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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초인은 바다이며, 그대들의 커다란 경멸은 그 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사이에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 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데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들도 그 것을 연출해 주는 자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러한 연출자들을 군중은 위인이라 부른다.
세계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눈에 보이지 않게 회전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는 벗의 내부에 있는 초인을 그대의 존재 이유로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하고 그대의 의지를 그대의 머리 위로 율법처럼 내걸 수 있는가? 그대 자신이 그대의 율법의 재판관이 되고 복수자가 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의 율법의 재판관이자 응징자가 되어 홀로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별이 황량한 공간 속으로, 그리고 얼음 같이 찬 고독의 숨결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그대 홀로 있는자여, 오늘도 그대는 그대의 용기와 희망을 온전하게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고독한 자를 향하여 부당한 심판과 오물을 던진다. 그러나 형제여, 그대가 하나의 별이 되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여전히 비춰주어야 한다!
그대가 마주칠 수 있는 최악의 적은 언제나 그대 자신이다. 그대 자신이 그대를 기다리며 동굴과 숲에서 잠복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한 자여, 그대는 그대 자신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다! 그리고 그대의 길은 그대 자신과 그대의 일곱 악마 곁을 스쳐 지나간다.
남자여, 여자가 사랑을 할 때면 두려워 하라. 사랑하는 여자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그녀에게 다른 모든 것은 무가치해지기 때문이다.
남자여, 여자가 증오할 때면 두려워하라. 남자는 영혼의 바닥이 악(惡)하기만 할 뿐이지만, 여자는 그 영혼의 바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알맞은 때에 명예와 작별하고 알맞은 때에 떠나는 어려운 재주를 부려야 한다.
죽음 앞에서도 그대들의 정신과 덕은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저녁놀처럼 활활 타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의 죽음은 실패이리라.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는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인간이 죽였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항상 무언가 확실하고 변치않는 어떠한 대상을 필요로 하게 된다.
신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러나 신이 인간에게 너무나 연민의 정을 느낀 나머지 인간은 신으로 부터의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그러한 연민이 원인이 되어 인간은 신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힘에 의지
인간의 마음속에는 여러가지 의지들이 있다. 한편으론 편히 쉬고 싶고 한편으로 열심히 일하고 싶은, 혹은 무언가를 체념하거나 극복하고 싶은 상반된 개념들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의 힘들이 서로 충돌하고 그 안에서 가장 힘이 강한 의지가 살아남아 인간을 이끈다는 것이다.
영원회귀
한마디로 '영원히 계속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삶의 한 '순간 혹은 찰라'에 하고 있는 것들이 계속해서 반복될때 그것은 만족스러울수도 있고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간순간을 이 영원회귀에 빗대어 보아 만족스러운 일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다.
낙타, 사자, 아이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이 가져야할 마음가짐의 변화를 우화를 들어 설명한다.
무엇이든 예라고 대답하는 낙타가 있다. 이 낙타는 얼핏보아 긍정의 동물로 보이지만 사실 니체가 이야기 하는 긍정의 의미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외부의 명령으로부터 비판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면에서 '아니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동물이 바로 사자이다. 즉,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자가 바로 낙타의 다음 단계인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바로 어린 아이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두려움없이 모든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세, 그리고 관습과 체계를 의식하지 않고 나름의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모습, 그러한 모습이 '웃음'과 함께 어우러진 것이 바로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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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읽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물론 철학자 니체가 쓴 철학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몹시 독특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한 천재 작가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아름다운 문학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존의 엄정한 철학서와는 달리 모종의 문학적 설정도 있다.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을 들어간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의 독일 이름)는 십 년간 고독 속에서 정진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아침의 태양을 맞으며 세상에 나온다. 이후 그는 적잖은 시련을 겪는 와중에도 도시와 산속을 오가며 자신의 ‘말’을 설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대들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이렇게 그는 운을 뗀다. ‘초인(Übermensch)’이란 대체 무엇인가.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중략)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건너감’과 ‘몰락’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여는 아포리즘은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다룬다. 낙타는 끊임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인내의 정신으로서 그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린다. 저 고독한 사막에서 정신의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 정신은 사자가 된다. 당위와 의무(‘너는 해야 한다.’)에 맞서 사자는 의지와 자유(‘나는 원한다.’)를 주장한다. 그 순간 정신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이 책에 만연한 여러 비유 중 ‘아이’는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단계를 상징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건너가고’ ‘몰락하고’ 그로써 끊임없는 긍정과 창조를 실천한다. 아이는 ‘(과거에) 그러했다’라는 원한(Ressentiment)을 모른다. 2부의 한 아포리즘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했다. 이것이 분노하며 이를 부드득거리는 의지와 고독하기 그지없는 슬픔의 이름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한 의지는 모든 과거의 일에 대해 악의적인 방관자일 뿐이다.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 의욕할 수가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슬픔이다. (중략)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원한이다. 과거에 있었던 것. 이것이 의지가 굴리지 못하는 돌의 이름이다.
그리하여 원한과 불만에 찬 의지는 돌을 굴리고 자신과 같이 원한과 불만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복수를 한다.이 맥락에서 보자면 니체의 저 유명한 영원회귀사상은 결코 얄팍한 니힐리즘이 아니다. 동일한 것의 끊임없는 반복과 권태를 말하는 것도, 단 한 번뿐인 삶이나 존재의 비극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수히 쌓였다가 무수히 허물어지되 그러면서도 설움과 분함을 모르는 아이의 모래성 같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에워싼 동물들의 말대로, 춤이며 웃음이며 영원한 시작이며 영원한 움직임이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물 자체가 춤춘다. 만물은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웃다가는 달아난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 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둥근 고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球]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 있다.“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당히 신을 죽여 버리고 독수리와 뱀을 거느린 채 악동처럼 웃는 자.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낡아 빠진 망상이 있다.” 그것을 뒤엎고 ‘선악의 저편’을 꿈꾼, 아침놀과 한낮의 태양을 사랑한 자. 그는 부정과 어둠과 비극에 맞서 끊임없이 긍정과 생성과 기쁨을 역설했다. 거짓된 신의 존재, 경직된 도덕률,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등 우리를 짓누르는 참을 수 없는 무게를 거부하며 자유를 쟁취한 후 ‘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위해 포효한 ‘사자’는 곧 니체가 아니었을까.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06&contents_id=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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