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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화와 현대 세계
우주의 의미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p30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p31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p32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p33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33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 p34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p34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곳, 그러니까 영화가 나타내고 있는 상황을 체험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지요. 영화배우가 극장으로 들어서면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그 영화배우를 봅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진짜 영웅입니다. p50
자동차는 벌써 신화가 되었어요.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비행기도 우리의 상상력을 섬기는 존재가 되었어요. 가령 비행기가 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새가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인간은 이승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데, 뱀이 이승의 속박을 상징한다면 새는 이승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하지요. p53
<스타워즈>에는 신화적인 원근법이라고 할 만 한게 있습니다. ...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p55
그의 아버지의 가면은 제복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건 힘입니다. 국가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p55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p61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p62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轉機)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p71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p74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은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p76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p77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흙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p85
우리가 자신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 같은 순간에 은유적으로 이해가 되는 그런 문제이기도 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지 않아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p86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90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름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에너지와 의식을 상징힙니다. p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비입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뱀은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 뱀은 시간의 장(場), 죽음의 장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장에서 기능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p97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물처럼 흐르는 것 같지요. 혀를 보세요. 불꽃 같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물과 불이라고 하는 한 짝의 대극(對極)을 뱀에게서 발견합니다. p97
대극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비롯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낙원의 동산이라는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超時間帶)인 이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이 저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곳입니다. p100
대극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보니, 저희가 서로 다른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황급히 부끄러운 곳을 가립니다. 보세요. 그전에는 서로가 대극 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대극은 남녀뿐이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은 대극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또 하나의 대극은 인간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과 악마는 제3의 대극입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대극은 남성․여성의 대극, 신인(神人)이라는 대극입니다. 이 대극을 인식하게 되자 선악의 분별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이브는 이원성(二元性)을 인식했다는 죄로, 초시간적인 융합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p101
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p102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p102
밀교(密敎)에 따르면, 한 개인이 일련의 입문 의례를 통하여 자기의 깊은 곳을 하나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윽고 자기는 영생불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필멸의 팔자를 타고난 인간이며,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p104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나위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p105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p107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p107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흔)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p107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 원형 혹은 근본적인 관념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옷이 이렇게 다른 것은 환경적, 역사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일시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차이점이지요. p107
대개의 문화권에서 창조 신화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두세 개가 있어요. 사람들이 하나로 다루기는 하지만 <창세기>에도 사실은 두 개가 있지요. ... 이것은 아주 오랜 옛날 수메르에서 차용한 이야깁니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신들은 누군가가 동산을 볼보고 필요한 먹거리를 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한 사내를 창조합니다.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신화의 배경은 바로 이 수메르 신화인 것이죠. p112
아르스토파네스가 플라톤의 <향연(饗宴)>에서 조사하고 있는 그리스 전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태초에는 지금으로 보면 두 사람이 합쳐진 것 같은 형상을 한 인간이 있었어요. 이런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었어요. 즉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 남성과 남성이 합쳐진 것, 여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이 그것입니다. p112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 중에서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는데,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p114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p114
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 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축복해주세요, 신부님. 제가 워낙 귀한 존재라서 그런지 지난 한 주일동안 제가 한 것은 좋은 일뿐입니다.” 이럴 걸 그랬다 싶군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p115
모든 종교에는 일장일단이 있지요. 즉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됩니다. p116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의 진의를 좇으려고 할 경우에는 언어라는 껍질을 버려야 합니다. ... 천문학과 물리학은 하늘을 문자상(文字上)의, 단순한 물리적 가능성의 세계 수준으로 떨어뜨렸습니다. p116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알파요 오메가인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p117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p117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 ...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p117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p118
