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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온글] 로마제국의 간략한 역사
    참고 자료 2014. 7. 30. 10:50


    로마제국



    B.C. 753 ~ A.D. 1453

    SENATUS POPULUSQUE ROMANUS (로마의 원로원과 대중들)






    서기 2세기까지 로마가 정복한 지역
    면적 : 5,000,000㎢
    인구 : 88,000,000

    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

    처음에는 도시국가로 출발하더니 결국 세계제국으로 발전한 덕분에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이 똑같다. 라틴족(로망)에 의해 건국된 도시지만, 건국과 동시에 타민족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현대에도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는 민족 국가를 세계적 레벨에서 성립한 국가이다. 이점이 바로 타 국가와의 큰 차이점이라고 할수 있다. 

    황제의 후계자가 실제 피로 이어진 경우도 많았지만, 대개는 황제가 후계자를 양자로 삼고 계승하는 형식을 많이 취했다. 기본적으로 로마의 황제권은 '가문'에 귀속되는 '자산'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본래 부터 로마에서는 양자를 들여 가문을 계승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일부일처제에서 친자로만 부자상속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확률적으로 보아 상당히 어렵다.

    단 동양에서 장자상속 등으로 원칙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던 것과 달리 로마에서는 누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인지에 대해 마지막까지 분명한 원칙을 세우지 않았다. 대체로 황제가 다음 황제를 지명하는 식. 이러한 방식은 아들보다 현명한 사람을 지명함으로써 오현제 시대의 번영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황제의 '정통성'을 뒷받침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므로 제위가 제대로 계승되지 않거나 계승한 황제가 함량미달인 경우 군 지휘관들이 제각기 황제를 자칭하는 혼란과 내전도 가져올 수 있는 양날의 칼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혼란의 시대가 훨씬 길었다. 이러한 제도상의 허점과 그에 따른 혼란을 생각하면 로마 제국이 오랫동안 건실하게 유지된 것이 놀라울 정도.

    아마도 그걸 보완할 정도의 법 제도나 시스템이 그만큼 발달했다는 의미도 될 듯 하다. 실제로 로마가 완전 막장이 되기 전에는 함량 미달의 황제가 제위에 올라도 제국의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국의 제정에 비해 의외로 적었다. 근데 이것도 좀 생각해볼 게 있는데, 통치 제도나 관료 시스템의 정교함에 있어서 한은 이미 로마에 비해 훨씬 정교한 중앙집권적 관료 시스템을 갖춰놓았다. 덕분에 로마는 막장황제가 나오면 유능한 장군이 쿠데타 정ㅋ벅ㅋ해버리는 일이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문관 관료 시스템의 철저한 감시로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민생에 직접 관계가 있는 조세 제도도, 로마는 지방 조세행정에 국가가 거의 개입하지 못했으니 황제의 역량에 따라 민생의 변화가 뚜렷하게 작용하지 못한 점도 있다. 덤으로 세금 걷는 걸 직업으로 하던 세리들이 알아서 세금을 걷던 막장 로마식 세금제도를 개혁해보려던 도미티아누스는 막장황제로 낙인찍히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4황제 시대가 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이후 황제를 뜻하는 서양 각국의 단어가 로마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말의 변형인데 '엠퍼러(emperor)', '카이저(Kaiser)', '차르(Царь)' 등. 엠퍼러는 개선장군의 의미를 가진 임페라토르(IMPERATOR에서 유래되었으며, 카이저나 차르는 관직명이 아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어차피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에 카이사르를 꼭 집어넣었다. 원래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정당성 부여의 형식으로 쓰였는데 나중에는 거의 황제라는 뜻이 되어버린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황제를 '카이사르(Caesar, 시저)'라고 부른다.

    이러한 황제를 내세울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로마의 후계를 자처한 나라들이니 만큼 로마가 제국인 건 사실이다. 그 대영제국의 왕도 유럽 바깥에서 '인도의 황제' 자리를 얻어오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황제로 칭하지 못했다. 단 황제를 넷씩이나 둘 생각도 한 것을 보면 황제가 오직 하나뿐인 절대자라는 종류의 관념은 상당히 약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4황제 시대는 오히려 황제의 전제권력이 강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서구에서 제국의 개념은 로마에서 따온 것인데 로마가 제국이 아니라는 소리는 자기 모순일 뿐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탈리아 반도의 소수 이주 왕국으로 시작하여 에트루리아인의 졸개 비스무리하게 지내다가 힘을 길러 상전을 무너뜨리고 마케도니아, 갈리아 등을 정복하며 결국 거의 전 유럽을 손에 넣었다.

    체계화 되고 조직화된 전술과 무기 연구, 개발, 군복무를 시민의 명예로운 의무로 삼아 군조직을 강화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막강했다. 로마군 항목을 참조. 로마의 진정한 힘은 현재의 유럽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인 역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현재의 서양법률은 그 기본은 로마의 에 두고 있으며, 라틴어는 비록 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이들이 없을 뿐 각종 학술 용어로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판타지 작품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라틴어 마법의 주문은 서브컬처계에까지 미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대표하는 예라 하겠다.



    로마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건국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라고 한다. 형제의 외가는 알비롱가의 왕가이며 아버지는 군신 마르스였고, 알비롱가의 왕은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트로이 측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트로이가 망한 뒤 살아남은 두 트로이의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 두 왕자가 그리스에 우호적이었던 것을 기억했던 그리스인들은 이 두왕자를 이탈리아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이 두 왕자중 하나는 아이네이아스였는데 그는 중부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고 이때 알비롱가라는 도시의 왕이었던 라티누스가 에이아스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를 사위로 삼은 뒤 죽게되자 왕좌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후손이 대대손손 왕위에 앉았다. 이후 프로카라는 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들인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가 내분을 일으켰는데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를 내?은뒤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를 결혼을 못하는 여사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레아 실비아의 미모에 반한 마르스가 그녀를 취해 레아 실비아는 두 쌍둥이를 낳게 되었고 그녀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분노한 알비롱가의 왕 아물리우스는 그 두 형제를 강가에 '노출을 시켰다. 그러던 중, 그 곳을 지나던 어미 늑대가 형제를 발견하고 젖을 물림으로써 그들은 목숨을 구한다. 이윽고 두 형제를 양치기가 발견하여 두 형제를 자식으로 삼아 키웠는데 그 둘을 각각 로물루스, 레무스라고 이름 짓는다.

    쌍둥이 형제는 장성하여 양치기 집단의 두목이 된다. 이들은 왕위에서 ?겨난 누미토르가 정착한 땅을 약탈하러 왔다가 레무스가 생포당하게 되는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누미토르는 이들이 자신의 친손자임을 알게되었고 누미토르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된 로물루스 레무스는 자신의 원수 아물리우스를 죽이기로 하고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궁전에 침입하여 아물리우스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누미토르는 아물리우스의 뒤를 이어 알비롱가의 왕이 되고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들이 정착할 도시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로마시를 건설하게 된다. 이때가 기원전 753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와는 달리 고고학적으로는 난민들이 모여살다가 점점 유입되어 도시화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땅을 파보자 로마에는 소규모 촌락의 흔적이 기원전 800년 이전에도 있었고 이것이 로마인들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때 로마인들은 초가집과 같이 과 밀집을 엮은 텐트 같은 집에서 살았었고 당시 이미 으리으리한 궁전을 짓고 살고 있었던 동방의 도시들에 비하면 한줌밖에 안되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로마인들은 거창한 신화와는 달리 부랑자, 난민들이 모인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사비나의 여인 노략 신화가 보여준다. 사비나의 여인 노략 신화는 로마인들에게 마땅한 배필이 없자 레물루스가 꾀를 내어 사비나 남자들을 초청한 뒤 때문에 무방비 여자들을 노략해 와 배필로 삼아버렸다는 신화였다. 이것이 신화에 지나지 않으나 실제 역사에서도 로마에 정착한 사람들이 각 도시에서 흘러나온 부랑아, 난민들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로마시가 주변의 도시들에 비해 상당히 건국 시점이 늦은 점, 또한 시의 발전이 강력한 집단의 조직적인 도시 건설 계획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유입된 인구 증가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시설을 건설한 것으로 보여진 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로마는 7개 언덕이 있었는데 로마로 이주한 사람들은 언덕 꼭대기에서 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방어적인 측면에서 언덕 꼭대기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였고 로마인들도 그리한 것이었다. 이 7개의 언덕에서 살던 사람들은 처음엔 서로에 대해 적대하였으나 주변 도시에 대응하기 위해 서로 뭉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에 따라 카피톨리노 언덕과 밸리안 언덕의 사이에 있던 늪지대의 물을 뺀 다음 땅을 다지고 그곳에 포룸 로마눔을 건설한다. 이 두 언덕은 로물루스, 레무스가 이주했다는 곳으로 이 두 언덕 사이에 있던 부족들이 가장 최고참이었으므로 이 두 언덕 사이의 땅에 이 포룸을 건설한 것이었다. 이 포룸 로마눔에선 모든 종류의 공직 할동이 이루어졌다.

