여전히 60세가 넘은 유(劉)태후 수중에 있음을 발견했다.

    어느 해 겨울 동짓날에 유태후가 인종에게 백관과 함께 전전에서 태후의 장수를 비는 고두(叩頭)의 예를 올리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범중엄이 알게 되었다. 범중엄은 집안의 예절과 나라의 예절이 서로 섞여서는 군주의 존엄을 해칠 수 있으므로 이 일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상소를 올려 이 일을 비판하고 나섰다.

    범중엄의 상소는 범중엄을 추천한 안수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서둘러 범중엄을 불러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나무랐다. 그러나 평소 안수를 존경하던 범중엄이 이번에는 한 치의 양보 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항변했다.

    "신은 당신의 추천을 받고 늘 맡은 바 일을 다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해왔습니다. 행여 저 때문에 곤란하시지나 않을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올바른 일을 가지고 당신한테 꾸지람을 들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범중엄의 말에 안수는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범중엄은 그 자리에서 다시 글을 써서 올렸다. 이번에는 더 강경했다. 유태후의 수렴청정을 즉각 중단하고 대권을 인종에게 돌려주어야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몇 차례에 걸친 범중엄의 상소에도 조정은 시종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황제의 조서를 빌려 범중엄을 서울에서 하중부 통판으로 좌천시켰다. 비각의 동료들이 성밖까지 나와서는 모두들 술잔을 높이 들고 "범군의 이번 행동은 지극히 빛나는 일이로세!"라며 송별 인사를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태일궁과 홍복원을 짓기 위해 섬서에서 목재를 징발하고 있었다. 이 일을 두고 범중엄은 이렇게 말했다.

    "소응궁과 수녕궁이 화재로 불타 하늘의 징계를 받은 것이 엊그제인데 지금 또 토목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들의 재산을 낭비하니 이는 인심과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절이나 도관을 짓는 공사를 중지하여 일 년 동안 징발하는 목재의 수량을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또 조정의 분위기와 관련하여 "은총을 받는 자들 대부분이 황궁에서 직접 칙령을 내리고 관직을 받는 것은 태평성세의 정책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3년 뒤, 유태후가 세상을 뜨자 인종은 범중엄을 서울로 불러들여 조정 일을 전문적으로 논평하는 언관 자리인 우사관에 임명했다. 이 무렵 국사를 논의하는 신료들 대부분이 유태후(장헌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범중엄은 "태후께서는 선제의 유언을 받들어 어린 폐하를 십수 년 보호해왔다. 그러니 작은 잘못 따위는 묻어둠으로써 태후의 덕과 명예가 제대로 드러나게 해야 할 것이다"라며 신료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나섰다. 인종은 범중엄의 논리에 힘을 얻어 유태후 수렴청정 당시의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당초 장헌태후는 황태비 양(楊)씨를 황태후로 삼아 국가의 정책제정과 큰 일에 참여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에 범중엄은 이렇게 말했다.

    태후란 황제 모친에 대한 호칭으로 예로부터 황제를 보호하는 데 공이 있다고 해서 황제를 대신하여 태후를 세운 경우는 없었다. 지금 태후 한 분이 세상을 떠났는데 또다시 태후를 세운다면 세상 사람들은 폐하께서 단 하루도 모후한테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의심할 것이다.

    이때 가뭄과 메뚜기 피해가 산동반도와 회하·장강 유역을 뒤덮고 있었다. 범중엄은 하루 빨리 재해 지역을 순시하여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바로 회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범중엄은 인종을 만난 자리에서 "만약 궁정에 한나절 먹는 것을 중단한다면 폐하께서는 어떡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인종은 깜짝 놀라며 깨달았다. 그러고는 바로 범중엄을 재난 지역으로 보내 백성들을 보살피도록 했다. 범중엄은 가는 곳마다 관부의 창고를 열어 재난을 당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한편 재해 구역 백성들이 분에 넘치게 제사 지내는 것을 금지했다. 아울러 조정에 요청하여 차 세금과 소금 세금 등을 면제해주도록 했다. 일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올 때는 재앙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먹는 야채를 직접 들고 와 인종과 후원의 궁인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이 당시 재상은 여이간(呂夷簡)이었는데, 그는 유태후에게 잘 보여 출세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태후가 죽자 바로 태후에 관한 좋지 않은 말을 하고 다녔다. 이러한 간사한 행동은 인종의 곽황후 귀에 들어갔고 그는 재상직에서 파면당했다. 하지만 여이간의 정치적 뿌리는 매우 깊어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재상 자리에 올랐고, 인종의 가정불화를 빌미로 자신을 파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곽황후를 폐위시키려고 했다. 그러면서 여이간은 백관들에게 이 일에 대해 일체 함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범중엄은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간관들을 이끌고 어전으로 몰려가 인종을 만나고자 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황제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게다가 사문관들이 어전의 문을 걸어 잠그고는 출입조차 막았다. 이에 범중엄 등은 동으로 된 문고리로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금속과 육중한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는 의외로 컸다. 그러면서 이들은 문을 사이에 두고 "황후의 폐위 문제를 두고 어찌 하여 간관들의 의견을 듣지 않으십니까?"라며 고함을 질렀다. 이러고도 반응이 없자 범중엄은 다음날 아침 입조하여 백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여이간과 논쟁을 벌이기로 하고 그 자리를 떴다.