예수는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했지만, 만일에 우리가 이런 소리를 한다면 참람(僭濫)한 독신(瀆神)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약 40년전에 이집트에서 발굴된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내 입을 통하여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요, 나 역시 그와 같이 될 것이라.” 이것은 영락없는 불교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토의 의식의 현현입니다. 단지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사고방식에서 보면 독신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노시스파 기독교나 토마의 복음에 따르면 기독교의 정수이기도 합니다. p118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先見者)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p120
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선견자는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합니다. p121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p122
상징의 마당은 백성 무리의 경험을 그 바탕으로 합니다. 특정한 사회, 특정한 시공(時空)을 함께 하는 무리는 같은 상징의 마당을 공유하지요. 신화는 문화와 시간, 장소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일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p123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드러냄이 말짱 헛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p124
이 성찬식에서 신도들은, ‘이것은 구세주의 살이고 피’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내면을 향합니다. 그 내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역사(役事)하는 거지요. 교회는 이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상을 가르칩니다. p125
그러나 ‘초월자’라는 말의 본뜻은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26
그노시스파 기독교에 따르면 야훼가 지닌 문제 중 하나는, 자기가 메타포라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훼는 자신을 메타포가 아닌 실체하고 생각했다는 거지요. 그가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했을 때 문득, “사마엘이여, 그건 오해니라”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겁니다. ‘사마엘’이라는 말은 ‘장님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음성은 야훼에게, 야훼가 영원한 광명의 국지적, 역사적 현현이라는 사시에 캄캄하다는 것을 지적한 거지요. 물론 이것은 야훼(스스로를 하느님이라고 생각한)에 대한 독신적인 에피소드로 유명합니다. p127
“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으 관념이었는데, 이것이 유태교와 기독교로 흘러들어 왔어요.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p133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 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p133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p134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p139
3. 태초의 이야기꾼들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 데 있어요.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p143
따라서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p147
초기 신화는, 삶에 필요한 행위일 경우이면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하면서도 공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지요. p148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p158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神話化)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p168
전통 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p168
4. 희생과 천복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177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p190
인류의 생활 양태가 동물 사냥에서 식물 경작으로 바뀌면서 신화적 상상력에는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대단히 극적이고 전반적인 변화가 생기지요. 신화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p195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p195
문화적으로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같은 이야기가 퍼져 있을 수 있는 것이군요. ...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히 놀라고는 합니다. 같은 이야기의 복사판이 퍼져 있으니 놀라울 수 밖에요. ... 농경문화권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인간이 대지의 자궁에서 나왔다는 표현입니다. p198
이로쿼이즈 인디언 이야기에도 쌍둥이가 등장하는데, 이들 중 하나는 ‘싹’ 혹은 ‘나무 아이’이고 또 하나는 ‘부싯돌’입니다. ... 그런데 성서를 보면 ‘싹’은 카인이고, ‘부싯돌’은 아벨입니다. 성서에서는 아벨이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양치기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양치기와 농부는 서로 반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하는 것은 농부입니다. 이것은 농경문화권을 정복하고, 피정복자인 농경민들을 욕보인 수렵 민족, 혹은 유목 민족의 신화입니다. p200
그런데 성서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 아들이에요. 둘째아들은 나중 온 자 아닙니까? 즉 히브리인을 상징하지요. 둘째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시의 도시 문화를 상징하지요. p201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p201
이렇게 신을 죽이면, 바로 이 신, 바로 이 구세주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는 것이지요. 미사의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구세주의 피요, 살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내면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과 피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어 역사는 것이지요. p202
그리스도는 ‘성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지요. 이 ‘성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그 나무의 열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의 열매입니다. 이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던 두 번째 금단의 나무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첫 번째 나무의 과실을 따먹자, 하느님은 이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 버리지요. 에덴 동산은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곳입니다. 남녀의 선악과 신인(神人)이라는 이원적인 구별이 없는 곳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여기에서 이원성의 과실을 먹고는 쫓겨납니다. 이렇게 쫓겨난 인간을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게 하는 나무는 영생(永生)의 나뭅니다. 이 영생의 나무 아래 이르러야 우리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p203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p204
조화시켜야?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肉)으로는 죽고 영(靈)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p205
마야족의 공놀이, 마야 인디언은 의례의 마당에서 농구경기 비슷한 시합을 합니다. 승패가 결정되겠지요? 그러면 이긴 팀의 주장은 진 팀의 주장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물로 희생됩니다. 목을 잘리는 거지요.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p205
죽음의 신은 춤의 신인 동시에 섹스의 신이기도 하지요. 놀라운 것은 말이지요. 죽음의 신이자 생성의 신이기도 한 이런 신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해간다는 것이에요. ...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p209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편 에세이를 통하여... “사심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연의 제일가는 이법(理法)과 자기 보존을 기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가능할 수 있는가? p210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