    로마는 정착생활을 하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기보다는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는 집단이 그 시작이었기에 외부의 인재와 기술을 받아들이는데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고 그 때문에 그리스, 에트루리아인들의 많은 건축술과 정치체계를 본뜬다. 특히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로마인들은 이름 - 씨족 - 가문이름으로 나뉜 작명 방식도 카피하게 되고 또한 건축술, 종교, 정치제도의 모든 면에서 에투루리아인들을 따라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건국 이후 싸움에는 강했던지 조금씩 주변 작은 마을들을 점령한 뒤 이들을 로마에 강제 이주 시키는 방식으로 인구를 불리게 된다. 그 결과 기원전 600년 즈음엔 인구가 3만 명 정도로 증가하게 되는데 이에 맞춰 로마는 세르비우스 성벽이라는 7개 언덕 전체를 두르는 커다란 성벽을 축성한다.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철거할 때까지 로마의 성벽이 된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750년부터 500년의 250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하였다고 보는데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당시 왕이 살던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7명의 왕의 첫 번째는 로물루스였다.

    왕은 1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상의해 일을 처리하였는데 원로원은 100개의 로마의 유력 부족의 수장들이 한데 모인 강력한 집단이었다. 이 원로원은 훗날 300명으로 구성된 로마 원로원의 모태가 된다.

    5대 왕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로마인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혼혈인 에트루리아의 유력자였다. 혼혈이라는 점 때문에 본국에서의 지위 획득은 힘들다고 평가한 그는 로마로 건너와서 세계 최초로 선거운동을 벌여서 왕에 이른다. 그런데 이후 7대까지의 왕이 모조리 에트루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에트루리아가 로마를 지배한 시기로 보기도 한다.

    6대왕 타르퀴니우스 세르비우스로는 매우 유능한 왕으로 로마의 정치 제도를 확립시키고 앞서 언급한 세르비우스 성벽을 축성한다.

    7대 왕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라고 하는데 왕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인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으로 원로원을 무시하고 자신 멋대로 통치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가 군사원정을 하는 동안 그 왕의 아들인 섹스투스가 루크레이아라는 명문가의 귀족의 안주인을 강간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의 발단은 루크레이아의 남편과 섹스투스가 누구의 부인이 더 예쁜가 내기를 하였고 따라서 두 젊은이가 자신의 부인을 서로에게 보였는데 이때 루크레이아의 모습을 본 섹스투스는 흑심을 품고 며칠 뒤 남편이 없는 사이에 집을 방문, 잘 대접받은 뒤 그날밤 침실로 침입해 단도를 가지고 협박해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섹스투스가 떠난뒤 루크레이아는 남편과 시아버지, 그녀 집안의 친척이자 왕의 사위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부른 뒤 복수를 맹세시키고 자결을 하였고 이에 분노에 끓은 브루투스가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여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하지만 250년에 걸친 왕가가 이 한번의 사건으로 뒤엎어지고 공화정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왕정 붕괴 - 귀족에 의한 공동 통치 - 시민들에 의한 민주정 수립의 수순으로 점차 민주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게 민주화 되는 것은 도시 국가들의 특징으로 이는 도시 국가의 사활이 달린 전쟁을 시민군이 수행하였고 때문에 시민들의 발언권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중동은 엄청나게 넓게 퍼진 평야지대를 기반으로 잡아 도시 국가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국가를 형성하여 이 넓은 일대를 통채로 관리하였고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한 명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세습 왕조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 이탈리아와 같은 지역은 대규모 평야 지대보다는 하나의 도시가 그들만의 정부가 있는 도시국가들이었는데 이는 넓은 평야가 펼쳐진 중동과 달리 산과 분지들로 이루어진 데다 수많은 인종들이 뒤섞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시국가에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도시의 농민들을 소집하여 시민군을 구성한 뒤 나가 싸웠었고 전쟁이 끝난뒤 병사들은 농민으로 탈바꿈하여 농사를 지었다. 로마도 마찬가지로 농민들이 곧 군인인 세계였고 이들은 무장을 자체조달하였다.

    이렇게 되자 시민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나라의 흥망에 결정적이라는 것을 파악하였고 때문에 정부에 전리품의 분배와 같은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때문에 하나의 왕조가 농민들의 위에 군림하는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많은 귀족들은 이러한 시민들과 영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 들었고 이것을 잘하는 귀족들의 영향력은 왕을 능가하였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하는 브루투스가 이러한 대표적이 예이고 아테네에선 솔론과 같은 사람이 그러하다.

    이러면서 점점 왕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게 된다. 그 결과 왕의 필요성은 조금씩 사라지고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정, 그리고 최후엔 시민들이 투표로 정치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정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었다. 로마도 똑같은 수순을 밟아 결국 기원전 500년쯤엔 왕정이 붕괴되고 만다.

    그리스에선 왕정이 붕괴되고 귀족으로 구성하다 귀족들도 왕족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권력을 잃게 되고 시민들이 주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로마는 귀족들이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로마특유의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의 씨족 연맹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유력 귀족 집안이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평민들의 뒤를 봐주면 그 평민들은 이러한 귀족 집안에 충성을 바치는 방식이었다. 이 귀족을 파트로네스, 평민을 클리엔테스라고 부른다. 이 파트로네스는 최대한 많은 평민을 클리엔테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곧 그들의 영향력과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평민들은 최대한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을 파트로네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다른 평민들과의 분쟁에서 어떤 파트로네스가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에선 거의 모든 평민들은 뒤를 봐주는 파트로네스 집안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비록 공화정으로 바뀌어도 이 파트로네스 노릇을 하는 귀족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거의 소멸하다시피한 그리스와 다른 특징이었다.

    이러한 강력한 귀족의 존재 때문에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강력한 귀족 집단이 존재하였고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끊임없이 있었다. 반목중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전리품과 획득한 영토의 배분 문제였는데 귀족은 그들의 특권을 사용하여 전리품 가운데 가장 값나가는 것과 기름진 땅은 자신들이 갖고 평민들에겐 나머지만 분배할 뿐이었다. 또한 귀족은 평민들에게 고이자로 돈을 꿔주어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황폐하진 농토를 복구하는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게 하고 돈을 못갚으면 그들의 영토를 몰수한 뒤 노예로 삼는 짓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의 횡포에 맞서 로마 평민들은 전쟁 수행을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는 방법을 써서 그들의 권리를 수립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호민관이라는 직책과 평민집회가 생며, 이후 법적으로 평민 귀족의 차이점을 없애버렸다(평민도 호민관을 역임하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이나 외국인의 법적 지위는 낮았고 노예제가 있었으므로 평등 국가라 할 수는 없지만 중세 유럽처럼 평민과 귀족 사이의 계급 장벽이 (일단 법적으로는) 절대적이지는 않았다는 뜻.

    노예는 상당히 많이 존재했고, 극히 일부의 경우는 해방노예라는 신분을 거쳐서 시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귀족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오로지 명예로운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일 뿐 직접적인 특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권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 및 로마의 계속되는 정복전쟁으로 인한 전리품, 그리고 정치적 유력자로써 주변에 모이는 사람 등등을 활용해서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일문의 정치집단이 된다. 이후 일부 평민 계층이 호민관-원로원-집정관-군단사령관 테크를 타서 유력 가문이 돼버리는 이른바 평민 귀족이라는 것까지 등장한다. 이 평민 귀족은 신참자라는 의미의 노블레스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후에 귀족을 의미하는 말인 노블의 어원이 되었다.