    이튿날 범중엄이 시설원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강회로 유배 보내기로 결정했으니 즉각 서울을 떠나라는 조서가 낭독되고 있었다. 이번에도 전보다는 많지 않았지만 몇몇 사람이 나와 술잔을 치켜 들고는 "범군은 이번 일로 더욱 빛날 것이다!"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몇 년 뒤 범중엄은 목주에서 소주로 전근되었다. 여기서 그는 치수에 공을 세워 다시 서울로 올라와 천장각시제의 작위를 받고 이와 함께 개봉지부에 임명되었다. 그때까지 여이간은 여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이간은 뒷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사로이 자기 당파들을 마구 기용하여 조정을 더욱 부패하게 만들었다. 범중엄은 조사를 토대로 '백관도'라는 도표를 그려 1036년 인종에게 올렸다. 그는 도표를 통해 관리들의 분포상황과 승진관계 등을 지적하며 여이간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여이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되레 범중엄을 부패한 관리로 몰아 공격했다. 이에 범중엄은 잇달아 네 차례 글을 올려 여이간의 교활한 짓을 공격했고, 여이간도 더욱더 강력하게 범중엄을 몰아붙이며 군신 사이를 이간질했다.

    하지만 노회한 여이간은 군주의 위세를 이용하여 범중엄을 압도했고, 범중엄은 또다시 파면되어 유배조치를 당했고, 하마터면 영남에서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이번 귀양길에 송별 나온 사람은 더욱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직한 친구 왕질은 병든 몸에 술까지 들고 나와 "범군의 이번 행차는 더욱 빛날 걸세!"라며 친구의 앞날을 빌었다. 범중엄은 웃으면서 "이 범중엄이 벌써 세 번씩이나 빛이 났으니 다음번에는 양 한 마리를 준비하게나 제물로 쓰게"라고 말했다.

    강직하고 아부를 몰랐던 범중엄의 남다른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들이었다.

    문도무략(文韜武略), 심모원려(深謀遠慮)

    범중엄은 모략이 풍부한 군사가이자 정치가였다. 변방이 위급해지자 그는 52세의 고령으로 장수가 되어 출정하여 몸소 전선을 시찰한 다음 송나라 군대의 여러 폐단을 발견하고는 군대 체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어려운 국면을 바꾸기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 범중엄이 취한 전략적 방어는 단순하거나 소극적인 방어가 결코 아니었다.

    처음 그가 연주에 부임했을 때 군대를 전면적으로 검열하여 없앨 것은 없애고 개편할 것은 개편하는 전면적 개혁을 단행한 바 있다. 그는 사병과 하급 군관 중에서 용맹한 장수를 승진 발탁했고, 해당 지역 백성들 중에서 민병을 적지 않게 선발했다. 또 군사훈련을 엄격하게 실시했는데, 계급의 높낮이에 따라 전후 작전체제를 달리 수립했으며, 적의 정세에 근거하여 기민하게 임기응변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는 또 건의를 받아들여 보루를 쌓아 방어시설을 강화했다. 그의 호령은 분명했으며 상벌 또한 명확하고 엄격했다. 병사들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귀순해온 각 부락에 대해서는 성심으로 받아들이고 신임했다.

    범중엄이 취한 이러한 조치들로 변방에는 더욱더 견고한 방어벽이 들어섰고, 이 때문에 서하(西夏) 사람들은 "범중엄 이 늙은이 가슴속에는 수만 군대가 들어 있다!"며 서로를 경계할 정도였다. 이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음은 당연했다.

    경력 3년(1043년)과 4년(1044년) 사이, 정권의 안정이 시급했던 인종은 여러 차례 범중엄에게 급히 처리해야 할 국가 대사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조정에서 물러나온 범중엄은 심사숙고한 끝에 다음 열 가지 큰일을 꼽았다.

    첫째, 관리의 승진 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할 것.
    둘째, 요행수를 억제할 것.
    셋째, 과거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할 것.
    넷째, 지방장관을 잘 선택할 것.
    다섯째, 공전(公田)을 고르게 할 것.
    여섯째, 농업과 누에치기 생산을 중시할 것.
    일곱째, 군과 장비를 잘 정돈할 것.
    여덟째, 조정의 은택과 신의를 제대로 갖출 것.
    아홉째, 조정의 명령을 신중하게 하달할 것.
    열째, 부역을 줄일 것.

