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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캐스트] 르네 데카르트참고 자료 2013. 5. 24. 09:21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2383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유럽 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면, 근대 유럽 철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각주다.” (레젝 콜라콥스키) 근대는 무엇에서든 확실하고 단단한 토대를 요구하는 시대다. 내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 내가 믿고 있는 것 등 그 어떤 것에서든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를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가 바로 근대적 합리정신이며, 데카르트는 근대의 철학적 출발점이었다.
‘세상이라는 큰 책’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던 시기
르네 데카르트는 프랑스 투렌의 소도시 라에에서 부유한 귀족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 라에는 1996년 데카르트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데카르트로 바꿨다. 데카르트가 한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열 살 무렵 라플레슈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 콜레쥬 로얄 앙리르그랑에 입학하여 8년간 고전어, 수사학, 철학, 역사, 물리 등을 공부했다. 학교 기숙사의 규칙이 매우 엄격했지만, 데카르트는 건강상의 이유로 늦잠을 잘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졸업 후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프와티에 대학에 입학했지만, 1616년 ‘세상이라는 큰 책’을 배우기 위해 대학을 떠났다.
“나는 글로 하는 공부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내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식이나, 세상이라는 큰 책에서 찾을 수 있는 지식 외에는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의 청춘을 여러 곳을 여행하고, 궁정을 방문하고, 군대에 참가하며,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보냈다. 운명이 나에게 허락하는 모든 상황에서 나 자신을 시험했다.”
이 시기 데카르트는 1618년 네덜란드 오라녜 가(家)의 나사우 백작 마우리츠의 군대에 참가했고, 1620년에는 바이에른 막시밀리안 대공의 군대 소속으로 프라하 근처 바이센베르크 전투에 참전했다. 데카르트는 병영의 막사에서 철학적 사색에 잠기곤 했다. 그런 사색이 쌓이고 깊어졌기 때문일까? 1619년 11월 10일과 11일 사이 한밤중, 독일 울름 근처 노이부르크의 병영에서 데카르트는 훗날 자신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한 꿈을 꾸었다.
첫 번째 꿈은 학교 근처를 지나다가 강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는 꿈이었다. 두 번째 꿈에서는 엄청나게 큰 소리와 함께 천둥이 치는 것을 보았다. 세 번째는, 탁자에 놓인 커다란 사전과 고대 라틴어 시집 가운데 시집을 펼쳐 이런 시구를 읽는 꿈이었다. “인생에서 나는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가?” 데카르트는 세 가지 꿈을 통해 학문과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삶의 중심이라 결론짓고, 1621년 군대를 떠나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세상이라는 더 큰 책’에서 배우는 시절의 마감이었다. 그는 1623년 고향 라에에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연금 형태로 받을 수 있게 하여 이후의 생계문제를 해결했다.
네덜란드에서 활발한 철학 저술활동 펼쳐
1628년 네덜란드로 간 데카르트는 1649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종교적, 사상적 자유가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폭넓게 보장되는 네덜란드에서 데카르트는 유트레히트, 프라네케르, 레이든, 데벤테르, 에그몬트, 산트포르트, 엔데기스트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암스테르담에서 하녀 헬레네 얀스와 관계하여 1635년 딸을 낳았지만 5살 때 세상을 떠났다. 1637년 데카르트는 프랑스어로 쓴 사실상 최초의 철학서인 [이성(理性)을 올바르게 이끌어, 여러 가지 학문에서 진리를 구하기 위한 방법의 서설], 즉 [방법서설]을 내놓았다. 1641년에는 [제1철학에 관한 여러 가지 성찰], 즉 [성찰]의 초판을 내놓았고 1644년 [철학의 원리]를 출간했다. 유명한 코기토 명제,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방법서설] 제4부와 [철학의 원리] 제1부의 7에 나온다. 데카르트는 철학 저술 외에도 우주론, 광학, 기상학, 기하학, 생리학 논저를 남겼고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서 근대 이후 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642년경부터 데카르트는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련의 저작에서 데카르트가 보여준 철학적 성찰은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신학의 기반을 뒤흔들만한 혁신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고, 네덜란드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공공연하게 데카르트를 비난했다. 1643년에는 유트레히트 대학이 데카르트 철학을 비난하고 나섰다. 마침 높은 교양을 갖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데카르트를 교사로 초빙했고, 데카르트는 이에 응해 16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갔다. 그리고 1650년 2월 11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렴이었다.