    건국직후인 왕정시대 때도 로마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이는 로마의 지리적 특징상 피할 수 없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그 위치가 하필이면 이탈리아에서 제일 비옥한 이탈리아 서부 평야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테베레 강까지 끼고 있다. 그 때문에 강을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 육지를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은 반드시 로마를 근처를 거쳐야 하는데 그 이유는 로마를 우회하려면 이탈리아의 정 중앙을 가르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Monti Appennini)을 거쳐 가야했기 때문이었고 이는 로마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로마로 하여금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노출시켰고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왕정시대의 로마는 건국 시기가 수백년 앞선 에트루리아 변두리 비슷한 위치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7명의 역대 왕중 마지막 세명이 에트루리아계인 것을 보아 추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건축 양식, 도시 건설, 작명, 점술관을 겸직하는 행정관 등등 모든 문화 곳곳에서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즉 초기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관계는 삼국시대때의 백제와 일본의 관계와 유사한 상태였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은 로마를 군사적으로 직접적으로 지배하려는 시도를 한 적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에트루리아 도시들은 북쪽에 위치하여 끊임없는 갈리아족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에 대한 군사적 욕심을 부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왕정시대에서 등장하는 왕들은 한결같이 군사적으론 유능하였으며 지휘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서술이 나오지 않는다. 폭정을 해서 왕위에 ?겨났다는 타르퀴니우스조차 주변의 수많은 도시들을 정복했다고 리비가 서술한다. 로마인들이 그들이 받은 패배를 고의로 누락했는지 모르나 실제로 로마인들의 군사적인 능력은 주변국들을 압도한 것은 사실로 보이며 왕정이 무너진 해인 기원전 500년 쯤엔 이미 라티움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되어졌다.

    이렇듯 로마의 급성장은 로마의 입지조건이 티베레 강을 낀 비옥한 라티움 지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농사가 모든 것이였던 고대사회에서 비옥한 토지의 유리함을 갖추고 있었는게 한몫하였다. 또한 로마인들의 외국인들 혹은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던 것도 이러한 로마의 급성장에 한몫을 하였다. 로마에 인구가 적었던 초기엔 타 도시들의 죄수들의 피난처를 자처하기까지 한다(고대 사회에선 범죄자가 피난처로 지정된 도시로 가면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또한 로마인들은 왕정시대의 7명의 왕중 세명이 라틴족이 아닌 에투루리아인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로마인들은 그들의 왕, 또는 지도층이 그들의 일족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개방적인 모습은 로마가 그들이 점령한 도시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거나 완전 라틴 시민권을 수여하여 그들과 동화시키는 그 당시로썬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로써 로마는 꽤나 충성도가 높은 우방국을 거느릴 수 있었다.



    공화정 이후에도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은 주변국가를 압도하였다. 이 때문에 라티움에 있는 도시들은 라틴 연합을 맺은채 대항한다. 로마는 홀로 연합군을 상대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압도하였고 결국 카시아눔 조약(Foedus Cassianum)을 맺게 된다. 이는 조약에 써있는 내용은 로마가 힘들면 라틴 연합이 도와주고 라틴 연합이 힘들면 로마가 도와준다고 쓰여있는데 따라서 로마는 이들 라틴 연합 전체와 동등한 입지에 서게 된다.

    이렇게 힘이 커지자 옛날 로마를 딱까리 취급하던 에트루리아 지역까지 공격하게 되고 결국은 유능한 장군인 카밀루스의 지휘아래 기원전 396년 에트루리아의 이름난 도시인 베이를 점령하게 된다.

    이때 베이의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하는 신세가 되고 텅빈 베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평민과 귀족들이 의견이 엇갈려 내분이 일어난다. 평민들은 로마시민의 절반을 베이로 이주한 다음 살게하여 또다른 로마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의견에 귀족들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였고 특히 베이를 지휘한 카밀루스가 이것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다.

    그러자 평민들은 분개하였고 카밀루스를 횡령혐의로 고발한다.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시민들은 카밀루스에게 유죄평결을 내리기로 작정했으므로 카밀루스가 무죄판결받는 것은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카밀루스는 자진해서 로마를 떠난다.

    이런 내분을 벌이는 동안 갈리아족이 남하하게 된다. 갈리아족은 베이 점령의 9년 뒤인 기원전 387년에 남하하였는데 이들은 우선 에트루리아 지역의 클루시움이라는 도시를 포위한다. 이때 클루시움은 베이 점령 이후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세력을 뻗기 시작한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그들에게 사절들을 보내 교섭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교섭이 결렬되었는데 이때 로마의 사절 중 하나인 퀸투스 파비우스는 스스로 칼을 휘둘러 교섭상대인 갈리아 족장을 살해한다. 이는 외교적으로 불법적인 행위였고 때문에 분노한 갈리아인들은 사절을 로마에 파견해 파비우스를 그들에게 넘기라고 요청한다.

    갈리아인들의 요구는 정당한 듯 보이나 하지만 로마인들은 갈리아인들이 그들의 시민을 넘기라는 요구를 기분나빠했고 따라서 퀸투스 파비우스를 아예 당시엔 집정관에 해당되는 군사 호민관으로 선출하고 지휘권(임페리움)까지 부여한다. 이는 갈리아인들에 대한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소식을 들은 갈리아인들은 바로 클루시움의 포위를 풀은 뒤 로마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변 도시에 이들이 로마로 가고 있으며 그들은 오직 로마만 공격할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행군하였고 또한 가축과 농장엔 손하나 대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방해받지 않고 로마시에서 고작 14km의 거리에 이르게 된다.

    당시 로마는 이미 라티움의 패권자였고 에트루리아에서도 매우 강력한 입지를 가졌으므로 갈리아족의 공격에서 그들의 도시를 지킬 수 있으리라고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또한 숫적으로도 두배가 넘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족을 상대하였으므로 정황상 로마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로마군은 분쇄되었고 갈리아족은 로마 시내로 진입하게 된다. 로마 시민들은 갈리아족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얼른 로마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카피톨리노 언덕 위로 올라가 농성했고 갈리아족은 이들을 포위하나 점령할 수 없었다. 화난 갈리아족은 로마 시내의 건물들과 문서들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불살랐다. 그 결과 기원전 390년 이전의 로마 문서들은 모두 소실된다.

    갈리아족은 로마 시내를 점거하긴 하였으나 카피톨리노 언덕의 로마인들이 계속 저항하였고 또한 카밀루스가 자신이 조직한 군대를 이끌고 외부에서 호응하자 로마에 계속 눌러앉기가 힘들었다. 이때 로마인들은 갈리아족에게 협상을 제의하며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하고 이에 갈리아족은 엄청난 양의 황금을 요구한 뒤 이를 받고 돌아간다. 이러자 로마 시민들은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자 갈리아한테 개쪽당한 로마를 주변 라틴 도시들은 깔보기 시작했고 저번에 맺었던 조약 따윈 무시하고 로마를 침략하기 시작한다. 로마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카밀루스를 독재관으로 삼았고 그의 지휘 하에 이들을 열심히 무찌르며 간신히 체면치례를 한다.

    로마는 갈리아족에게 당한 패배를 계기로 군대를 개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그리스식의 팔랑크스 스타일을 버리고 레기온 스타일로 진화한다. 팔랑크스는 모든 무장한 병사들이 하나의 거대한 사각형을 이뤄 공격하는 방식이었으나 레기온 스타일은 작은 네모들로 큰 네모를 형성해 공격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레기온 스타일은 훗날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발전한 뒤 칸나이 전투 직후 대대(Cohort)를 편성하게 됨으로써 완성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갈리아 족과 상대하였을때 우수한 무장을 갖춘 신분높은 계급이 중앙에 위치하였는데 양익이 달아나면서 중앙이 포위, 그들이 모두 섬멸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후로 높은 계급의 생존률을 높히기 위해 계급순으로 일렬로 배치하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 이것은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아로 나뉘는 매니풀라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즉 갈리아에게 당한 패배는 로마가 레기온 스타일의 전투 방식을 창시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었다.

    50년후 라틴 연맹은 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데 그 이유는 라틴 연맹과 로마와 함께 공화국을 만들자는 라틴 연맹측의 제안을 로마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로마는 자꾸 라틴 연맹보다 세력이 커지고 있었으므로 라틴이 미리 선수쳐 로마와 맞먹으려고 했던 것이고 로마는 당연히 거부한 것이었다. 이 싸움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로마는 라틴 연맹을 해체하고 동맹국으로 삼는다.

