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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공용행(無功用行)
    좋은 글 2017. 12. 19. 12:10

    무공용행(無功用行)

     

    일체 만유는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스스로는 체성이 없어서 남()이 없으며,

    따라서

    현실적으로 마치 '작자'(作者)가 실제로 있어서,

    그가 뜻을 세우고 생각을 내어서 애써 작용을 일으키고 있을 때에도

    이 모두는 실제로는 전혀 성취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거듭되는 이야기지만, 이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진실로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그가 작용을 일으키는 일은 없는 것이다.

     

    예컨대,

    바람이 불기 때문에 물결이 이는 것이지, '물결' 스스로가 힘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제 멋대로 춤추는 게 아니라는,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사람들에 의해서 말끔히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모든 '진실'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진실'은 항상 분명하게 늘 코 앞에 펼쳐지고 있는데,

    다만 사람들의 미혹한 마음 때문에

    잠시 잠깐 헷갈린 한 생각이 '진실'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버리는 것이다. ···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 엄연한 '진실'을 깨달아서 그에 명합(冥合)하려면,

    모름지기 온갖 법에 공력을 들이는 일이 없이,

    오직 인연을 따르면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공용 없는 지혜'(無功用智)를 증득하여

    <작용하되 작용함이 없는 작용>(作無作作)을 자재하게 굴릴 줄 알아야

    비로소 이를 일러서

    <'부처의 집안'(佛家)에 태어난 참된 '부처 자식'(佛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수행자가 참된 수행의 길을 따라서 정진(精進)한 끝에

    설사 '불성'(佛性)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공용이 없는 행'(無功用行)을 드러내어서,

    <'고요함''작용'이 둘이 아닌 도리>를 자재하게 굴릴 수 없다면

    그는 참된 '불자'(佛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엔 끝내 능·소가 다하지 못해서

    여전히 범용한 '자아'가 허망한 '유위행'을 그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신령스러운 성품'(靈性)을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여래 지혜의 업'(如來智業)이 드러나면

    '이와 사'(理事),

    '성과 상'(性相),

    '범부와 성인'(凡聖),

    '참과 허망'(眞妄) 등이

    홀연히 원융(圓融)되게 서로 사무쳐서,

    '자비'가 지극히 크지만 결코 애착하는 마음에 얽매이는 일이 없고,

    종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도

    도무지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 근본지''공용이 없는 행업'(無功用行業)으로,

    '공용'이 없으니 '고요함'()이요,

    ''은 바로 '작용'()이므로,

    이것이 바로 <고요함과 작용이 둘이 없는 '지혜'의 업> (寂用無二智業)인 것이다.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등 삼승(三乘)

    아직 방편의 가르침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성인이 어쩔 수 없어서 '수행''증득'을 권한 거지만,

    지금에 열심히 '인행'(因行)을 닦아서 훗날 그 공덕의 보람으로 '결과''증득'하게 된다는,

    이와 같이 <'공용이 있는 것'(有功用)

    결코 실다움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애써 이룩한 일체의 보람은 무상(無常)하여

    끝내 허물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붓다가 49년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애쓴 보람도 결국은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을 대하는 중생이

    제 마음 속에서 능·소의 자취를 완전히 쓸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곧,

    '설함'()이 있고, '들음'()이 있는 한

    그것이 '방편의 가르침'(權敎)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답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49년에 걸친 화신불(化身佛)의 가르침도 권교(權敎)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결코 세존의 가르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의 참된 뜻을 밝힘으로써,

    오직 '''문자'에만 매달려서

    <끝내 말로써 드러낼 수 없는 '성스러운 뜻'(聖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책하자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천명함으로써,

    '부처' 자신의 존재마저도 넘어선 경지를 드러내고자 한 점이다.

     

    결코 그는 "나를 따르라"는 식의 눈먼 가르침을 편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위대함이 만세에 떨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출처 :  http://blog.daum.net/potaehwasao/87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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