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
장애와 가난으로 힘겨웠던 어린 시절
|
|
|
|
|
|
탁월한 정치이론가로 거듭니다
그람시에게 1917년은 중요한 전환기였다. 토리노에서는 1917년 초부터 식량부족과 물가상승으로 시위가 빈발했으며 8월에 들어 빵 공급이 중단되자 노동자들은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켰다. 사흘 동안 계속된 가두투쟁은 기관총과 탱크가 투입된 유혈 진압으로 50여 명이 사망했으며 약 1,000명이 투옥되거나 최전선으로 보내졌다. 8월사건으로 인해 토리노 사회당 지부의 모든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검거되자 그람시는 '잠정위원회'에 선출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준지하활동을 하게 된 당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전쟁은 1918년 11월 끝났고, 이듬해 11월에 열린 전후 첫 선거에서 사회당은 득표의 1/3을 획득할 정도로 큰 지지를 얻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팽창했고 자본집중 또한 급격히 진행되었으며, 산업자본의 평균이윤율은 4.26 퍼센트에서 7.75 퍼센트로 증가하고 피아트 같은 회사는 자본이 열 배로 불어났다. 공업부문에서의 이러한 자본 집중은 상당수의 소기업을 몰락시킴으로써 많은 소상공인이 프롤레타리아화 되었고 이에 따른 불만으로 사회당에 대한 지지가 급증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 해에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그 후 몇 달 뒤인 12월 그람시는 사회당 일간지인 [전진 (Avanti!)]에 <자본론에 거역한 혁명>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글을 써서 그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렸다. 마르크스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으나, 후진 농업국인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으니 이는 마르크스 이론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닌가? 당시 팽배한 이 두 의문에 대해 그람시는 러시아혁명이야말로 진정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실천한 것으로 역사유물론을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멘셰비키나 제2인터내셔널 방식의 조잡한 경제 결정론으로 다루는 대신, 그는 역사 속에서 집합적인 인간들의 의지 및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러시아혁명은 민중의 각성 및 계급투쟁이 혁명으로 이어진 것으로 어디까지나 자본론에 부합한 혁명이라고 분석했다.
![]() 1919년 창간한 주간지 [신질서(L'Ordine Nuovo)]. | ![]() 그람시의 정치적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 그들은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을 함께 창당했지만, 노동대중과 당의 역할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다. |
|
![]() 아내 줄리아 슈히트(Julia Schucht)와 두 아들. | ![]() 처형 타티아나 슈히트(Tatiana Schucht)는 옥중의 그람시와 많은 편지를 나누는 한편, 동생과 그람시를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주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