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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 묵자 그리고 노자에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 by 손영식
    좋은 글 2013. 3. 11. 09:49

    공자· 묵자·그리고『노자』에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

    손 영 식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인생관이란 상당히 거창한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지, 그 시각을 말한다. 전국 시대의 제자 백가 가운데 공자, 묵자, 노자는 각각 매우 독특한 시각을 제시한다. 그것은 일견 어려운 것 같지만, 우리가 세상과 인생을 보는 유익한 시각을 보여 준다.
    1. 공자
    공자는 도덕적인 인생관을 대표한다. 도덕률은 사회를 조직하는 기본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의 생각은 인(仁) 효제(孝弟) 충서(忠恕) 정명(正名)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⑴ 인(仁)은 人+二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 혹은 사람이 짐(二)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어떤 쪽으로 보던지 다 '사랑'을 뜻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져야 한다는 것, 혹은 사랑이란 봉사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 사랑은 대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부모님께는 효, 자식에게는 자(慈), 임금에게는 충, 신하에게는 인(仁), 부부에게는 별(別), 어른에게는 서(序), 친구에게는 신(信) ... 등등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사랑을 잘 베풀면 그 모든 덕목(忠 孝 등)을 다 갖추게 된다. 즉 완벽한 인격자가 되게 된다.
    결국 공자는 사회란 인간 관계(倫, 5倫)의 그물이고, 사회란 사랑의 공간이라 본다. (증오-현실주의)
    ⑵ 효제(孝弟) - 사랑은 구체적으로 가족 사이의 사랑, 예컨대 어버이에의 사랑(孝), 형님에의 사랑(弟, 공손함)으로 드러난다. 가족 사이에서 사랑 나누기-쌓기를 실습하고, 그 마음을 확장하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가장 단단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모든 다른 사회의 모델이라 본다. 國家, 國=家. 모든 사회, 나아가 나라까지도 '집안'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종교 공동체. 가정-교회, 가부장-사제. 등등)
    가족은 이익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다. 사랑으로 뭉쳐진 공동체이다.(공동 사회, Gemein schaft) 여기에서 공자는 義의 개념을 이끌어낸다. 사랑은 '마땅히' 하는 것이지, 어떤 식의 이해타산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⑶ 충서(忠恕)와 예(禮)와 중용(中庸) - 이 사랑 베풀기는 현실적으로 보면 효제(孝弟)와 연관이 있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충서(忠恕)와 연관이 있다. "진심으로, 참된 마음(忠)으로 입장을 바꾸어 남을 헤아려 주는 것(恕; 易地思之)"이 사랑을 베푸는 논리이다.
    공자는 忠을 忠信이라고 자주 말한다. 진심(忠)으로 상대를 대해야 나에 대한 미더움(信)을 갖는다는 말이다. ('마땅히',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恕를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고, 내가 서고 싶은 자리에 남도 서게 하고,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은 남도 이루게 해 주라"고 풀이한다. 나와 남의 일대일 관계, 동일화의 작업이다. (동일율에 근거함. 탈리오의 법칙→황금율)
    『대학』 『중용』 : 유가에서는 인간이나 사회나 다 역할의 집합체이라고 본다. 君-臣-父-子 등등. 겹겹히 얽힌 인간 관계 속에서 역할이 규정되고, 그에 맞게 기능해야 한다. 이 두 논문은 이런 점에서 충서를 규정한다. "나의 자식에게서 바라는 바로 나의 부모를 섬기고..." "나의 뒷 사람에게서 바라는 바로 앞 사람을 따르고 ..." 등등. 이것은 순전히 논리적인 것이다. (忠은 동정하는 마음, 恕는 감정 이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卽自와 對自의 문제이다.)
    『맹자』는 충서를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군주가 백성을 헤아리는 것이다. 군주가 음악을 좋아하면,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백성들도 음악을 즐기게 하고... (재물, 여자 등등. 與民樂) 맹자는 '사랑의 정치'(仁政) 혹은 '백성을 위한 정치'(爲民 民本)를 주장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忠恕이며, 동시에 나라는 집안의 확장이라는 발상이다. 이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로 나타난다.
    예(禮) - 이런 형식적 논리적 측면은 구체적 현실에서는 객관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버이를 대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忠恕에 맞는가? 충서의 논리를 구체적인 현실적 규정으로 확정한 것이 바로 禮(도덕 규범)이고, 성인들이 바로 그 현실적 규정을 만든 사람들이다. (제작자로서 성인) 일반인은 그 예를 따르면 된다. 따라서 사회는 바로 '도덕 규범의 공간'이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그 많은 예를 하나 하나 기억하여 실천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공자 이래 '중용(中庸)'을 주장한다. 예(禮)란 '알맞음'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 알맞음은 충서(忠恕)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 알맞음은 "일상(庸; 平常) 혹은 상식"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물고기가 물에 살듯이, 사람은 일상-상식의 공간 속에서 산다. 그 공간은 바로 예(禮)가 실현된 공간이다. 따라서 사회-국가란 '중용의 공간' '일상-상식의 공간'이다. 일반인은 일상에 따라 살면 예(禮; 도덕 규범에 따라 살게 된다.)