    이때 로마가 점령한 라틴 도시 국가들을 대한 것은 고대 사회에선 매우 드물게 온건한 것이였다. 로마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부여해주었고 이들에게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시민으로써 누릴 권리인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게다가 이들에게 연공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단지 요구한 것은 전쟁이 났을때 로마에게 보조병을 보냄으로써 협력하라는 것이였다. 이렇게 이들을 동맹국으로 삼음으로써 라틴 동맹을 결성하고 로마는 이 동맹의 우두머리가 된다.

    로마가 라티움 지역에서 가장 쎈 도시가 된 뒤 부하까지 거느리는 동안 아펜니노 산맥에 살고있는 삼니움족 중 일부가 서쪽 평야지대에 남하하여 비옥한 땅에서 살려고 마음먹는다. 이들은 로마가 버티고 있는 라티움 지역을 피해 라티움 지역의 바로 아래쪽의 평야지대인 캄파니아 지역에 "민족이동"을 시작한다.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들은 라티움 지역의 보스인 로마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로마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부하들과 함께 삼니움족을 두들겨 내?고 캄파니아 지역 도시들도 동맹국으로 삼는다.

    그러나 인구가 포화될 대로 포화되었고 잠시나마 맞본 평화로운 평야지대의 삶을 잊지 못한 삼니움족은 15년뒤 이번엔 대대적으로 캄파니아 지역을 공격한다(2차 삼니움 전쟁). 이미 이 지역을 보스가 된 로마는 바로 이들을 요격하였는데 이번엔 호락호락하지 않아 이 삼니움족과 로마인의 전쟁은 무려 22년을 끌게 된다.

    로마인들은 2차 삼니움 전쟁 초기엔 삼니움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전혀 예상 못했는데 그 이유는 삼니움 전쟁 초기에 로마인들이 압도적인 승리를 연이여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거듭된 연승에 고무된 로마인들은 삼니움족의 본거지인 아펜니노 산맥으로 직접 들어가 이들을 궤멸시키기로 결심하고 두 집정관이 네게 군단을 이끌고 진격했다가 카우디눔 협곡에서 매복을 만나 모두 생포되는 치욕을 당한다. 이 두 집정관과 그들의 군단을 모두 생포한 삼니움 족장의 이들의 처우에 대해 고심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들 군단을 모두 처형하던지 아니면 모두 조건없이 풀어주라고 조언한다. 그 이유인즉 이들 모두를 처형하면 로마는 쇠약해질 것이고 또는 조건없이 풀어주면 로마인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 족장은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인들을 무장을 해제시킨 채 속옷차림으로 멍에 밑을 기어가도록 한 뒤 로마로 돌려보냈다. 따라서 로마는 병력을 고스란히 보존하였으나 이 치욕 때문에 삼니움족에 대한 적개심을 맹렬히 키우게 된다.

    로마인들은 산으로 올라가 삼니움족과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고 전략을 바꾸어 이들을 산위에서 고립시키는 전략을 폈다. 즉 삼니움족의 도시들 중 산 밑이나 중턱에 있는 도시를 공략하고 이들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평야지대의 도시들을 공격해 로마의 동맹국으로 바꾸는 방법이였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삼니움족은 계속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삼니움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심지어 갈리아족까지 끌어들여 로마와 결전을 벌였는데 로마는 센티눔이라는 도시에서 이들 연합군을 쳐부수고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다.

    삼니움족과의 싸움 후 로마는 삼니움족의 전투 방식에서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 유명한 투창-필룸(복수형 필라)-과 사각 방패-스쿠툼-도 삼니움족의 무기를 도입한 것이며, 전투 방식도 크게 바뀌어 기존의 뻣뻣한 팔랑크스 편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유연하고 전략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마니플-코호트 단위로 군대를 조직하는 법을 베끼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로마의 레기온은 나중에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를 개박살내면서 그 우월성을 지중해 세계 만방에 알리게 된다.

    삼니움 전쟁이 끝나자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곧바로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과의 분쟁에 개입하여 이들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로마는 투리라는 소도시의 분쟁에 개입하여 그들에게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하는데 이때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 중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타렌툼의 영해를 지나게 된다. 타렌툼과의 조약에선 이들의 영해를 로마 선단이 지나면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타렌툼은 이 로마 선단을 공격하였고 이것에 분노한 로마는 타렌툼에 선전포고를 한다. 타렌툼은 그리스 서쪽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에피로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에피로스 왕국의 왕은 피로스로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를 격파하고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을 자신의 세력하에 넣으려는 욕심으로 이것을 허락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로 이탈리아로 들어온다. 피로스와 로마는 두차례에 걸쳐 대규모 회전을 벌였고 피로스는 명성에 걸맞게 연이어 승리를 거두나 전사자가 로마군 전사자의 7할에 이르었으므로 원정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없었다. 이때 로마는 피로스에 대항하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도시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과 동맹관계였다. 로마와의 전쟁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 피로스는 이를 핑계삼아 이탈리아를 떠나 시칠리아로 무대를 옮긴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여 연이은 승리를 하나 훗날 포에니 전쟁 때 증명하듯 해군 없이는 완전한 승리는 불가능하였다. 카르타고 도시들을 공략할때 카르타고 해군의 꾸준한 보급은 피로스가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피로스는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했고 그리스계 도시들은 이것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된다. 그리스계 도시들이 피로스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고 카르타고의 해군력을 제압할 방법이 없게 되자 피로스는 시칠리아 공략을 포기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 온다.

    피로스가 시칠리에 있는 동안 로마군은 전쟁에 대한 대비를 꾸준히 하여 피로스의 병력을 훨씬 웃도는 군단을 편성하고 있었다. 피로스는 이에 대해 로마군이 한데 모이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결정하고 베네벤툼에 머물던 로마 군단을 야습하기로 하나 이 야습을 로마군이 알아챘으므로 실패하고 피로스군은 패배하고 만다. 이에 피로스는 결국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결국 로마에게 항복하고 만다.

    피로스를 격파하고 이탈리아 남부마저 먹게된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를 통채로 지배하는 세력이 된다. 그렇게 되자 이젠 시칠리아 섬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된다. 카르타고는 당시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그리고 에트루리아계 도시들과의 내분에 개입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시나와 시라쿠사와의 내분에 로마가 개입하자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연합하여 로마군을 상대키로 하였으나 시라쿠사는 격파당해 로마에게 복속되고 카르타고는 로마군에 전쟁을 선포, 시칠리아 섬을 놓고 두 나라는 23년에 걸친 전쟁을 치루나 로마는 우수한 병사의 질, 풍부한 전쟁 경험, 지휘관의 자질 등에서 카르타고에 우위를 점했으므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둔다. 20여년 뒤에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함으로써 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여기서 로마인들은 전쟁 초기의 연패와 칸나이에서의 대패 끝에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배반하는 등의 위기를 맞이하나 기회를 살리지 못한 카르타고 정부의 무능력과 라틴 동맹이 쉽게 와해될 것이라고 예상한 한니발의 전략적 판단 착오, 그리고 마케도니아왕과 한니발과의 사절을 우연히 생포하는 등의 행운 등이 겹쳐 전세를 역전하는데 성공, 결국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스페인을 정복하고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여 자마에서 한니발을 패배시킴으로써 2차 포에니 전투 역시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꺾게 되자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와의 싸움에 로마군을 끌어들이게 된다. 로마인들은 이 싸움에 개입하여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하에 마케도니아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 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요청으로 셀레우코스 왕조군을 그리스에서 격퇴하고 시리아 까지 건너가 셀레우코스군을 격파함으로써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확립한다. 그 뒤 필리포스 5세의 뒤를 이은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가 로마에게 다시 반기를 드나 로마는 이것을 진압하고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키고 만다.

    그 뒤 로마는 정복된 국가들이 로마의 패권에 반발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그리스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였던 코린토스와 포에니 전쟁의 맞수였던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 주민들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림으로써 주변국에 본보기를 보인다. 그 이후로는 로마의 패권이 공고해져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의 전체를 소유하는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급속도로 이루어진 성장은 로마 내부에 많은 모순을 낳았다.

