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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노론
[ 老論 ]- 조선 후기의 정파(政派).
소론(少論)과 함께 앞시기의 서인(西人)에서 갈라져 나왔다.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서인 내부에는 정치운영 방식, 훈신(勳臣)·척신(戚臣) 등 특권세력과의 제휴, 남인(南人)에 대한 처리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거기에 지도자인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 윤증(尹拯) 사이의 불화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파를 이루어 남구만(南九萬) 등을 중심으로 결집한 소론과 대립하였다.
숙종대에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정쟁(政爭)의 축을 이루었으나, 남인이 중앙정국에서 몰락한 뒤 경종대와 영조대에는 소론과 대립하면서 중앙정치를 주도하였다. 특히 경종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동생인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을 후원한 것이 반대파인 소론에게 반역으로 몰려,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大臣)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형되는 사건[辛壬士禍]을 겪음으로서 소론과의 융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에 소론을 반격하여 소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제거하였고, 소론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뒤로는 조정에서 확고한 우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蕩平策)으로 붕당을 깨고 국왕의 국정운영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국왕의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가 점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전통적인 붕당의 의미는 퇴색되어 갔다.
18세기 말에는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높이는 데 찬동하는가의 입장 차이에 따라 시파(時派)와 벽파(僻派)가 대립하였다. 그것은 노론 자체의 분기라고 설명되는 경우가 많지만, 남인과 소론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그 이후 노론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던 데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시파와 벽파는 노론 내부의 분열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에 의한 결집이었다. 노론의 명분과 이념은 19세기 이후로도 존속하였으나, 정권을 잡아 정부를 운영하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노론의 사상은 대개 이이(李珥)를 거쳐 김장생(金長生)·송시열에 의하여 조선식으로 소화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였고 이단을 적극적으로 배격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중원에서 명(明)나라의 멸망으로 끊어진 천하의 정통성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조선중화사상(朝鮮中華思想)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또 정치이념에서는 사족(士族)의 정치주도권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정파를 군자가 모인 군자당(君子黨)으로 여기고 반대당을 소인당(小人黨)으로 규정함으로써 반대파의 숙청과 권력독점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이념은 남인과 소론 등에 의하여 비판받았고, 내부에서도 세계의 객관적인 인식과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파(北學派)가 성장함으로써 극복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사회정책은 대상인과 대지주의 입장을 대변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공리공담에 빠져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저버린 채, 낡은 질서와 기득권의 유지에 집착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근래에는 그들이 오랜 시간 사회를 주도할 수 있었던 힘과 논리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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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노론 [老論]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