    ⑷ 정명(正名) - 내가 가진 이름에 따라 나의 행실을 바로 잡는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하고..."(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는 결국 '상대에 따라 다르게 사랑을 베푸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식답게 행위한다는 것은 어버이에게 효라는 사랑를 잘 베푸는 것이다. 사랑 베풀기(仁)과 행실 바로잡기(正名)은 안팎의 관계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국가란 '역할-기능의 공간'이다.
    君君 臣臣은 A=A라는 동일율이다. 앞의 A는 현실 속의 사람, 뒤의 A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즉 현실과 이상을 분리하고, 현실 속의 개체는 이상(idea)에 맞추어 스스로를 바꾸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이다. 이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선택한 공자의 논리를 노자는 반박한다.
    2. 묵자
    묵자는 종교적인 인생관을 주장한다. 그는 땅위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를 바랬다. 묵자의 사상은 겸애(兼愛)-천지(天志)-상동(尙同)으로 요약할 수 있다.
    ⑴ 겸애(兼愛) - 묵자는 모든 사람이 서로 '조건없이' 사랑할 것을 주장했다. 이 사랑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즉 현실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다. 또한 조건이 달리지 않은 사랑(아가페)이다. (반면 유가는 도덕을 기준으로 하는 사랑이다. eros)
    이와 같은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하층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이익을 주는 사랑' '조건없는 사랑'은 바로 하층민을 위한 것이다. 힘없는 하층민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조건없는 사랑을 주장한다. 하층민은 의식주의 문제에서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이익을 주는 사랑'을 주장한다.
    묵자의 문제 의식 -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주의 문제, 그리고 강자와 약자의 겁탈, 이것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했다. 특히 강자의 겁탈을 문제 삼았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략하고, 큰 집안이 작은 집안을 짓밟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에 횡포를 부리고..."
    현실적인 이익을 주는 사랑인 겸애를 베풀기 위해서는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즉 강자가 베푸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강자는 약자를 겸애하기 보다는 겁탈을 한다. 강한 자는 더 강해지기 위해서, 약한 자는 강해지기 위해서 약자를 우격다짐으로 말아먹는다. 결국 강자가 겁탈할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생각을 약간만 바꾸어 겸애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조건달린 사랑(에로스)에 따르면, 약자들(백성들)은 사랑할 이유가 있는가? 그 더럽고 무식하고 어린 백성 어느 구석에 사랑할 가치가 있는가?
    묵자는 이 지점에서 하느님을 말한다.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것은 무조건적 사랑(아가페)이고,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라. 이 세상에서 가장 강자인 하느님을 따르고 본받으라.
    ⑵ 천지(天志)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겸애를 하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이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절대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과 매우 비슷하다.)
    신에 대한 두가지 생각 - 유일신론과 범신론 : 이는 하느님이 내 안에 있느냐, 내 밖에 있느냐, 하는 차이에서 나온다.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 즉 모든 사물 속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은 범신론(汎神論)이다. 공자 이래 유가는 범신론을 주장한다. 『맹자』는 이를 "내 마음을 다하면 본성(이성)을 알고, 이성을 알면 하느님을 알게 된다"고 한다. 문제가 된 상황에서 마음을 다해서 생각해 보라. 그러면 이성의 명령을 듣게 된다. 그 명령은 내 이성의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天命)이다. (天命之謂性) 결국 하느님은 언제나 나의 이성으로 드러나며, 나의 이성의 보증자이다. 반면 이 세상 전체를 관찰하고 다스리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어두운 운명론에 빠지게 된다. 부귀 夭壽에 신경쓰지 말고, 오직 너의 이성을 닦으라는 것이 그들의 권고이다.
    묵자는 내 밖에 하느님이 있다고 본다. 모든 사물 밖에 있는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계획(섭리)를 가지고 이 세상을 관찰하고 다스린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天志)에 따라 살면 하느님이 뒤를 밀어 주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 하느님의 징벌이 내린다. --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내 밖에 있기 때문) 하느님도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인간도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다만 그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하느님이 보증하니까. 이런 점에서 묵자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한다. 그는 하늘이 아닌 이 땅에 하느님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신론(辯神論)의 문제, 잔인한 하느님 -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⑶ 상동(尙同) - 하느님의 뜻은 어떻게 현실적으로 실행되는가. 하느님이 상과 벌을 내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묵자는 국가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본다.