    가령 기존의 파트라이 클레엔테스의 관계로 돌아가던 사회구조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중해를 제패하면서 로마는 당시 서양과 중동을 아우르는 수도가 되었으며 따라서 그 세계 전체의 지식인, 부유층, 출세한 해방노예, 새로 해방되는 무수한 노예들이 로마로 상경하였다. 뿐만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얻은 로마 정부는 도시를 세계 수도에 걸맞는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공사를 벌여왔고 따라서 일자리를 찾아 유입되는 노동자들도 상당하였다. 이로써 로마시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였고 때문에 로마는 백만의 인구를 수용하는 도시가 된다. 이는 19세기초 런던이 인구 백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수용했던 것과 맞먹는 인구였다. 이러한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기존의 파트리아, 클레엔테스의 폐쇄적인 구조가 파괴되었고 그로써 전통적인 공화정의 탈을 쓴 귀족정치의 기능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부의 유입은 로마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정은 철저히 원로원 계급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늘어난 로마의 부를 원로원이 독점하였다. 반면 부를 얻는데 병사로 징병되어 싸워 이김으로써 큰 공헌을 한 로마 시민들은 이 혜택을 누릴 수 없었고 오히려 로마의 영토가 늘어나면서 장거리 원정을 수행하느라 농장을 경영할 수 없어서 파산하는 이들이 많았다. 원로원은 이들에게서 농장을 헐값에 사들인 뒤 노예를 대규모로 고용하여 대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한다. 이러한 불평등으로 인해 로마 시민들의 원로원에 대한 불만은 점점 고조된다.

    이렇듯 귀족 정치를 지탱한 로마의 전통적인 사회구조의 파괴, 늘어난 부를 독점하는 원로원 계급, 그리고 늘어난 전쟁거리와 그에 따른 복무기간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평민계급과 귀족계급의 대립은 심화되고 몇몇 정치인들에 의해 이 문제를 로마 공화정의 체제내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게되면서 그동안 눈에 드러나지 않았던 로마 공화정의 모순점이 노출된다.


    부를 독점한 원로원은 이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농장을 늘려나갔다. 이에 자영농민들이 농장을 원로원 의원들에게 헐값에 팔고 그 돈을 탕진하는 이들이 많게 되어 자영농민들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들 자영농들은 로마 군단의 중추를 이루는 중보병들의 구성원이였으므로 이들의 몰락은 로마군단의 질적 하락을 초래했으므로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 국유지를 파산한 무산자 계급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농지법을 발의한다. 그런데 이것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 국유지는 이미 임대를 받은 이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은 바로 법률에 밝은 원로원 계급으로 새로 로마의 소유가 된 국유지에 대한 정보와 가격, 그리고 이를 임대받기 위한 복잡한 절차를 훤히 꿰고 있었으므로 국유지가 생기면 곧바로 원로원 계급의 누군가가 임대를 금방 받아버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가 나누어줄 국유지는 바로 이러한 땅들로 무산자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원로원 계급이 가진 땅의 임대권을 돌려받아야했다. 원로원 계급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순순히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그라쿠스 형제는 이 반발을 무릅쓰고 농지법의 시행을 그들이 가지고 있던 호민관 권리를 사용해 민회에 회부하여 적법한 절차를 통해 가결시킨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그동안 로마 공화정이 규정한 헌법을 초월하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이 두형제를 살해하는 방식으로 농지법을 무산시킨다.

    두 형제중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이 최초로 발의한 Senatus Consultum Ultimum, 즉 원로원 최종권고의 희생자가 되는데 이 원로원 최종권고는 일종의 긴급조치 와 같은 것으로 원로원이 원하면 모든 헌법, 절차를 무시하고 어떤 처형을 내릴 수도 있다는 무법적인 조항이었다. 이는 원로원이 사실상 공화정의 탈을 벗어던지고 사상 최초로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때 원로원 최종 권고에 대해 좀더 다룬다면 원로원은 본래 헌법상 조언만 내릴 수 있는 기구였으며 입법권, 사법권, 군사권, 행정권을 행사를 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원로원의 칙령(decree of senate)이라는 것이 존재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집정관에게 권고하는 형태를 띄고 집정관이 이를 받아들여 행사하는 것으로써 그 효력을 가질 뿐이었다. 원로원이 지금의 의회처럼 예산에 대한 결정도 내렸으나 이것 역시 재무관들이 담당할 이들에게 고참으로써 방침을 내려 주는 형태로써 효력을 갖고 있었다. 비록 원로원의 방침이라는 것이 막강한 권한을 가져 집정관과 재무관들이 따를 수밖에 없긴 하였지만 적어도 자발적인 집행이라는 시늉을 함으로써 권위는 있으나 권한이 없는 원로원의 모습을 띄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원로원 최종 권고는 이런 원로원의 칙령과 전혀 다른 것으로 이것을 집정관이나 다른 이들이 따르지 않으면 반역이 돼버린 것이었다. 이는 권고가 아닌 명령이었다. 즉 이로써 원로원이 권한이 없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권한이 있을 수도 있게 돼버린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원로원의 이 명령은 로마 시민들이 가진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그리고 호민관에 대한 신변불가침권, 그리고 민회에서 가결되어 효력을 갖게된 법안을 무시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공화국 로마의 정치체계의 근본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원로원이 이러한 초법적인 행위로 그라쿠스 형제를 죽게 하여 일단 급한 불을 껐지만 모순이 그대로 남아 그 이후로도 몇명의 호민관들이 원로원에 도전하다가 죽는 일들이 생겼으나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 와중에 누미디아 왕국의 왕이였던 유구르타가 로마에 반기를 들어 발발한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을 진압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낸 로마의 장군 마리우스는 군제개혁을 통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꿈으로써 무산자 계급을 로마군단으로 흡수한다. 그 이후 이 새로운 형태의 군단병으로 30여만에 달하는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남하를 격파함으로써 이러한 제도를 로마에 확립시킨다. 그러나 이들에게 퇴직금으로 지급해야하는 농토 배분 문제로 다시금 원로원과 마찰을 겪게 되고 마리우스 파였던 호민관이 그라쿠스 형제가 발의한 것과 똑같은 형태의 농지법, 즉 국유지를 마리우스 군단병에게 퇴직금으로 나눠주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다 다시 원로원의 반발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된다. 마리우스는 현직 집정관으로 이러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함으로써 신뢰를 잃게되어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만다.

    그 뒤 현재 터키 지역에 있는 폰토스 왕국의 왕 미트라다테스가 로마의 패권에 반기를 드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현직 집정관이였던 술라가 군단을 편성하나 마리우스는 자신의 옛 마리우스 파를 움직여 군단 지휘권을 현직 집정관이 아닌 마리우스가 갖는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킨다. 이에 술라는 편성한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를 점령하고 마리우스 파를 제거한 뒤 미트라다테스와의 싸우러 떠났고 술라가 떠나자 군사력이 없던 로마를 마리우스가 점령하여 원로원 의원들과 그들의 지지자를 모두 살해한다.

    그 뒤 로마는 술라와 마리우스 파의 내전에 휩싸인다. 미트라다테스와 강화를 맺고 돌아온 술라는 마리우스 파의 저항을 진압하고 로마를 점령한 뒤 이들을 대거 숙청한다. 그 뒤 로마 원로원 귀족들의 독재는 계속되었으나 이에 저항감을 가지고 있던 민중파(구 마리우스파)의 일부 역시 로마에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또한 딱히 원로원에 반대하는 정책을 입안한 적도 없었으므로 원로원 의원들이 그를 경계는 했지만 딱히 적대하지는 않았다.

    카이사르는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부임한 스페인 서부지역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당시 동방 원정을 끝내고 역시 마리우스 때와 마찬가지로 퇴직금으로 농지를 배분해줘야 하는 문제로 골치를 ??히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몰래 동맹을 맺는다. 여기에 크라수스까지 끌어들여 삼두 결속을 맺은 뒤 폼페이우스의 지원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어 농지법을 통과시킨다.

