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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으로 오시는 하느님
    좋은 글 2013. 10. 15. 16:18

    빛으로 오시는 하느님


    정제천 


    정제천/예수회 신부. 광주 가톨릭 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의 영성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하느님은 빛을 창조하면서 당신의 천지창조 사업을 시작하였다.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빛은 인식의 조건으로서 빛이 없이는 천지의 사물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천지창조에 앞서 빛을 창조한 것은 다분히 인간을 위한 처사이기도 하다. 빛은 이와 대립되는 어둠과 함께 설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빛과 어둠의 싸움이었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둠을 밝히는 분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빛


    빛이신(요한 12,46)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의 죄악이 극심하여 세상이 어둠에 싸여 있을 때였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탄절을 밤이 가장 긴 동지와 연관지어 잡은 것이다. 이는 어둠에 싸인 세상에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었으니 앞으로는 낮이 길어지듯이 세상이 진리의 빛으로 더욱 밝아짐을 뜻한다. 부활절 성야 미사 예식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캄캄한 밤에 성당 내에 모든 불을 꺼놓은 상태에서 사제가 알파요 오메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촛불을 켜들고 성당에 입장한다. 사제가 촛불을 들어올리며 “그리스도의 광명”이라고 외치면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힘차게 응답한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불빛을 옮겨 받는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신 그리스도를 가져가고 증거하겠다는 결의의 표시이리라.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 예식 때 사제가 새 영세자에게 촛불을 밝혀주며 권고하는 말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이 되었으니 끝까지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참 빛이신 말씀을 알아보지 못한(요한 1,9-10) 이 세상에서의 신앙 생활은 어둠 속에 촛불을 밝혀드는 것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시게 변화된 것은 그분이 빛으로 오신 분임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또 예수님은 눈먼 소경에게 빛을 찾아주었듯이 사람들에게 빛을 주신다. 예수님이 주시는 빛은 신약성서에서 차츰 삶의 태도와 내면의 일로 심화 이해된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둠을 벗어나서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 ‘자기가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1요한 2,9-11).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진리의 성령이 마음속에 살아 있으면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이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빛은 점차로 내면화되어 이해되었으며 신앙 생활에 필요한 식별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교회 전통에서는 신앙 생활의 여정을 <정화, 조명, 일치의 3단계>로 구분한 데에서 내면의 빛의 의미가 특히 두드러진다.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결합되기 위해서는 먼저 죄로부터 정화될 필요가 있다. 정화된 영혼에 하느님의 진리의 빛이 주어지면서 올바른 길에 맛들이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과 합일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명이라 함은 하느님의 영이 인간 영혼에 빛을 쪼이는 것을 말한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내적 은총을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는 16세기 스페인에서 있었던 계명파(Alumbrados : ‘비추임을 받은 자들’이란 뜻)처럼 ‘조명’을 과장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중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며, 자신들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눈에 죄로 보이더라도 자신들은 성령의 빛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았다.


    혹독한 믿음의 밤


    그러나 빛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인간이 알아보는 문제는 계명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에 대해서나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에 대해서나 인식의 투명성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어둠 속의 길, 밤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의 성요한이 말한 어둔 밤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과 하느님의 합일은 인간적 감각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통상적인 믿음으로도 가능하지가 않다. 인간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감각이 정화되어야 하고(감각의 밤), 다음에는 영혼까지도 정화되지(영혼의 밤) 않으면 안된다. 믿음은 확실하면서도 어두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믿음의 빛이 영혼에게 내릴 때, 영혼에게는 도리어 캄캄한 어둠이 되는 것이니, 큰 것이 작은 것을 이기고 없애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빛이 다른 빛들을 없애버림과 같으니, 태양이 한 번 비치고 우리의 시력을 부시게 하면, 다른 빛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태양광선이 너무 세어서 우리 시력에 맞지 않으면, 도리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이 소경이 되는 것처럼, 믿음의 빛도 너무 세기 때문에, 이성의 빛을 눌러서 이기는 것이다.” (《가르멜의 산길》 제2권 3장 1) “여기서 믿음이 영혼에게는 어둔 밤이며, 이런 식으로 빛을 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믿음은 영혼을 눈멀게 하면서 빛을 주기 때문에, 영혼을 어둡게 할수록 그만치 더한 빛을 영혼에게 준다.” (같은 책,제2권 3장 4) 믿음의 빛이 우리 영혼에는 오히려 어둠이라는 것이다.