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p211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p217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2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6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p227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227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 -조셉 켐벨 p229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p230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p230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p233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p237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44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전형적인 모티프 중에 괴물을 죽이는 모티프가 있어요. ... 출발, 성취, 귀환...... 이것이 영웅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적이이죠. p249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p263
<스타워즈>의 등장인물들이 쓰고 있는 가면은 현대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진짜 괴물스러운 힘을 상징합니다. 다스베이더의 가면이 벗겨졌을 때, 우리에게는 아직 완전한 개인으로발달하지 못한 미숙한 인간이 보였지요. ... 다스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것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p265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p265
고래 뱃속에 들어가는 요나 이야기는 세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신화 테마의 본 같은 겁니다. 물고기가 삼키는 바람에 영웅이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변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어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갇혀 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합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물은 무의식이고, 수생동물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고래가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적인 인격을 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를 만들지요. 즉 이때부터는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의식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 즉 죽음과 부활의 테마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p268
또 하나의 유형에서 영웅은 어둠의 힘과 만날 경우 그것을 죽여버립니다. 용을 죽이는 영웅 지그프리트 이야기, 역시 용을 죽이는 영웅 성 게오르기우스 이야기가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하지요. 지그프리트는 용의 힘을 자기 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용의 피를 마셔야 했지요. p270
저 위에 있는 늙은이는 바람에 날려가고 없어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p271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p273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p273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3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p273
그가 가진 것은 실밖에 없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 우리
는 우리를 구해 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p275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p278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79
예술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p285
니르바나,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p296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p296
니체,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만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p298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p298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p299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p305
십자가로 다가감으로써 예수는 어머니를 이 땅에다 남겨두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대지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어머니 상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어머니에게서 얻은 자기 육신을 남기고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신비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p306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07
우리는 고대 유럽의 신석기 시대 조상을 무수히 발굴했지요. 다 여신상입니다. 남성상은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황소나 멧돼지나 염소 같은 동물은 남성적인 힘의 상징이지만, 이것을 시각화한 일은 별로 없어요. 시각화된 이미지는 오로지 여신 이미지뿐입니다. p308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p320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예요. p320
오시리스의 죽음은 나일강의 연례적인 범람과 상징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땅은 바로 이 나일강의 범람을 통해 한 해 농사를 지을 수 있을만큼 비옥해집니다. 그러니까 오시리스는 자기의 시체를 썩힘으로써 그 땅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p324
신의 죽음과 재생 이미지는 어느 문화권의 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이미지입니다. p328
바로 이 시점에 카톨릭 전통 속으로 히브리의 구세주 관념과 그리스의 구세주 관념이 흘러들어 옵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권능과 세속적인 권능의 통합을 상징하는 가부장제적이고 유일신적인 히브리의 구세주 관념과 처녀신의 몸에서 태어나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하는 위대한 여신의 아들이라는 그리스의 고전적인 관념이 만나는 겁니다. 그리스는 부활하는 구세주 모티프가 굉장히 많은 곳이랍니다. p330
에게해에서 인더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광대한 지역에서 이 모신 이미지가 인류를 주도하지요. 그런데 북쪽으로부터 인구인들이 페르시아, 인도, 그리스, 이탈리아로 내려오면서부터는 남성 위주의 신화가 태동합니다. 남성 위주의 신화가 대두되는 지역은 인구인들이 내려온 지역과 거의 일치합니다. p331
그러나 여신은 다릅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p336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이렇듯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 귀로 드 보르네이유, p339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하니,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 p341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인 겁니다. p343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됩니다. ... 크레도에 대한 리비도의 승리. p343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5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p347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 “나의 사랑이 있어야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겠다” ...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그러자면 용기가 필요했겠지요?” ‘하지요’ p349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p350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예요. p355
성배 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관심이 떠나 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합니다.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 버린 땅, 곧 황무지 아닙니까? ... <황무지>를 통해서 엘리엇이 표현하려고 한 것도 바로 이겁니다.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p357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p358
유럽의 마음, 유럽의 삶은 바로 이 이분법에 의해 거세를 당하고 맙니다. 말하자면 물질과 정신의 화합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정신성은 죽음을 당하고 만 겁니다. p358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토마스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p358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극 사이로 난 길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참 삶인 것입니다. p359
그는 다시 성으로 돌아와 왕을 치료하려면, 병든 사회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질문은 자기가 속한 사회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자비 혹은 연민의 표현입니다.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인 겁니다. p360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p360
토마에 의한 그노시스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가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요, 나 또한 그가 될 것이라.”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성배 전설은 바로 이러한 관념에서 출발합니다. p363