    그 뒤 카이사르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8년 간의 기간동안 갈리아 전역을 로마 패권 하에 제패하는 업적을 쌓는다. 카이사르의 뛰어난 정치적인 수완과 군사적 업적으로 인한 높은 명성을 극도로 경계한 원로원 귀족들은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임기 뒤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고 민간인 출신으로 집정관 선거에 나서라는 요구를 한다. 카이사르는 군사 지휘권을 반납하는 순간 정적들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원로원에 군사 지휘권을 유지한 상태로 출마하였고 여러가지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나 원로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시킨다. 이에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원정군을 소집하여 이탈리아 본국으로 쳐들어오니 다시 내전이 발생한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에서 원로원 세력의 군대를 연파하고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가 이 될 것을 두려워한 원로원에게 암살당하고, 로마는 다시 내전에 휩사이지만,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내전을 정리하고 최초의 황제로서 군림하게 된다. 그의 치세는 40년이나 계속되었고 그의 사후 카리굴라, 네로 같은 폭군이 등장하여 로마 제국은 잠시 내전에 휩싸이긴 하지만 이후 5현제 시대에 돌입해서는 황금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훌륭한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5현제 시대는 단순한 번영기와 황금시대만은 아니며, 로마의 번영만큼이나 내부적 모순이 극대화 된 시기이기도 했다. 외부 침입에 의한 약탈과 노예 노동에 의존하던 로마는 더이상의 확장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서 더 이상 이민족을 공격하여 노예와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길어진 국경을 지키기 위해 군단은 계속 증설되었다. 게다가 각 군단이 한 지역에 오랫동안 주둔하면서 병사들이 비밀리에 현지 여성과 결혼하게 되면서 군기가 해이해지기 시작했고, 이민족에 대한 약탈이 사라지면서 귀금속의 유입이 감소하자 3세기에 들어서면서 금화와 은화의 질이 하락했다.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지만 폭동을 두려워한 황제들은 서커스와 같은 대량의 자금이 투입되는 공공 행사를 축소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5현제 시대 이후, 군단에 대한 봉급 지급이 지연되는 등 각 지역 주둔군의 불만이 커져 갔고, 지방에 대한 제국 수도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갔으며, 여러 지방 군단을 통솔하는 상급 지휘관들은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는 등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다가 결국 내전을 반복하면서 나라가 점점 동방식 전제군주화 되어간다. 이런 식으로 점점 제대로 막장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이런 막장테크 3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경제는 막장이 되고, 게르만인들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하고 호전적으로 변해 국경 경비를 ?뎔?/span> 약탈을 일삼았으며, 동방에서는 로마에 대해 그다지 공격적이지는 않았던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공격적인 강적이 일어났다.  로마 제국의 기동방어는 게르만족과의 다뉴브 강 전선에서 병력을 보충해야 할 경우 일시적으로 파르티아의 국경에 주둔한 군대를 다뉴브 강으로 이동해서 메꿨고, 그 반대로 동방 전선에서 일시적인 긴장이 흘렀을 경우 파르티아를 압박하기 위해 다뉴브 강의 군대를 잠시 동방 전선으로 차출시킨 시스템이다. 군단을 융통성 있게 운영한 기동방어 체계는 리메스로 알려진 방어선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국경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로마에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인해 다뉴브 강에서 게르만족과 싸워야 할 때에도 동방 전선의 군대를 차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동방어가 불가능해지면서 다뉴브 강 전선과 동방 전선 모두 방어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대를 보충해야 되고, 군대를 보충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기 때문에 예산 또한 늘려야 하는데 로마 제국의 수입원을 제공하던 노예는 줄어들어 (수치적으로 감소하기도 했고,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으로 제도적으로 모든 노예가 사라진다) 제국의 경제력이 예전같이 않은 상황이라 돈을 찍어내게 되고, 은화 함량이 감소해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고...악순환이다.

    게다가, 게르만족들이 그 이전보다 차원이 다르게 강성해지기 시작한 시기도 사산조 페르시아가 대두한 시기와 일치한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중으로 군사력 보충과 방어선 유지에 신경써야 했기에 시기적으로 정말 운이 없었던 셈. 이렇게 로마 제국 후기에 큰 짐이 된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이 분단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싸웠다. 동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그로 인한 국력의 소모는 결국 사산조 페르시아가 허무하게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게 된 원인이 된다. 동로마 제국도 이슬람에게 시리아와 이집트를 영구적으로 상실하게 된 원인이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지친 탓이다.] 결국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투 중 사로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 때에는 사태가 더 심각해졌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의 치세 대부분을 반란 진압과 국경을 넘어오는 야만족들과의 싸움에 소진했으나 이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였고 야만족들의 침입은 거세어져만 갔다.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치하땐 갈리아 지역(지금의 프랑스)과 시리아 지역(지금의 중동)이 로마에서 독립하여 그들의 왕을 옹립하였다.

    로마제국은 이때 거의 멸망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갈리에누스가 암살된 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2세가 고트족의 대규모 남하를 일망타진함으로써 극적으로 로마를 구한다. 그는 고티쿠스라는 존칭을 얻으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다. 클라우디우스 2세의 뒤를 이은 아우렐리아누스는 매우 유능한 황제로 도나우강을 넘어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도나우라인을 재정비한다. 그 뒤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로마에서 떨어져 나간 두 세력)을 연이여 격파하여 이 두 지역을 다시 로마와 합병시킨다. 그는 화폐 개혁을 시도하고 로마 시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하였으며종교 개혁을 시도하여 로마의 정국과 경제 안정을 꾀한다. 이때 그가 시도한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선포하려는 시도는 훗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킨 것과 유사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런 개혁을 진행하며 동시에 사산조 페르시아를 꺾어 로마제국의 동부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행군도중 부하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한다.

    대단히 유능한 아우렐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로마군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고유 권한이나 마찬가지였던 황제 계승을 원로원에 요청하게 된다. 로마 원로원은 신임 황제를 뽑는데 상당한 혼란을 겪으며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간신히 타키투스 황제를 선출하나 70세의 고령이였던 그는 재위한지 1년만에 병사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원로원이 정국을 주도하는 일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타키투스 황제뒤 프로브스 황제가 뒤를 잇는데 그 역시 대단히 유능한 장군이였다. 그는 도나우강과 라인강 전역에 걸쳐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도나우-라인 국경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나 군단 시찰 도중 프로부스 황제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에 의해 그는 암살당한다.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와 같이 유능한 황제들의 연이은 암살은 당시 로마의 혼란상황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예였다. 카루스 황제가 뒤를 이으나 이 황제는 불우하게도 군용 캠프에서 벼락맞아 죽고 내분 끝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자리에 오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게르만족의 침입과 사산조 페르시아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사두정치를 편다. 사두정치는 네 명의 황제를 뽑아 각 황제가 그들의 영역에서 조세권,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방식이였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 로마 상황에서 매우 적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 명의 황제가 광활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통치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했기 때문이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두가지 중대한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중 하나는 로마의 조세 방식을 자치에 맞기는 것이 아닌 황제가 파견한 세무원들이 직접 징수하는 방법이였다. 그동안 로마제국의 징수법은 각 도시에 있던 원로원에게 조세량을 의뢰하면 이들이 알아서 징수하여 정부에 보내는 방법이였다. 디오클레티아누느는 이것을 중단하고 로마 정부에서 예산을 짜면 그 만큼의 세금을 정부에서 직접 파견한 세무원이 징수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를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행정구역을 더 세분화한다.

    두번째 중대한 개혁은 군제 개혁이였다. 로마 군단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두 배로 늘어난다. 이를 위해 그는 공화정 시대때 없어졌던 징병제를 부활하여 각 도시들에 일정량의 신병을 징병케하고 또한 군인의 아들은 반드시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법을 만든다. 이러한 개혁은 비록 조세 관리들의 부패과 관료제의 비대함등의 부작용을 낳았으나 거의 망해가던 로마의 정황을 크게 안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두배로 늘어난 군사력과 네명의 황제의 통치는 크게 성공하여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완전히 굴복하였고 게르만족은 라인-도나우강의 국경밖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약점이었던 제위 계승의 불확실함은(이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최대 실패작이었다) 여전히 영향을 미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서 물러나자 그 네명의 황제가 즉시 내전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로마 제국은 다시 1인 황제 체제로 바뀌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비록 본인의 야심때문에 다른 황제를 모두 없앴으나 그 역시 로마제국이 단 한 명의 황제로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죽기전 로마 제국을 이리저리 쪼개 자신의 자식들과 친척들에게 각각 맡기려 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례식때 이들 친척들은 모두 숙청되고 그의 세명의 자식들이 각각 로마 제국을 세개로 분할해 통치하게 된다. 그 세 황제도 결국 내분에 휘말려 콘스탄티우스 2세가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는 곧바로 로마 서쪽을 다스릴 부제(副帝)로 친척인 율리아누스를 임명한다.