데카르트는 새벽에 잠들어 정오 가까운 시간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 여왕은 매일 이른 아침 데카르트와 만나려 했고, 이것이 데카르트의 면역 체계를 극도로 약화시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직까지 유력하지는 않지만 데카르트 독살설도 있다. 스톡홀름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자크 비오그 신부가 영성체 빵에 독극물을 발라 데카르트에게 주었다는 설이다. 신교 국가인 스웨덴이 가톨릭 국가로 바뀌기를 바랐던 비오그 신부가, 데카르트의 ‘불온한’ 사상이 스웨덴 여왕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했다는 것. 1663년 교황청은 데카르트의 저서를 금서 목록에 올렸다. 데카르트의 유해는 스톡홀름의 묘지에 묻혔다가 1666년 프랑스로 옮겨져 파리 생제르맹데프레성당에 묻혔다. 1792년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장하기 위해 묘지를 발굴한 결과 시신에는 두개골이 없었다. 두개골은 시신을 수습한 스웨덴 근위대장이 따로 보관해오다가 19세기 말 경매에 붙여져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모든 것을 의심하여, 참으로 신뢰할 수 있는 지식에 도달
첫째, 명증성의 규칙. 명증적으로 참이라 인식한 것 외에는 무엇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속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말 것. 둘째, 분해의 규칙. 검토해야 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풀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들로 나눌 것. 셋째, 종합의 규칙.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계단을 오르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을 인식하는 데에까지 이를 것. 순서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순서를 설정하여 나아갈 것. 넷째, 열거의 규칙. 아무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에서나 행할 것.
참인 것으로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얻으려면, 데카르트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탐구의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데카르트는 대상이 다르더라도 위와 같은 동일한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 가운데 첫 번째 규칙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일단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 그래서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학문의 시작이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거나 악마에게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가설까지 세워가며 의심하고 회의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나의 존재의 근거는 신(神)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이에도 내가 이렇게 의심하고 있다는 것. 내가 이렇게 의심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스스로 의식하는 나는 여기에 분명히 있다는 것. 바로 그것만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것이다. 요컨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야말로 다른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가장 기초적인 명제라 보았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와 결합시킨다.
“나는 나 자신에서 유래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것에서 유래하고, 다른 것에 의해 지탱되어야 한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내 안의 모든 것을, 적어도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크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나를 가능케 하는 자도 생각하는 존재여야 한다. 내 안에 신의 관념이 있으므로,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고 지탱해 주는 것도 신의 관념 안에 있는 모든 완전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적인 완전성을 가진 것은 신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결국 나의 사유와 존재의 확실성이 궁극적으로는 신의 존재와 신의 신실성에 의존한다고 본 것이다. 인식의 근거 및 순서 측면에서는 ‘생각하는 나’에서 출발하지만, 존재의 근거 및 순서 측면에서는 신이 먼저다. 이렇게 볼 때 데카르트를 ‘마지막 중세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이었다. 데카르트는 인식의 질서에서 근대의 철학적 주체를 확립했지만, 존재의 질서에서는 신의 존재와 우월성을 인정했다. 그는 신을 나를 창조하고 보존시키는 존재로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성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의 존재와 신의 존재를 논하는 것에 머무른다. 요컨대 신의 존재와 신실성을 다만 논리적으로 증명할 뿐이다. 이 점에서 그는 ‘신앙의 빛’보다는 ‘이성의 빛’을 높이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