그러나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p365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p365
시련의 성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짜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p365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p365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하는 겁니다. p375
신비를 체험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오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어떤 차원이 있다는 걸 압니다. 여러 <우파니샤드> 중 하나에서 적절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p375
물론 지금은 천사나 마귀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죠. 천사나 마귀란, 나를 이끌고 인도하는 충동을 의인화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p377
서구 사람들에게는 신을 인격화시키고 신에게 인간성을 보려 하는 경향이 있어요. <잠언>을 보면, 야훼만 해도 분노하는 신, 정의와 징벌의 신, 우리 삶을 버티어 주는 인정 많은 신 등으로 인격화하지요. 그러나 동양의 신들은 더욱 본질적이고 덜 인간적이에요. 동양의 신들은 서양의 신들보다 훨씬 자연력에 가깝지요. p378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수태입니다. 이 처녀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p380
우리는 하느님이기는 하느님이되, 자아에 집착한 상태로의 하느님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이원적 초월자와 하나가 되는 깊디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만 하느님인 겁니다. p382
토마의 복음서에는 “아버지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p386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p387
원은 한편으로는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원이라는 프레임 속에 들어 있는 것이지요. 이건 아마 원의 공간적 측면일 것입니다. 그러나 원에는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갔다가는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고는 합니다. 그렇듯 원도 항상 떠났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원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지요. p389
결혼반지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는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상징이라는 말은 둘을 서로 엮는다는 뜻입니다. 결혼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p391
신화를 읽다보면 문화권도 다르고 시간과 공간도 다른데, 늘 똑같은 이미저리가 떠오릅니다. ... 우리의 정신안에는 인류의 공통되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지요. ... 창조이야기, 같은 처녀 수태이야기, 죽었다가 부활하는 구세주 이야기를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p393
우리는 신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원형이에요. p394
엘리엇은 변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고요한 중심에서는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함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 고요한 중심은, 시간의 흐름과 영원의 흐르지 않음이 공존하는 바퀴의 굴대에 해당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성배가 상징하고 있는 무궁무진한 중심인 겁니다. 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괴테는. 신성(神性)은 산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 이르는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p394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식물 생장의 신비이자 전쟁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p395
아무리 깎아봐야 풀은 줄기차게 자라니까요. 중심의 에너지가 이 풀과 같습니다. 성배 이미지, 무궁무진한 샘, 무궁무진한 근원의 의미가 바로 이겁니다. 근원은 어떤 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 두지 않고 존재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p395
종교체계의 상징을 해석하는 비교신화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 비교종교학은 신앙체계에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진 겁니다. 왜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기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p396
째깍, 째깍, 째깍 흐르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막습니다.우리는 그런 시간의 장에 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의 장에 비치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영원의 원리입니다. p404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은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p405
'되기'라는 것은 단편적입니다만 '존재하기'는 전체적인 겁니다. p410
<우파니샤드>에는 원초적인, 응집된 에너지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이 세상을 빚은 창조의 대폭발로 인해서 생긴 이 에너지는 만물에 시간의 단편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시간의 단편을 통하여 원초적인 존재의 광대무변한 힘을 체험하는 것, 이게 바로 예술의 기능입니다.
p410
그러나 궁극적인 신비, 무량의 신비는 역시 인간의 체험 너머에 있어요.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p411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문 <개인의 운명에서의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어요. 그의 생각은 이래요.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일관된 구성은 누구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느냐?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연히 만나는 특정인은 때로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는 우리 모르게 그 특정인을 중요한 인물로 인식하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어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놀라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인도 신화의. 인드라의 그물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념을 대할 수 있어요. 인드라의 그물은 실과 보석으로 짜여진 그물입니다. 즉 실과 실이 만나는 곳 마다 보석이 달려 이쓴ㄴ데, 각 보석에는 다른 보석이 비칩니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많은 사건과의 상호 관계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의 책임이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사람을 비방할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 뒤에 어떤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의지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지요. 우리가 그 의지의 조종대로 움직이느냐 여부도 모르는 일이고요. p411-412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p412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 라고 묻겠지요. 내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p412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3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p413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떄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지요. p413
아버지의 왕국은 도처에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 p413
옴....... 태어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옴'은 '사대(四大)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셋밖에 없는데 또 한 음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옴'이 끝나고, 또 한 '옴'이 시작되기까지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것은 필멸의 팔자를 지닌 것, 저것은 영생하는 것, 영생하는 것이 없으면 필멸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 p415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서 필멸하는 측면과 영생하는 측면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관한 체험에서 나는, 그 체험에는 현세적인 관계의 체험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물론, 관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내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나는 그런 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곧 에피파니의 순간이요, 계시의 순간이요, 광명의 순간입니다. p415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없는데 있는 것이지요. p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