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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웅스님
    참고 자료 2014. 9. 27. 10:03

    분별심 없어지면 智德 절로 생겨요

    모두 내몸 같은데 원수가 어딨겠어요

     


      철웅스님

    청정한 기운이 성한 팔공산 자락의 이 도량에서 24년째 머물고 있습니다. 20년 결사를 발원하고 산문출입을 않은지는 18년됐습니다. 명년이면 회향하는 게지요. 많은 사람들이 물어요, 왜 세상에 나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결사한 것은 다른 스님들보다 근기가 우둔해서 입니다. 초발심의 마음을 견지하려면 두문불출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부처님 법에 비추어 만족스럽게 공부가 되지않아 10년을 더 연장해 결사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렇게 사는 모습으로도 고맙고 감동적이라고 말합니다만, 사실 나는 매 순간순간 틀고앉아 있으면서 아까운 시줏밥이나 축내면서 세월만 보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야심이 강했습니다. 심지어 1등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까지 먹었으니까요. 부친께서 통도사 내원암 밑에서 제재공장을 크게 운영하셔서 돈을 막 거두어 들인 덕분에 경남중학에 입학했고 서울유학이 가능했지요. 고등학교 1학년때 아버님사업이 세상말대로 폭삭 망했습니다. 나는 어렵게 영어통역 아르바이트로 가계를 꾸려가면서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현실은 내 야심을 채울 수 없었고 학업을 중단하는 지경까지 갔어요. 다시 의욕을 내 연세대 철학과로 새로 입학하면서 흥사단운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당시 열정의 대상은 조국을 위한 일이었고 몸을 바치겠다는 각오였지요. 그러나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커다란 부처님 세계만이 나를 몰입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해인사에 간 것이 인연이 됐지요. 그때 운허스님으로부터 <능엄경>을 배우며 3년동안 해인사에서 수행했습니다. 학사가 중이 되고 산좋고 물좋은 이곳에 정착해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팔공산 기운이 대단합니다. 10여년 전부터 참선 여가로 태극권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새벽에 10여분 하는데 운기심공에 도움이 됩니다.


    돌이켜 부처님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수생을 살면서 쌓은 공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은 참선 기도하는 불자들이 많이 옵니다. 또 초하루면 법회도 엽니다. 나는 출가수행자로서 본분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실천하고자 내 수행만큼 열심히 찾아오는 대중들에게 법문도 하고 있습니다. 세속에 사는 재가불자들에게는 출가수행자들과 입장이 다른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어떻게 수행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단히 고귀한 불자로서의 자세라고 봅니다.


    사실 전문적으로 출가해 수도하는 사람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어려운데 잡다한 일을 해가면서 번뇌망상에 시달리는 사회인들에게는 수행생활이 결코 쉽지 않은거지요. 그렇다고 불자로서 수행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하느냐. 기(氣)가 맑은 새벽과 밤에 잠자리에 들기전 각1시간씩 매일 2시간을 집중해서 해보세요. 하다보면 산중에서 수시간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염불 주력 좌선 독경 등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길들이 있습니다. 수행법이라고 하는데 자기 몸에 맞는 방편을 쓰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나가면 승속을 초월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고 맑은 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의문이라고 하는 화두입니다. 원력을 담아 노력을 하면 스스로 자성(自性)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을 지키고 사니 흔들리지 않습니다. 분별심이 없어지니 마음이 편안해질 날이 옵니다. 지덕(智德)이 절로 생기고 기(氣)가 발생합니다. 분명히 몸뚱이는 전(前)과 같지만 의식이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많은 불자들이 실천수행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주력을 생각해 봅시다. 관세음보살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일심으로 칭명하면 눈앞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갖가지 번뇌로 흩어져 있는 우리의 마음이 ‘나무관세음보살’을 염송함으로써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어지러운 마음이 점점 안정되어 편안함을 얻게되고 이를 통해 마음이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송하면 삶에 대한 용기가 생겨나고, 분노로 격한 마음은 자비심으로 전환됩니다. 이때쯤되면 나 자신을 관세음보살이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는 순간까지 해야합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밥먹는 것을 죽을 때까지 하듯이 말입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항상 즐겁고 밝은 생각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나아가 남을 위해 사세요. 결국 마음을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같은 생활은 불법을 간절히 제대로 믿다보면 자연히 우러나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실천하는데는 쉽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활은 흔히 교과서적인 표현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입니다.


