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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베트판 육도윤회도
    참고 자료 2014. 11. 18. 15:02

               

     

                                  육도윤회도(六道輪廻圖)  Tibet. 씨빼콜로

     

     

    염라대왕이 감싸고 있는 원은 각자 지은 업(業)에 따라 여섯개로 나뉜 곳을 떠돈다는 윤회輪廻를 뜻하는 것으로 신들이 산다는 천상, 인간세상,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아수라, 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한 지옥, 목마름과 배고픔 등의 고통이 가득한 아귀 그리고 축생으로 구분됩니다.

     

    탕카 제일 중앙의 작은 원에 있는 3가지 동물(돼지, 뱀, 닭)은 세가지의 독,  욕심, 화냄, 어리석음을 뜻 하는데  이 세가지가 화근인데 이것을 어쩌지 못해 우리는 윤회의 수레바퀴안에서 돌고 있습니다. .  탕카의 정가운데를 나눠 위로 3개의 원은 인간, 천상, 아수라를 뜻하고 아래 3개의 원은 아귀, 지옥, 축생을 나타내고 있고  육도에서 바깥 12개로 나뉜 것은 십이연기 十二緣起를 의미합니다.

     

    오른쪽 제일 위에 부처님께서 손가락으로 해탈을 뜻하는 달을 가리키고 계시는데 분명 부처님은 답을 이미 제시해줬음에도 달을 가리키는 부처님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성합니다.


    출처 : http://ilovetibet.tistory.com/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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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연기법(緣起法)

     

     1.無明(무지)-2.行(성향)-3.識(의식)-4.名色(신체)-5.六入(감각)-6.觸(자극)-7.受(느낌)-8.愛(욕망)-9.取(전유)-10.有(삶)-11.生(재생)-12.老死(늙음과 죽음)

     

     욕망의 세계(欲界)에서 ‘자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2연기법이다. 5세기 남방불교의 집대성자로, <청정도론(淸淨道論)>을 쓴 붓다고사는 이 12개를 세 묶음으로 나누어, 앞의 것은 전생, 가운데 것은 현생, 뒤에 것은 내생에 배정했다. 현생부터 시작해 보면,

     

     네 번째 명색(名色), 세계의 출발은 개인의 몸(色)과 마음(名)이다. 이 신체와 정신이 없다면 세계는 순전히 무(無)일 뿐이다. 각 개인은 외적 내적 대상과의 통로인 ‘육입(六入)’ 즉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마음 또한 일종의 감각기관이다. ‘촉(觸)’은 감각기관이 구체적으로 대상과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감각기관과 어우러져 사랑을 나눈다. 대상이 감각기관을 자극하면 ‘느낌(受)’이 온다. 옛 경전에는 “나무토막을 비비면 열이 발생하듯이 쾌감을 주는 접촉으로 인하여 쾌감이 온다.”고 하였다. 티베트판 윤회도에 이것은 ‘눈에 화살이 박힌 형국’으로 그려져 있다. 외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 그만큼 강렬하고 동시에 위험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인간은 수백 개의 화살이 꽂힌 상처 입은 짐승”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화살들은 안이비설신의를 향해 시시각각 날아와 꽂히는 색성향미촉법을 가리킨다.

     이때 쾌감을 주는 감각은 계속시키려고 하고 불쾌감을 주는 자극은 단절시키려고 한다. 인간은 감각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한 다음 적극적으로 수용 혹은 배제하려고 한다. 이 과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진행되고 가끔 의식되기도 하는데, 이 적극적 반응을 ‘욕망(愛)’이라고 부른다. 욕망은 지속되면서 ‘집착(取)’으로 굳어지고 특정한 패턴과 지형을 형성하게 된다. 각자는 이 지형도를 따라 대상을 선별하고 인식의 영역을 결정해 나간다. 이것이 인간의 일상적 경험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그 반응의 구조이다. 이 사이클은 반복 강화되어 한 인간의 퍼스낼러티를 형성하고 그 세계를 결정한다.

     

     본시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세계는 인간의 관심에 의해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有(삶)’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의미한다. 소유와 축적, 세계는 바로 이 사유를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심과 욕망으로 하여 다시 말하면 감각기관과 그 접촉의 의지를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유식(唯識)에서는 법(法)과 상(相)을 갈라본다. 법은 객관적 실재이고 상은 의지와 표상으로 하여 드러나는 주관적 세계를 가리킨다. 우리가 가진 것은 상일 뿐 법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주관적 환상 속에서 그 편견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이것을 깨닫는 저것이 불교의 첫걸음이다. 이 깨달음이 있어야 불교의 목표인 무아(無我)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유식이 말한 변계소집성(遍界所執性)이 바로 인간의 의지와 표상에 의해 드러난 세계를 가리킨다. 명부실(名不實), 우리들의 의식과 판단은 그러므로 개인적 집단적 집착과 편견의 소산이므로 객관적일 수 없다. 그 감옥을 벗어나야 세계의 참 모습이 보이고, 우리는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세계는 자아의 중력에 의해 휘어져 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불교 이해의 관건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과 욕구, 주장, 그리고 지배와 권력의 의지를 통해 주변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놓고 있는데, 이 ‘주관적 환상(相)’을 ‘있는 그대로의(如如)’ 세계라고 착각한다. 붓다 혹은 여래란 이 사태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그 객관을 가장 순수하고 견고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파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불행의 궁극적 기원은 우리가 삶의 불행과 비참을 추동하는 연쇄 고리의 메커니즘을 모른다는 ‘무지(無明)’에 있다. 탐욕과 분노도 그 무지, 근본무명의 결과일 뿐이다. 무명은 12연기의 시작이면서 또 근원적 해악인 삼독의 뿌리인 것이다.

     

    (한형조, 붓다의 치명적 농담, 문학동네, 2011. 121~136쪽 抄.)


    출처 : http://blog.naver.com/nugu58/8015093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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