    이상이 역사상 유명한 '경력신정(慶歷新政)'의 내용이다. 짧은 몇 개월 사이에 정치 국면이 확 달라졌고, 관료기구는 다듬어졌다. 가문에 의지해 관직에 나아가던 이들이 엄격하게 제한을 받았고, 경력에만 의지해 승진하던 관례를 대신해서 업적과 품격에 대한 조항이 추가되었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 과거시험에서는 실용적 답안이 갈수록 늘었다. 또 전국적으로 학교가 들어섰다.

    인종

    약해만 가는 송 왕조의 국력을 만회하기 위해 인종은 범중엄과 부필 등을 기용하여 '경력신정'이라는 개혁정치를 추진했지만 수구세력의 반발로 실패했다.

    범중엄은 여러 해에 걸친 관직생활을 통해 깊은 생각과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모략, 그리고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인종 황우 2년에 오중 지방의 농업수확이 부실하여 큰 기근이 들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범중엄은 절서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부잣집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식량을 내놓게 하는 등 재난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백성들에게 용주(龍舟) 시합을 장려하거나 절이나 도관 등을 짓는 토목공사를 일으킬 것을 권장하는 한편, 관에서도 창고 등을 짓는 공사를 일으켜 매일 수천 명의 인부를 고용했다. 누군가가 범중엄이 백성들을 아끼지 않고 힘들게 부리며 자신은 잔치나 벌이고 유람을 다닌다고 탄핵하자 전후 사정을 모르는 황제는 이 말을 믿고 그의 죄를 물었다. 이에 범중엄은 사실대로 황제에게 글을 올려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남은 재화를 찾아내서 가난한 백성들이 힘들지만 일을 통해 생계를 꾸릴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렇게 되면 관민이 다 함께 굶지 않고 얼지 않고 따뜻한 옷과 음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큰 도적으로 이름난 장해란 자가 고유 지방을 지나게 되자 고유의 군사 책임자 요중약은 병력을 따져본 결과 장해에게 도저히 대항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군내의 부호들에게 돈이며 술이며 고기 등을 내서 장해 무리를 대접하게 했다.

    이 보고를 받은 황제는 몹시 화를 냈고, 조정 대신의 한 사람인 부필은 요중약을 죽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범중엄은 "모든 군현이 작전에 임할 정도의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도 도적에게 저항하지 않고 뇌물을 먹였다면 그것은 당연히 국법에 따라 처형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고유에는 병력도 무기도 없으며, 게다가 백성들은 약간의 재물로 심각한 약탈을 막을 수 있었다며 기뻐했다. 이런 상황에서 요중약을 죽이는 것은 국법의 본뜻과 맞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인종은 요중약을 석방하게 했다.

    하지만 부필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법을 바로 집행해야 하거늘 당신은 이런저런 이유로 막고 있으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다룰 수 있겠소?"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범중엄은 개인적으로 부필을 불러 "태조 황제 이래로 경솔하게 신료들을 죽인 일이 없었고 그것은 훌륭한 선례였소. 그런데 이 좋은 관례를 함부로 파괴해서 어쩌자는 겁니까? 이 관례를 지키지 못한다면 신하들에 대한 처벌의 강도는 갈수록 엄격해질 것이고,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도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 것입니다"라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부필은 전혀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얼마 뒤 두 사람이 모두 외직으로 발령이 났고, 부필은 하북에서 조정으로 복귀하던 중 상도라는 곳에 이르러 갑자기 입성을 거부당했다. 하는 수 없이 여관에 투숙하게 된 부필은 황제의 속셈을 몰라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침상 주위를 맴맴 돌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범중엄이 선견지명이 있었구나. 참으로 성인이야!"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인물소개 범중엄

    일대 개혁가 왕안석에 앞서 송나라의 개혁을 이끌었던 범중엄은 명재상의 표상이었다. 그는 한기와 함께 서하를 막는 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흔히 '한·범 이공'으로 불리었다. 정치적으로 자신이 느낀 바를 토로한 산문인 『악양루기』에서 "먼저 천하의 근심거리를 근심하고, 천하가 태평해진 다음에 마음을 놓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겨 우국충정의 전형으로도 꼽힌다. 글도 잘 썼으며, 시는 호방하여 변방의 풍광과 정벌 전쟁에 따른 고충 등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범중엄은 평생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노력형 모략가라 할 수 있다. 그는 '공부는 사람을 고생시키지 않는다'는 믿음과 원대한 포부로 공부했으며, 그 포부는 백성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바른 말을 하다가 세 차례나 귀양가는 수난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을 격려하며 의지를 굳혔고, 동시에 나라와 백성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신의 처음 뜻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는 모략이 풍부한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다. 52세 직접 출정하여 군대의 상황을 시찰하고 그 폐단을 시정했으며, 국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열 가지 일을 올려 이른바 '경력신정'이라는 개혁정치를 실행에 옮겼다.

    범중엄의 개혁정치가 없었더라면 그를 뒤이은 왕안석의 개혁정치도 빛이 바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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