    상동(尙同=上同)은 "윗 사람과 같아지라"는 것이다. 아래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결정하지 말고, 윗 사람의 판단에 맡기라. 마을의 우두머리 → 고을의 우두머리 → 지역의 우두머리 → 나라의 우두머리(군주) 순으로 위로 판단을 맡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주는? 바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라고 한다.
    이런 국가는 개인이 완전히 국가에 종속되는 전체주의적인 독재 국가이다. (현자 독재론) 이런 점에서 법가의 국가론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아래 사람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윗 사람에게 넘기는가? 그것은 아니다. 마을에서 어진 이, 즉 겸애를 가장 잘 하는 이를 뽑고, 그에게 판단권을 넘길 때 주어지는 조건은 자신들을 겸애를 하라는 것이다. 겸애와 지배권의 맞교환이다.
    이것은 일종의 계약 관계이다. 지배층의 겸애와 피지배층의 복종을 서로 바꾸는 계약이다. 자신들을 겸애할 사람을 백성들은 뽑고 지배권을 넘겼기 때문에, 지배층이 겸애를 하지 않는다면 물론 그를 바꿀 수 있다. 반면 백성들은 지배권을 넘겼기 때문에 지배에 복종해야 한다. 지배층은 그런 점에서 상벌의 권력을 갖는다.
    * 비교할 문제 - 맹자는 얼굴없는 하느님(범신론)을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군주는 하늘의 명령(天命)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반면 묵자는 유일신을 주장하지만, 군주는 백성들이 추대한다고 한다. 맹자는 지식인 관료의 철학인 반면, 묵자는 하층민을 위한 철학이기 때문.
    3. 노자
    노자의 인생관은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그는 공자나 묵자의 이상주의를 반대한다.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잔인한 모습이지, 공자가 말하는 예나 묵자가 말하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것은 아니다.
    ⑴ 대립자의 공존 논리 - 노자는 공자의 A=A라는 형식 논리(동일율)를 부정한다. 그는 반대로 A=~A라는 대립자의 공존 논리를 주장한다. (일종의 변증법적 논리이다.) 공자는 일상적 상식적 논리를 따른다. 반면 노자는 상식을 넘어서는 지혜와 통찰을 주장한다.
    이 세상은 한 면(A)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과는 반대되는 측면(~A)도 보아야 그 사건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다. "on the other hand!" 다른 손이 반드시 필요하다. 양쪽을 보는 것, 균형의 측면에서 보라. 예컨대 승리하면 반드시 패배자의 분노를 생각해야 한다. 패배하면 승리자의 헛점을 주시해야 한다. 회오리 바람은 한나절을 불지 못 하고, 소나기는 하루를 내리지 못 하기 때문이다. 세상 일은 보태서 손해가 되는 경우가 있고, 덜어서 이익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을 드러지 않기 때문에 더 드러나게 되고,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을 받는다. 뺏고 쉽거든 먼저 주라. 등등
    도덕(道德), 무명(無名) - 세상 일은 시간 속에 있다. 따라서 언제나 변화한다. 그 변화에는 길(道)이 있고, 그 길을 아는 자가 힘(德)을 가지게 된다. (노자 道德경) 길과 힘, 그것은 사건의 참된 의미를 아는 자, 대립자의 공존을 아는 자가 갖는다.
    노자의 사상의 핵심은 시간이다. 시간 속의 변화, 따라서 고정된 것은 없다. 공자는 정명(正名)을 통해서, 君-臣-父-子같은 이름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노자는 그 이름의 영원함을 부정한다.(無名; "이름을 부정함") 현재 내가 '패배자'라는 이름을 가지면, 그 이름을 부정하라. 현재의 승리자, 그건 현재일 뿐이다. 그 승리는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가? 이는 승리자의 헛점을 보는 것, 다른 손을 갖는 것, 대립자의 공존을 보는 것이다.
