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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과학철학 분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중요한 저작인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의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 1963, 전2권, 이한구 옮김, 민음사 펴냄)이 이한구 성균관대 교수(철학)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모두 21편의 글을 모은 논문집이다. 포퍼는 이 책에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라는 서양의 오랜 지적 전통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비판적 합리주의’의 논리를 드러낸다. 그는 먼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비롯해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틀을 잡은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메논(Menon)>에는 소크라테스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어린 노예와 대화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이 노예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그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해내는 데 이르도록 돕는다. <메논>의 이 장면은 ‘산파술’이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방법에 대한 훌륭한 예증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란 산파가 임부의 출산을 돕듯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방법이다. <메논>의 이야기에는 또한 ‘상기설’이라 불리는 플라톤의 인식론이 바탕에 깔려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의 영혼이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 신들의 세계에 머물 때는 온전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영혼은 신적인 지식을 온전히 망각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지식을 얻는 것은 태어나기 이전 영혼이 지녔던 온전한 지식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플라톤의 ‘상기설’이다.
플라톤의 상기설은 인간이 온전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서구의 낙관적 인식론의 뿌리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이런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이다. 그의 산파술은 인간이 지닌 편견, 전통적으로 믿어온 것,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거짓된 신념, 무지와 독단에서 나오는 일시적인 거짓 대답 등을 논파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행위다. 그의 산파술은 어떤 신념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거짓된 신념, 그럴듯하게 보이는 지식, 편견으로 가득 찬 영혼을 정화하거나 맑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이다.
포퍼가 보기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전통은 베이컨의 경험주의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그대로 이어진다. 가령 베이컨은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예측이나 추측 또는 추정이나 편견을 제거해야 “‘자연’이라는 책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포퍼가 보기에 “베이컨의 귀납법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근본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둘 다 편견의 정화를 통해 명백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 역시 근본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 자명한 진리의 확고한 기반에 이르기 위해 마음의 모든 거짓된 편견을 타파하는 방법이 바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이기 때문이다.
포퍼는 어떤 인식에 이르기 위해 마음의 편견을 몽땅 제거하거나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현실적이지 않은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양날의 칼로 모두 비판하며 “인간의 이성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실수나 착오는 인간 이성의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며, 우리는 실수와 그것의 수정을 통해서만 지식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출발점을 ‘이성’에 두느냐 ‘경험’에 두느냐 하는 전통적인 논쟁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불확실한 출발점을 수정해서 진리의 방향으로 근접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인식 행위는 늘 합리적 비판을 필요로 한다. 이상이 그가 ‘비판적 합리주의’라 부른 방법의 주요 얼개다.
포퍼는 이 방대한 논문집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독단주의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생각을 전제로 깔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소박한 낙관론자이며, 여전히 ‘이성’을 통해 인간을 바라보는 서구의 지적 전통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다.
모처럼의 공든 번역에서 숱한 오탈자가 눈에 띄는 건 좀 아쉽다.
(《한겨레》2002. 1. 4. / 2008. 3. 13. 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