    “내 오장육부야 고맙다” 또 “이웃 자연만물들이여 감사합니다”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저절로 생활이 능동적으로 됩니다. 그리고 내몸을 남에게 바칠 때 그 사람이 내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흔히 사회문화를 통해 전승된 인간의 보편적이고 타당한 경험을 지식이라 합니다. 이는 경험의 한계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서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식은 끊임없이 바뀌고 변화하며 진보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다릅니다. 동일한 상황을 범부와 성인은 다르게 보며 행동합니다. 성인은 제한된 시공의 범주를 넘어 인과의 입체적 고리를 통찰하여 세계와 만나기에 화평하며, 범부는 습득한 관습을 통해 관성의 한계에서 대상과 대립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빛깔도 모양도 냄새도 더더구나 빗장도 없는 마음의 문이 관성과 업력으로 떠다니며 제멋대로 여닫으면 그것은 범부의 용심(用心)입니다. 수행의 동력을 통해 얻은 지혜로 어디서나 자유롭게 여닫되 만물을 유익하게 하면 그것은 바로 성인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오로지 부처님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라고 하셨던 그 가르침 하나를 가지고 우선 자기를 단련하세요. 그것은 분수와 위치를 알고 자기역할을 하는 것에서 이뤄집니다. 어리석은 마음 욕심 분노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욕망으로부터, 아는 것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마음은 그 본래의 빛을 찾습니다. 언뜻 지식의 습득과 지혜의 전승과정은 그렇게 상반되고 대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바탕으로 한 유용한 지식은 다시 큰 바다에서 합류하게 되어있습니다.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음양분별이 있는 3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불법의 세계는 4차원입니다. 일즉다(一卽多)이면서 다즉일(多卽一)인 세계이지요. 예를 들어, 밤하늘의 달은 분명 무진장합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볼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강물속에 비춰진 달은 하나뿐 입니다. 결국 깨달음의 세계는 생각속에서 온세상을 맛볼수 있습니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가장 극복해야하는 것이 선악의 분별심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별심은 극복됩니다. 원래부터 분별심이란 없는것이니까요.


    인생관을 긍정적으로 갖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십시오. 이 세상은 마음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치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대상과 관계에 애착하지 말고 공평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연따라 왔다 가는 것으로 생각해야지 붙들어 매려고 하면 고통이 옵니다. 결코 고정불변의 것이 없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리라 하는 것이 곧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지옥 축생 아귀 수라 인간 천상의 이 세상엔 무한한 중생이 살고 있다며 이 모든 중생들을 다스리려면 방하착(放下着)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선악(善惡)으로 나와 남을 대결시켜놓으면 미운 놈이 나타납니다. 보세요, 물이 0℃ 이하로 내려가면 얼어요. 마찬가지로 미움에 집착하면 간담이 서늘하게 됩니다. 또 기뻐해보세요, 심장이 뜁니다. 분노해도 마찬가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이 커지다보면 비장이 다칩니다. 걱정하고 슬퍼하며 놀라고 두려워하는 등 이같은 7정(七情)은 인간의 5장(五臟)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종교는 7정을 없애주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의 세계는 인간 현상계 분별심을 떠난 본래 마음자리 입니다. 절대적인 선인 지선(至善)의 경지이지요. 남의 얘기 같습니다만 지구촌의 영웅호걸들이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왔습니다. 그런데 실제 원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평생을 몸으로 보이신 동체대비(同體大悲) 가르침은 결국 모두 내 몸과 같은데 원수가 어디있겠냐는 것이지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는데 남을 불편하게 할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에 의지해 인연따라 남을 유익하게 하십시오.


    사랑이니 사업이니 찾기전에 우선 내 인격과 의식구조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 행복과 심성이 인간의 사고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사이에 늘 따르는 것이 갈등입니다. 실제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요소가운데 하나로 대인관계를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갈등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쉼없이 크고 작게 운명처럼 닥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등을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는 사람살이에 적지않은 과제가 됩니다.


    결국 두 가지의 길입니다. 어떠한 경계나 대상을 따라 그대로 수순함으로써 결과와 이후의 역사를 복되게 하는 경우가 있고, 닥친 경계를 용기있게 거스름으로써 보다 가치있는 삶을 담보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됐던 이같은 결정의 과정에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용기라는 덕목을 지적한 것은 수순하지 못할 경계에서 하심으로 행동하는 경우와 거스르지 못할 경계에서 과감히 거슬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수순해야할 경계에서 오만하게 거스르며, 거슬러야할 경계에 대해서는 비겁하기에 자타(自他)를 복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탐욕과 어리석음 이기심 등의 경계에서는 거스르고 남의 아픔과 불행을 자비심으로 감싸고 고통을 나누기에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한편 전법의 공덕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데, 일단 포교에 나섰을 때는 믿으라고 먼저 강요하지 마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대상으로 삼는 사람에게 우선 부처님 가르침을 찬찬히 이해시켜 가면서 그사람 스스로 진리를 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이후 믿음은 수반되기 십상입니다. 우리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교육도 이러한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혜의 창조적 동력을 계발시키는 근본교육을 실행함으로써 행위규범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국민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봅니다. 지혜는 자유로운 정신의 바탕에서 체득됩니다. 요즘 서구산업사회 끝에 서있는 동서양 모두, 다시 이같은 동양의 지혜의 덕목을 탐색하고 활발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하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나는 상좌복이 많은 스님 가운데 한사람일 것입니다. 조계사 주지등 은상좌가 있고, 법상좌로 6명이 있는데다 외국인 유발상좌도 여럿됩니다. 미주 유럽 동남아지역의 상좌들은 주로 학자들이지요. 외국인 유발상좌들은 불교관련 출판물들은 물론이고 종교학 관련서 들을 꼬박꼬박 챙겨서 보내줍니다. 서신으로 통하는 법거량도 그 나름의 공부를 점검하는 수단이 됩니다.


    받기어려운 사람몸받고 나온 금생에 일대사 인연도리를 깨닫는 수행에 매진하시기 거듭 당부드립니다.


    현대불교신문 1997-08-13 138 【수행한담】철웅스님<성전암 주석>

     

     

     

     출처 : http://cafe.naver.com/bohd/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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