    율리아누스는 서쪽에서 갈리아에 칩입해오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선전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니우스 역시 페르시아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였다. 로마는 모처럼 평화를 맞이하는 듯하였으나 다시 고질적인 로마의 문제. 즉 군단이 제멋대로 자신의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발생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율리아누스에게 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병 중 일부를 동부에 보내라고 명령하였고 이것에 거부한 군단병들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며 그 명령에 반항한 것이였다.

    율리아누스는 부하들의 추대로 황제를 선포하게 되자 로마제국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나 내전이 일어나기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병사하여 율리아누스가 유일한 황제로 등극한다. 율리아누스는 이미 국교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로마 고유의 다신교로 바꿀 것을 꾀하나 격렬한 반발을 겪게 된다. 그는 이것에 대한 관심을 돌리고 또한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나 전투중 심한 부상을 입어 죽게 된다. 자식이 없었던 율리아누스의 후계자는 군단이 선출하였다. 요비아누스가 선출되나 불과 일년 만에 의문사하고 뒤를 이어 발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었고 그는 상당히 유능하여 게르만족을 잘 막아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발렌스를 동제로 삼고 그는 서제가 되었는데 그가 죽자 서제의 자리엔 그라티아누스가 오른다. 동제 발렌스는 아드리나폴리스에서 삽질 끝에 고트족에게 로마군단을 전멸시키고 본인도 전사하여 로마제국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발렌스의 뒤를 이으라고 서제 그리타아누스에 의해 동제로 파견된 테오도시우스는 이들 고트족과 강화를 맺고 이런 타격을 잘 수습한다. 서제 그라티아누스가 죽자 서제 자리는 발렌티아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발렌티아누스 2세는 재위한지 9년뒤 죽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홀로 2년정도 다스리자 병사하자 그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들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에게 각각 물려준다.

    다만, 로마 제국의 양대 제국이 서로를 각기 하나의 국가로 인식했다는 얘기는 사실과 틀리고 공식적으로는 갈라진 바 없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죽음 이후 이러한 인식이 결정적으로 자리잡힌 바 없으며, 모든 포고령은 항시 동서 로마 황제의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또 동서 로마 양대 궁정은 선임 황제인 쪽이 반대편에게 강력한 내정 간섭을 할 권리가 있었다. 게다가 사실 테오도시우스 이전에는 오히려 선임 황제를 배출하는 쪽이 주로 서로마쪽이었다. 다만 테오도시우스 사후의 두 황제가 주체적인 의사로 정책을 결정하는 제대로 된 황제가 아니어서 국정을 나몰라라 했던데다, 동서 양쪽의 실력자들이 스틸리코 외에는 모두 제국에 대한 주인의식과 책임의식 없이 자기 세력과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했던지라 동서 로마 양쪽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초유의 이런 악조건에서도 서로마 제국은 유능한 군사령관이였던 스틸리코, 그리고 아이티우스의 활약으로 간신히 명맥은 유지한다. 테오도시아누스 황제가 죽기전 두 황제의 후견인으로 삼은 스틸리코는 초기엔 군사를 이끌고 서로마와 동로마를 오가며 게르만족을 열심히 격퇴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점점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누더기가 된 서로마를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급기야 스틸리코가 임명한 동로마 책임자를 죽이고 자신들만의 정부를 세운다. 결국 절망적인 재정상태의 서로마 제국만으로 게르만족을 상대해야했던 스틸리코는 노예와 검투사들까지 끌어모아 3만여명의 병력으로 게르만족을 상대해야했다. 이 병력으로 연이은 승리를 하긴 하나 드넓은 국경을 수비할 수 없었던 스틸리코는 갈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고트족의 족장인 알라리크를 고용하여 북이탈리아만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하였으나 이런 정책은 황제와 원로원의 불만을 샀고 결국 그는 암살되고 만다.

    그 뒤 스틸리코의 죽음을 안 알라리크는 고트족을 이끌고 로마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따라서 로마는 건국 초기 갈리아족의 침입 이후 처음으로 이민족에게 함락되고 만다. 사실상 서로마 제국은 이때 멸망한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서로마는 이미 방어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갈리아에서 이베리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영토 반달족에게 털리면서 경제도 망가지기 시작했고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에게도 털리면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런 소동 와중에 서로마의 장군이였던 아이티우스가 간신히 활약하여 갈리아의 남부와 이탈리아만은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다. 아이티우스는 갈리아를 침공해온 아틸라를 저지함으로써 훈족의 침략을 막아내었으나 다음해에 북이탈리아에 쳐들어온 훈족을 막아내지는 못하였고 아틸라는 마음껏 약탈한다.

    아이티우스는 다음해에 북이탈리아의 침략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은 황제의 음모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그 뒤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은 로마를 두번째로 약탈한다. 이제 서로마 황제들은 동로마에서 임명되어 부임하거나 원로원에서 선출되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엔 봉급을 받지 못한 게르만 군대가 서로마 실권자인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대장 오도아케르가 황제를 폐위시키면서 476년 서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본토를 상실했으며 달마티아(구 유고슬라비아)에서 기반을 닦아온 전 황제 네포스가 동로마의 임명을 얻어 복귀하게 된다. 그는 무능과 부패로 정적이 많았으며 이탈리아 수복 계획을 세우던 와중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암살되어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사후 오비다가 그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계승자로 오도아케르의 침공에 480년 항복하며 서로마는 끝이 났다. 서로마의 희망이였던 선군 마요리아누스의 사후를 배경으로 세워진 서로마의 한 축인 갈리아 지역이 떨어져 나가면서 세워진 로마인 국가는 총독 아에기디우스가 초대로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계승했으나 486년 프랑크와의 전쟁에서 지고 멸망하함에 따라 포로로 붙잡혀 다음해에 처형당한다. 또 다른 로마계로서는 로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게 되었지만 계속 영토가 지워나가지 않고 살아있던 북아프리카 서쪽에 있던 로마 전초들이 여럿 있었으며, 반달족 주변 야만족들과 계속 싸워나가고 로마-무어 왕국 등등 국가도 세워지고 영향력을 끼치던 중 구 로마를 수복 중이던 동로마 제국과 만나며 다시 합쳐지기도 한다.


    로마 시절에 너무 잘 나갔는지 후손들인 이탈리아인들은 세기말 막장 군대로서 새로운 전설들을 쌓고 있다. 오죽하면 로마인들 중 반은 나라 세우러 가다 죽고, 반은 나라 지키다 죽어서 이탈리아인으로 안 이어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

    대대로 유럽이나 서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한 국가는 자신이 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과거 로마의 영역이었던 땅을 정복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일부에선 기독교가 커져서 나라가 망했다고 보지만 이는 초기에는 잘 나갔으나 이후 나라가 망해가니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면서 기독교가 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부흥기에 미트라교, 오시리스교 등의 신흥 외래 종교 역시 유행했고 기독교와 이런 신흥종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을 보면 이런 경향은 분명해진다.

    게다가 시대적으로 기독교를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던 게 당시 로마 황제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게 많이 줄어든 상태라 로마 대주교(교황)가 이민족들과 직접 협상을 해야하는 상황이였고 침략자인 게르만족도 종파는 다르지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알라리크는 로마를 함락할 당시에는 교회 안에 피신한 로마 시민들에게는 약탈이나 목숨을 뺏는 행위 등을 금하였다. 이후 교회로 피한 이들이 안전을 보장받는 선례가 되어 기사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오히려 초기 로마식으로 하려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후기 로마식으로 변해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정복 사업의 정체+노예 감소로 인한 노동력 감소+경작지 황폐화+은광 생산 감소가 겹쳐서 기존 경제가 피폐하진 상태였는데, 3세기에 들어서 북방 게르만족의 남하가 거세져 국경선에 가해지는 압력이 기존 1, 2세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져서 기존의 군단병을 이용한 선방어(Limes)로 막아보려다가 물량으로 한군데 집중해서 우르르 밀고 들어오는 게르만족에게 털린게 3세기의 위기였다.