    성녀 소화 데레사 역시 혹독한 믿음의 밤을 겪었다.


    “제가 올해 쓴 시들에 표현된 감정들을 가지고 판단하시면 당신이 보시기에 저는 위안으로 가득찬 영혼이며 신앙을 가린 너울이 거의 찢겨진 사람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너울이 아니라 별이 박힌 천계와 하늘나라에까지 이르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을 영원히 소유하는 행복을 노래할 때에 거기에 기쁨은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노래했을 뿐이기 때문이지요. 때때로 아주 작은 햇살이 저의 어두움을 비추기는 합니다. 그때에는 잠깐동안 시련이 그칩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빛살의 기억은 저에게 기쁨을 주기는커녕 어두움을 더 깊게 만듭니다.”                               - 성녀의 편지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있어서 어둔 밤은 끝이 아니었다. 일치의 단계를 묘사하는 영적 찬가에서 그는 고요한 밤을 노래하며, “이 고요한 밤은 완전한 어둠이 아니라 오히려 여명이 가까워 오는 밤”이라고 하여 새벽을 기다리는 희망의 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느님 안에서 평온하게 쉬는 영혼은 신적 빛, 하느님의 새로운 인식 안에서 쉼을 맛보기 때문에 자연적 지식의 어두움에서 하느님의 초자연적 지식에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어둔 밤이 걷히고 동녘이 밝아오는 새벽을 영적 혼인으로 묘사한다. 빛이 충만한 아침의 이미지만으로는 하느님과 인간의 전적인 합일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 이냐시오의 절망과 환희


    깊은 정화의 단계에 이어서 깨달음의 빛을 얻은 사례를 우리는 성 이냐시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병상에서 회복기를 보내는 동안에 그리스도전과 성인전을 읽었는데, 그때에 영들의 움직임과 함께 하느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하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초대교회라고 한 만레사 동굴에서의 생활로 그는 전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초기 얼마간은 영적인 위로가 계속되었으나 이 생활은 금방 끝났다. 이어서 그는 몇 달 동안의 메마름을 체험하고 급기야는 극심한 세심증과 자살의 유혹까지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죄스러움에 대한 통찰 때문이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영영 버려진 듯한 자신의 처지를 통탄하며 하느님께 매달렸다. 그는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사람들이나 피조물에서는 어떤 답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알 수만 있다면 어떤 수고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할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것이 동네 강아지를 따라가는 것이라 해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하고 절규하였다.


    이런 극적인 밑바닥 체험 뒤에 그는 강렬한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 조명은 환시는 아니었는데, 그는 이 조명으로 인해 영적인 일들과 신앙 및 학적인 것에 관해서 많은 일들을 알게 되었고 만사가 그에게는 새롭게 보였다. 그때의 체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말년에 회고하면서 그는 평생 동안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을 다 모은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에 받은 것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체험으로부터 그의 삶은 남을 위해 바치는 사도적인 삶으로 전향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이 빛으로 우리에게 오시지만 이 빛은 자연의 빛과는 달라서 우리에게 어둠으로 나타나며, 그 짙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비쳐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성 생활에 의미 있는 한 가지 가르침을 얻게 된다. 즉,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절망과 좌절로 인해 넘어지고 앞길이 캄캄할 때야말로 하느님의 빛이 비추이는 때이기에, 우리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빛이신 하느님을 보려거든 어둔 밤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첫 성탄절 저녁에 빛이 되어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으로 알아본 이들은 인간적으로 ‘빛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천한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과 병자들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둠을 아는 사람, 어둠에 몸서리쳐 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빛을 그리워하고 빛을 알아뵐 수 있을까?


    천지창조의 빛, 성탄절의 빛, 어둠 속에 외치는 ‘그리스도의 광명’은 지금도 우리를 비추고 있다. “야훼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시편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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