    ⑵ 노자에게 시간이란 '영원히 현재' 밖에 없다. 시간은 햇빛처럼 모든 것을 바래게 만든다. ① 시간(역사)는 한쪽으로만 열려 있다. 미래로만 흐른다. ② 과거(過去)는 말 그대로 흘러서 지나간 것이므로 없다. 미래(未來)도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이므로 물론 없다. 오직 현재만 있다. 그것도 끝없이 이어지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③ 이 현재를 이루는 것은 과거의 일이며, 미래에 대한 예측(설계, 도모, 시도)이다. 과거의 일이 원인이 되어 현재를 만들며, 미래를 내다보며 기획한 것이 또한 현재를 이룬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 들어와야 한다. ④ 대립자를 보는 균형된 생각이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획책하고 현재를 통렬히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나의 처지-상태(名)를 부정하고, 그 반대를 생각하는 것이다. 승리자는 그 승리가 사라짐을, 패배자는 재기를 생각해야 한다. ⑤ 세상이란 언제나 현재 뿐이며, 그 현재는 힘과 힘의 팽팽한 균형이다. 승리자와 패배자의 힘, 그 힘의 밀고 당김이 바로 현재이다. (다른 모든 현상이 다 그러하다.) ⑥ 공자는 일상, 도덕률의 공간을 주장한다. 국가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반면 노자는 그 힘이 서로 밀고 당기는 공간, 힘의 공간을 본다. (이는 법가의 기본적 시각이며, 兵家의 논리이며, 모택동의 전술도...)
    ⑶ 본체와 현상 - 노자는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현상 세계를 넘어서서 그 뒤에 있는 참 모습(본체)를 보라고 한다. 현상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고정된 세계(名)이다. 그러나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자처럼 현상 세계를 예(禮)로 규정하려는 사람들, 불변의 이름(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고, 강경하고 딱딱하다. (殺身成仁, 見危致命, 朝聞道 夕死 可矣!) (이점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묵자도 똑같다.) 반면 노자처럼 끊임없이 '현재' 만들기를 주장하면, 부드럽고 융통성이 있다.(柔) 오늘의 승자는 내일의 패자가 될 수 있다. 승리 속에서 패배를 생각하는 것은 여유가 아니라 부드러움이고, 두려움이고, 극도의 이기심이다. (아줌마의 철학?) 유가처럼 명분(名) 때문에 딱딱하든, 도척처럼 이기심과 자기 힘에 도취되어서 딱딱하든 그건 분명 현실에서 깨질 징조이다. (强梁者 不得其死!)
    노자는 이런 시각을 역사에 도입한다. 역사란 바로 그 이름이 늘어나는 과정이었다. 이름은 질서를 이루려는 것이지만, 대립자는 공존하기 때문에 무질서가 반드시 따라다닌다. 질서-무질서의 공존을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물로 물을 막는 짓을 한다. 충신이 많기 때문에 나라가 혼란하고, 효자가 많기 때문에 온 가족이 불화한다. 지혜가 늘어나면 거짓도 교묘해지고, 법령이 많아지면 도둑도 늘어난다. 이런 악순환은 그 고리를 끊는 수 밖에 없다. 즉 질서와 무질서 양자를 다 줄이는 선순환의 길 뿐이다. 이는 역사의 초기로 거슬러 가는 것이다. 노자는 퇴보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역사의 초기인 원시 공산 사회(小國寡民)을 이상적인 국가로 보기도 한다.
    ⑷ 노자의 두 측면 - 『노자』는 문명의 발전은 억압의 증대라 보고 반대하며, 초기 원시 사회로 돌아가자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힘의 논리에 지극히 충실한 제왕학이나 처세술을 주장하기도 한다. 후자는 문명 사회의 극치이기도 하다.
    노자의 주장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것이다. 무위(無爲)는 '함이 없음'이고,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외부적인 억압이 없이 스스로 그러함, 즉 자유를 말한다. 노자는 사람이 추구할 목표를 자유로 보았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 자유를 이루는 방법은 두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① 문명 사회는 인간들을 예(禮)라는 도덕 규범, 혹은 법과 제도, 혹은 하느님의 뜻 같은 외적인 강제력으로 억압한다. 그 억압 속에 있는 한 자유는 없어진다. 이런 점에서 문명의 억압이 없는 초기 원시 사회로의 회귀를 그는 염원한다. (문명의 억압 대신 자연의 억압)
    ② 자유란 뭔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고, 그것은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힘이 있기 때문에 외부의 억압을 받지 않을 것이고, 자유로워진다.(無爲) 자유=가능성=힘, 이것은 『노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시간 속의 변화에서, 대립자를 보는 균형, 이것은 바로 힘을 키우는 길, 자유로 나가는 길이다. 그 나라에서 최대의 힘을 가진 자는 군주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는 군주의 철학(제왕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군주 아닌 사람도 이 자유, 힘을 추구해야 사회 속에서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은 또한 처세술이기도 하다.
    『노자』는 일반적으로 초기 원시 사회, 혹은 문명이 없는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을 주장하기 보다는 처세술과 제왕학을 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원시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동시에 문명 사회란 현상적으로 들어난 것 이상의 아주 복잡한 힘의 관계라는 것을 통찰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자』의 처세술로 유명한 한 구절.
    "(지혜의)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같아지라!" 和光同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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