    선방어가 왜 잘 안통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면, 우선 로마가 관리해야 하는 국경은 엄청나게 길었고 따라서 한 군단이 커버하는 길이는 어마어마했다. 군단 하나가 6천명 정도였는데 이것으로 지금의 휴전선 정도의 국경을 관리해야 하는 셈. 따라서 아무리 무적의 로마 군단이라도 한 군단으로 최소한 10만에서 20만 단위로 남하하는 게르만족에 맞설 수 없었고 따라서 황제가 직접 국경으로 와서 군단을 한데 모아 이들을 쳐부서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는 전략 예비대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군단을 소집하려면 각 군단 기지에서 빼내야 했다. 그 얘기는 그쪽 국경을 텅텅 비워놓아야 한다는 것. 따라서 이렇게 빈 곳으로 빈집털이를 할 경우 로마는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병전력을 늘려서 기동력을 향상시켜서 게르만족이 중심부로 들어오기 전에 요격하는 방식을 택하다보니 기존의 중보병 중심의 "로마군" 체계가 뒤바뀌었다. 잘 나갈 때는 기존 설렁설렁한 로마식 체제로도 충분했지만 사방에 적이 늘어나고 업무가 가중화되다 보니까 동방식 관료체제와 4황제 체제로 바꿔서 정부 통제와 업무능력을 향상시켰다는 것이 근거이다.

    문제는 이렇게 내세운 4황제들이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황제가 넷이라는 건 동일한 계급에 군사지휘권까지 가진 최고권력자가 넷이라는 거고 역으로 생각하면 다른 셋을 제거하면 자기 혼자 권력을 독차지할 수도 있다는 얘기. 이런 생각을 한 건 다른 황제들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박터지게 싸운 것. 이러니 아무리 건실했던 제국도 안 망하면 이상할 수밖에...

    서로마 제국 시대 정도 되면 황제들은 로마가 아닌 라벤나에서 거주했으며 통치도 라벤나에서 했다. 이후 라벤나는 사실상 행정적으로는 서로마의 중심이 되었으며 서로마 멸망 이후 고트족도 라벤나를 수도로 썼다. 물론 원로원은 아직 로마에 있었지만.

    라벤나가 로마를 대신한 이유는 순전히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라벤나는 라인, 도나우 국경에 훨씬 가까운데다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어 지중해 동쪽으로 가기도 수월하다.

    제국이 된 이후에는 로마의 인구수가 엄청나게 늘었으면서 농지는 전쟁 등으로 버려지거나 했기 때문에 곡물을 지중해의 뱃길을 통해 수입해야 했다. 이때 식량의 주요 생산지는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였다. 그렇다고 이탈리아의 농사가 완전히 폐농한 건 아니고, 밀농사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값싼 곡식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포도 올리브 등의 재배에 주력하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밀농사를 짓는 농장도 없지 않았다.

    참고로 유럽의 유명한 도시들은 대부분 로마에 의하여 만들어진 곳이다. 대개 군사기지나 로마 이주민들이 세운 마을이었는데 군단병=시민이었던 로마 군제의 특성상 식민지에 정착하는 로마인들은 현지인들과 결혼한 로마 군인인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영국 프랑스의 수도가 된 런던 파리도 로마가 건설하거나 도시화한 곳.

    유럽 각지에다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규모의 건물들을 막 짓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북방 민족들이 로마의 건축물을 보고 거인과 난쟁이에 대한 신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스파냐에는 로마 제국이 건설한 다리가 아직도 있다. 에스파냐 카스티야이레온 자치지역 남서부 살라망카 주의 주도 살라망카에 있다. 좀 풍화되긴 했어도 멀쩡하게 생겼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쓴다.

    로마의 기술력은 고대 세계 최고인데, 이는 당시 로마가 성취한 무수히 많은 경이적인 발명들과 기계들, 기술적 업적으로 여실히 증명된다.

    문화적으로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해 그리스와 동방 국가들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건축 정치 시스템, 법학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후대에 미쳤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건축, 정치, 법 시스템의 영향은 사실상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가끔 로마가 뭐가 대단하냐고 찌질대는 사람에게 현대 법, 건축, 정치는 모두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면 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콘크리트는 로마에서 가장 처음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콘크리트의 원형은 이집트인들이 가장 먼저 개발하여 사용했다.

    다만 유럽문화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로마지만 실제 독서문화 자체는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로마시대에 책은 어디까지나 장식품으로 여겨졌으며 독서보다는 연설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었고 철학자들의 능력도 독서와 강연을 통해서가 아닌 연설과 대화를 통해 길러졌을정도. 심지어 일자무식인 장군들이 외부로 원정을 나가서 전리품으로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장식품으로 집안에 진열해 놓으면 종이가 부족한 로마 본토에서는 이 위에 덧칠해서 새로운 책을 만들었을 정도.. 그래서 로마시대에 기록된 걸로 추측되는 책들 다수에는 뒷면에 고대 그리스, 중동권의 글이 쓰여져 있을 정도. 현대에는 기술적으로 이 둘을 분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서 로마 제국의 역사가 누구의 역사인지에 대한 떡밥이 각 국가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다.

    일단 이탈리아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위치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역사라는 설과 원래 영국은 소수의 원주민들이 살았는데 로마인들이 영국을 개척하고 많이 이주를 하였으므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영국의 것이라는 설도 있으며, 또한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역사는 독일의 것, 서고트 왕국이라는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역사는 스페인의 것, 프랑스 또한 프랑크 왕국의 역사를 내세우며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하고 있으며,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운운하며 그리스 또한 로마 제국을 자기 역사로 보고 있다. 확실한 건 서유럽에서부터 북아프리카 아랍권에 이르는 광대한 규모의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할때 로마사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큰 의미없는 논쟁이므로 현대 유럽 주류 학계에서는 이러한 일을 가지고 싸우진 않는다. 동아시아에서는 큰 문제거리가 되겠지만.

    정치 체계나 민족 구성, 세계적 영향력을 보면 패권국인 미국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며 미국도 은근히 자국 이미지에 로마 제국의 이미지를 입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로마를 서로 비교하면서 로마의 흥망성쇠를 알면 미국이 어떻게 나아갈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로마의 수명은 다른 제국의 수명들과 비교해도 무지막지하게 길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가 일본과 유사하다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문제점이 비슷하다는 것인듯.


    송수관 등에 을 사용하는 등, 납을 일상생활에서 널리 썼기 때문에 중독으로 멸망했다는 설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들도 납의 독성을 알고 있었으며, 납 송수관에 석회질이 끼어서 코팅이 되어 납중독을 막아주었다고 반박했고, 사실이다.

    그런데도 납에 심하게 중독된 유골들이 발견되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납을 식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납 용기에 포도주를 담아 가열하면 둘 사이에 반응이 일어나 용기 아래쪽에 연당, 또는 아세트산납(II)(Pb(CH3COO)2)이 생성되는데 단 맛이 나서 로마인들은 그걸 조미료로 사용했고, 여러 로마 시대 요리책에도 연당이 요리 재료로 자주 언급된다.

    물론 납 중독으로 멸망했다라기에는 여러모로 무리.


    프랑크 왕국은 물론이고 많은 야만인들은 황제를 참칭하길 간절히 바랬다. 언제나 서신을 오가는 일이 있거나 하면 아직도 건재한 동로마보다 급수가 낮은 신분임을 별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9세기 카롤루스 대제 교황 레오 3세를 반대파들로부터 구출하고 황제를 참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정통 로마이며 언젠가 옛 로마의 영광을 되찾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동로마 제국은 이들의 행동을 늘 아니꼽게 여겼다.

    서로마 정통 제위교황에 의한 서로마 제국 부활자칭 제국(비정통)
    서로마 제국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제1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계승종결)
    프랑스 제국(제1제정, 제2제정)
    독일 제국(제2제국)
    제3제국


    형식적인 마지막 로마 황제였던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는 황제 직위를 프랑스 왕이나 에스파냐 왕에게 팔았으나 정작 프랑스나 에스파냐 왕들은 이 칭호를 거의 쓰지 않았다.

    동로마 정통 제위동로마 제위 주장자(비정통)
    비잔티움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모레아 전제군주국
    (1461년 소멸)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민주 혁명과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계승 종결)


    비잔티움 제국이 위치해있던 그리스인들은 19세기까지 스스로를 '로마인'이란 뜻으로 로메이(Ρομαίοι)라고 불렀다. - 현대 그리스어로 자신들을 부르는 '엘리네스'(Ελληνές)는 중세시대에는 이교도를 믿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쓰였다. - 마찬가지로 중세시대 터키인들은 그리스인들을 '로마인'이란 뜻으로 룸(Rum)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이 용법은 남아있어서 터키국적을 갖고있고 터키 내에서 거주하는 그리스인은(즉 자국내 소수민족) rum, 그리스에 거주하고 그리스국적을 갖고있는 그리스인은 yunan이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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